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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찰리… 데이비드… 돈… 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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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10-24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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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원 NG 리포트

일러스트레이션/ 설은영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면서 이름이 예기치 않은 장애로 돌변했다. 문제는 내 이름이 발음도 기억도 어려운 구조라는 것이다. 이름문제에 봉착한 유학생들은 흔히 영어별명을 사용했다. 조금 쓰다 싫증이 나면 별명을 바꾸는 학생도 많았다. 개중엔 운이 좋아 한글이름에서 곧장 연상되는 영어별명도 있었다. 예를 들자면 혜현(헬렌), 혜리(해리), 필호(필로), 철수(찰스), 민아(미나), 수지(수지) 등이다. 그러나 나는 마땅히 연상되는 게 없었다. 궁여지책으로 택한 것이 ‘찰리’였다. 만화 <스누피>의 ‘찰리 브라운’이 깜찍했고 ‘철-찰’ 정도의 연상은 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찰리’를 한 3년쯤 썼나 좀 싫증이 나기 시작했다. 통성명에서 가장 피곤한 경우는 상대가 스펠링을 물을 때다(이는 일단 발음의 실패를 전제로 한다). 찰리는 C-H-A-R-L-I-E 7개의 알파벳을 불러주어야 한다. 나의 알파벳 발음 역시 정확지 않다보니 A를 I로, L을 R로 잘못 듣는 경우도 많았다. 특히 H는 항상 까다로운 놈이었다. 한국에선 ‘에이치’로 배웠는데 오스트레일리아에선 ‘헤이치’로 쓰는 사람도 많기 때문이다. ‘헤이치’ 하기가 어색해 ‘에이치’ 하면 무슨 ‘A+치’인가 하고 의아해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 바꾼 이름이 데이비드였다. 쉬운 발음과 스펠링 그리고 뭔가 단정하다는 어감까지 안성맞춤이었다. 마침 석사를 마치고 새로 법대 공부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데이비드로 굳어지는 분위기였다. 첫 수업시간 신입생들이 하나씩 자기 소개를 하고 있었다. 나도 내 차례를 기다리면서 무슨 말을 할까 생각하고 있었다.

한데 예기치 못한 상황이 발생했다. 한 20명가량 자기 소개를 마칠 동안 ‘데이비드’가 무려 3명이나 되는 것이 아닌가. ‘데이비드’가 많으면 곤란했다. 한국산 ‘데이비드’가 오스트레일리아산 ‘데이비드들’에 비해 열세에 놓일 것은 뻔한 일. 3년 동안 ‘데이비드’라는 이름이 불릴 때마다 착각과 혼란 속에서 보낼 수도 있다.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윽고 내 차례가 되어 교수가 출석부를 보고 ‘동’(Dong)이라고 불렀다. 그때 갑자기 떠오른 생각. ‘맞아. 동의 이응을 니은으로 바꿔 돈(Don)으로 쓰면 어떨까.’ 훌륭한 영어명이었다. 외자라 발음하기도 기억하기도 쉽고 또 내 이름에서 직접 연상된다는 이점도 있었다. 자신있게 ‘돈’으로 나를 소개했다. 문제는, 나는 ‘돈’이라고 했는데 듣는 사람들은 그걸 '동'으로 들은 것이었다. 거기다 교수도 나를 먼저 ‘동’으로 부르지 않았는가. 이때 바보가 되기란 어렵지 않다. “‘동’이 아니라 ‘돈’으로 불러 줘. 하지만, 사실은 ‘동’이 본명이고 ‘돈’은 너희들을 위해 만든 별명이야.” 이런 말을 하고 돌아다녀야 된다. 그래서 결국 난 ‘동’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돌고 돌아 진짜 이름인 ‘동’으로 돌아온 것이다. 오히려 홀가분했다. 내 이름을 다시 찾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몇년 동안 ‘찰리’, ‘데이비드’ 할 때마다 느꼈던 찝찝함을 떨쳐버릴 수 있었다. 진작 이랬어야 했는데….


책으로 보는 세계/ <…국가의 범죄>

40년 전 파리에선?

지난 10월17일 베르트랑 들라노에 파리 시장이 처음으로 정부의 공식 행사로 알제리인 학살을 추모하는 기념식을 생ㅡ미셸 다리에서 열었다. 책표지 윗부분의 사진 속에 보이는 “ici on noie les alg riens”이라는 문구는 바로 그 자리가 알제리인을 수장한 곳임을 가리키고 있다. 40년 전 파리에서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동안 정치권과 경찰은 이 사건의 진실을 밝히려고 하기보다는 축소, 은폐하는 것으로 일관해왔다. 알제리 민족해방전선(FLN)의 테러에 책임을 전가하면서 경찰이 저지른 만행을 정당화해온 것이 일반적인 흐름이었다. 알제리전쟁이 시작된 54년부터 작가인 프랑수아 모리악은 프랑스군대가 알제리에서 벌이는 고문과 학살에 대해 경종을 울리는 글을 신문과 잡지에 발표하고 나섰다. 그러나 지식인의 참여는 한참 뒤에나 이루어졌다.

최근 알제리전쟁과 관련해 많은 책들이 쏟아져나오고 있다. 그 가운데 <1961년 10월17일, 국가의 범죄>(라디스퓨트출판사, 2001)는 ‘망각에 반대하는 1961년 10월17일 협회’가 주도하여 1부 증언, 2부 분석자료, 3부 각종 공식기록을 엮은 것으로 이 시기를 전후해 파리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열쇠를 제공하는 책이다.

알제리전쟁 말기 프랑스 정부와 알제리 임시정부 사이의 협상이 중단된 상황에서 당시 파리의 경찰국장인 모리스 파퐁(비시정부 아래서 유대인을 나치수용소에 보낸 혐의로 전범 재판을 받고 현재 수감중)의 지휘 아래 알제리인에 대한 탄압이 더욱 강화되기 시작한다. 이에 맞서 민족해방전선은 경찰에 대한 테러를 지시, 그해 8월 말에서 10월 초까지 11명의 경찰이 살해되는 일이 벌어진다. “경찰 1명이 당하면 알제리인 10명”이라는 파퐁 경찰국장의 보복명령이 떨어진 뒤 센 강에서 알제리인으로 보이는 신분미확인 시체들이 발견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10월5일 비합법적인 야간통행금지령(20시30분에서 5시30분까지)이 실시된다. 바로 10월17일은 3만∼4만명의 알제리인들이 민족해방전선의 지시 아래 파리의 거리에서 알제리인들에게만 강요된 이 조치에 항의하는 평화시위를 벌인 날이었다. 이날 시위에서 경찰의 총격과 검거 뒤 살해, 수장 등으로 300여명의 알제리인들이 희생되는 비극이 벌어진 것이다.

알제리는 식민지에서 해방된 뒤 여전히 내전의 갈등을 겪고 있고 프랑스는 자신이 저지른 제국주의적 만행이 낳은 상처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다른 나라를 지배, 억압하는 나라는 스스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마르크스의 말이 새삼 떠오른다.

파리=신순예 통신원 soonye.sin@libertysurf.fr



시드니=정동철 통신원 djeo8085@mail.usyd.edu.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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