아이티 포르토프랭스 카프2 발전소에서 ESD 직원이 엔진 부품을 청소하고 있다. 기름때가 많이 발생하는 작업장인데도 바닥에 기름얼룩 하나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깨끗하다(왼쪽). 포르토프랭스 거리엔 의식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는 빈민들로 넘쳐난다. 2010년 1월12일 25여만 명의 사상자를 낸 대지진의 충격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한 모습이다. 박상주
두켄스 부청장, “이 자리에는 진 모로스 전력청장이 나오셔야 하는데 해외 출장 중이어서 제가 대신 나왔습니다. 제레미와 라고나브 지역 주민들은 현재 하루 4시간밖에 전기를 공급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날씨가 더운데 냉장고도 사용하지 못하고 있어요. ESD 덕분에 제레미 주민 10만 명과 라고나브섬 주민 4만 명이 문명의 혜택을 누릴 수 있게 됐습니다. 두 지역에서 ESD가 배전사업을 하는 데 필요한 지원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아이티 전체 전력 사용량의 35% 생산 최 사장, “주민들 불편을 덜어드리도록 최대한 빨리 공사를 진행하겠습니다. 우선 발전소 가동에 필요한 연료를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도록 전력청이 지원해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최 사장과 두켄스 부청장이 계약서에 서명을 했다. 2004년 11월 발전기 및 발전기 부품 판매 사업으로 출발한 ESD가 전기를 생산하고 판매까지 하는 전력회사로 발돋움하는 순간이었다. 우리나라의 한국전력처럼 발전과 배전을 담당하는 사업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불과 10년도 채 안 되는 기간에 만들어낸 쾌거였다. 총리 공관을 빠져나온 최 사장이 다시 차를 타고 어디론가 향했다. 차가 멈춰선 곳 역시 총리 공관처럼 높은 담장으로 둘러쳐져 있었다. 육중한 철문이 열리자 총을 든 경비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높은 담 때문에 밖에서는 보이지 않던 내부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왼편으로 높은 송전탑과 대형 컨테이너가 줄지어 서 있었고, 가운데 쪽으로 둥그런 유류저장탱크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안으로 조금 들어서자 ‘웅웅’ 발전기 돌아가는 소리가 귀를 자극한다. ESD가 운영 및 관리를 맡고 있는 포르토프랭스 카프2 발전소였다. 그런데 발전소라고 하기엔 구석구석 깨끗하게 정돈돼 있었다. 널찍한 정원은 곱게 손질된 파란 잔디로 덮여 있었다. 20개의 컨테이너는 밝은 녹색으로 통일돼 있었고, 유류저장탱크에는 분홍색·하얀색·검은색 등 저마다 다른 페인트칠이 돼 있었다. 발전소라기보다 알록달록 예쁜 조형예술물을 보는 듯했다. 발전소 오른편으로 아담한 단층짜리 사무동 건물이 있었다. 사무실 문을 밀고 들어서자 직원들이 오랜 친구를 반기듯 스스럼없이 최 사장을 맞이한다. 잠깐 사무실에 앉아 물 한 잔을 마시는 동안 최 사장의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 회사는 지금 아이티의 발전소 4곳을 운영·관리하는 업무를 하고 있어요. 포르토프랭스의 카프2 발전소와 중부 고나이브 발전소, 북부 캡헤이션 발전소 3곳은 베네수엘라 석유공사와 아이티 정부기관인 모네티사시옹(Monetisation)의 합작회사 소유로 돼 있어요. 나머지 1곳은 미국 국무부 원조로 지은 아이티 북부 카라콜 섬유공단 발전소입니다. 이들 발전소에서 아이티공화국 전체 전력 사용량의 35%를 생산하고 있어요. 카프2 발전소는 그중 가장 많은 34MW의 전력을 생산하고 고나이브 발전소와 캡헤이션 발전소에서는 각각 13.6MW씩 전력을 생산하고 있어요. ESD는 3곳의 발전소 운영을 통해서만 연간 1200만달러의 매출을 올리고 있습니다. 우리 회사는 이제까지 발전소의 운영·관리만 했습니다. 