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신원 NG 리포트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면서 이름이 예기치 않은 장애로 돌변했다. 문제는 내 이름이 발음도 기억도 어려운 구조라는 것이다. 이름문제에 봉착한 유학생들은 흔히 영어별명을 사용했다. 조금 쓰다 싫증이 나면 별명을 바꾸는 학생도 많았다. 개중엔 운이 좋아 한글이름에서 곧장 연상되는 영어별명도 있었다. 예를 들자면 혜현(헬렌), 혜리(해리), 필호(필로), 철수(찰스), 민아(미나), 수지(수지) 등이다. 그러나 나는 마땅히 연상되는 게 없었다. 궁여지책으로 택한 것이 ‘찰리’였다. 만화 <스누피>의 ‘찰리 브라운’이 깜찍했고 ‘철-찰’ 정도의 연상은 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찰리’를 한 3년쯤 썼나 좀 싫증이 나기 시작했다. 통성명에서 가장 피곤한 경우는 상대가 스펠링을 물을 때다(이는 일단 발음의 실패를 전제로 한다). 찰리는 C-H-A-R-L-I-E 7개의 알파벳을 불러주어야 한다. 나의 알파벳 발음 역시 정확지 않다보니 A를 I로, L을 R로 잘못 듣는 경우도 많았다. 특히 H는 항상 까다로운 놈이었다. 한국에선 ‘에이치’로 배웠는데 오스트레일리아에선 ‘헤이치’로 쓰는 사람도 많기 때문이다. ‘헤이치’ 하기가 어색해 ‘에이치’ 하면 무슨 ‘A+치’인가 하고 의아해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 바꾼 이름이 데이비드였다. 쉬운 발음과 스펠링 그리고 뭔가 단정하다는 어감까지 안성맞춤이었다. 마침 석사를 마치고 새로 법대 공부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데이비드로 굳어지는 분위기였다. 첫 수업시간 신입생들이 하나씩 자기 소개를 하고 있었다. 나도 내 차례를 기다리면서 무슨 말을 할까 생각하고 있었다.
한데 예기치 못한 상황이 발생했다. 한 20명가량 자기 소개를 마칠 동안 ‘데이비드’가 무려 3명이나 되는 것이 아닌가. ‘데이비드’가 많으면 곤란했다. 한국산 ‘데이비드’가 오스트레일리아산 ‘데이비드들’에 비해 열세에 놓일 것은 뻔한 일. 3년 동안 ‘데이비드’라는 이름이 불릴 때마다 착각과 혼란 속에서 보낼 수도 있다.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윽고 내 차례가 되어 교수가 출석부를 보고 ‘동’(Dong)이라고 불렀다. 그때 갑자기 떠오른 생각. ‘맞아. 동의 이응을 니은으로 바꿔 돈(Don)으로 쓰면 어떨까.’ 훌륭한 영어명이었다. 외자라 발음하기도 기억하기도 쉽고 또 내 이름에서 직접 연상된다는 이점도 있었다. 자신있게 ‘돈’으로 나를 소개했다. 문제는, 나는 ‘돈’이라고 했는데 듣는 사람들은 그걸 '동'으로 들은 것이었다. 거기다 교수도 나를 먼저 ‘동’으로 부르지 않았는가. 이때 바보가 되기란 어렵지 않다. “‘동’이 아니라 ‘돈’으로 불러 줘. 하지만, 사실은 ‘동’이 본명이고 ‘돈’은 너희들을 위해 만든 별명이야.” 이런 말을 하고 돌아다녀야 된다. 그래서 결국 난 ‘동’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돌고 돌아 진짜 이름인 ‘동’으로 돌아온 것이다. 오히려 홀가분했다. 내 이름을 다시 찾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몇년 동안 ‘찰리’, ‘데이비드’ 할 때마다 느꼈던 찝찝함을 떨쳐버릴 수 있었다. 진작 이랬어야 했는데….
시드니=정동철 통신원 djeo8085@mail.usyd.edu.au

일러스트레이션/ 설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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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보는 세계/ <…국가의 범죄> ![]() |
시드니=정동철 통신원 djeo8085@mail.usyd.edu.a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