전력 생산과 공급의 주체는 아이티 전력청이었지요. 하지만 조금 전 총리 공관에서 제레미와 라고나브 지역 전력 공급 계약서에 서명하는 순간부터 ESD는 전력 생산에서 배전, 전기요금 수납까지 일괄적으로 운영하는 전력회사로 도약하게 된 거지요.” 일주일 만에 죽어 있던 발전소 엔진 살려내 그런데 최 사장은 무슨 연으로 카리브 해안의 섬나라인 아이티의 발전소를 관리·운영하게 됐을까. 무슨 재주로 아이티 정부로부터 전력 공급 사업까지 떠맡는 위치에 올랐을까. “저기 창문 밖을 보세요. 아이티와 베네수엘라, 쿠바 국기가 게양대에서 나란히 펄럭이고 있지요. 저희가 운영하는 3개의 발전소는 세 나라가 협력해 건설한 겁니다. 베네수엘라에서 원조해준 석유를 팔아 발전소 건설 자금을 마련했습니다. 쿠바에서는 발전소 건설과 운영을 맡았고요. 그때 쿠바 전력청이 발전소 엔진으로 채택한 제품이 바로 H중공업의 ‘힘센 엔진’이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문제가 터졌습니다. 2009년 8월 북부 캡헤이션 발전소의 엔진 8대가 모두 가동이 중단되는 사태가 발생한 거예요. 아이티 북부지방에 전기 공급이 전면 중단되는 대형 사고였어요. 발전소 가동을 시작한 지 채 1년도 되지 않을 때였지요. 5일 동안 전기가 끊기자 주민들이 들고일어났어요. 화들짝 놀란 르네 프레발 당시 아이티 대통령이 긴급대책회의를 소집했지요. 그 자리에 H중공업 관계자 두 분도 호출을 당했습니다. 저는 H중공업 관계자들의 통역으로 참석했고요. 그때까지만 해도 ESD는 H중공업 발전기 부품을 파는 회사였거든요.” 아이티 대통령궁 각료 회의실에 들어갔더니 30여 명이 쫙 앉아 있더라고 했다. 회의를 주재한 프레발 대통령과 총리, 건설장관, 재무장관, 전력청장 등 아이티 각료들뿐 아니라 베네수엘라 대사와 쿠바 대사, 쿠바 전력청장 등 관계자들이 모두 참석한 자리였다. 하나같이 거물급이었다. 대책 없는 갑론을박과 책임 공방이 이어졌다. 쿠바 쪽 사람들은 H중공업의 발전기 탓을 했단다. 엔진 불량으로 가동이 중단됐다는 얘기다. 최 사장은 이때 오가는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보니 쿠바 사람들이 발전소 유지와 관리를 제대로 못하고 있다는 판단이 들었다. “그래서 제가 그 자리에서 폭탄 제안을 했습니다. 내가 해결해보겠다, 8일만 기한을 달라, 복구해보겠다, 그랬더니 라파엘 전력청장이 ‘당신 그 말 책임질 수 있느냐’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한번 믿고 맡겨달라고 했지요. 달리 뾰족한 수도 없었지만 어쨌든 그 자리에서 저의 제안을 받아들이더라고요. 지금 생각해봐도 정말 당돌한 제안이었어요.” H중공업 사람들은 무슨 말이 오갔는지도 몰랐단다. 나중에 회의장에서 나와 이야기를 했더니 펄쩍 뛴 건 당연한 결과다. 최 사장의 회사 기술진이 들어가서 일주일 만에 죽어 있던 엔진 8대를 모두 살려냈다. 예상한 대로 엔진에 큰 이상이 있는 게 아니었다. 일정 기간이 지나면 교체해줘야 하는 부품을 교체해주지 않았거나 볼트나 너트 등을 조이지 않아서 발생한 고장이었을 뿐이다. 때론 계약서 위에 찍는 도장보다 눈도장이 더 확실한 보증 역할을 해준다. 종이에 찍는 도장은 종종 부도를 내지만 눈도장은 약발이 오래 지속되는 신용장 역할을 해주는 경우가 많다. 아이티와 쿠바, 베네수엘라 세 나라가 속수무책으로 끙끙거리던 고민거리를 한 방에 해결한 최 사장은 아이티 정부로부터 확실한 눈도장을 받게 된다. 아이티에 가장 많은 원조를 하는 나라는 베네수엘라다. 현찰로 원조하는 게 아니라 석유를 현물로 준다. 이 때문에 베네수엘라에서 원조해주는 석유를 팔아서 현찰로 만들고, 그 돈을 어디에 쓸지 기획하고 배분하는 기구를 두고 있는데, 아이티 해외원조금 기획 배분처라고 할 수 있는 모네티사시옹이 그 주인공이다. 콜럼버스가 발견한 금맥보다 더 귀한 인맥
‘카리브해의 전력왕’으로 불리는 최상민 ESD 사장이 운영 및 관리를 하고 있는 발전소는 공원처럼 예쁘고 깔끔했다. 아이티 수도 포르토프랭스의 카프2 발전소를 둘러보던 최 사장이 파란 잔디로 덮인 유류저장탱크 앞에서 직원들과 환하게 웃고 있다. 박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