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4월, 미군이 이라크 바그다드를 점령한 뒤 사담 후세인 친위조직 ‘페다인 사담’ 등의 저항이 이어졌다. 미군 병사들이 사담 후세인의 고향 티크리트에서 페다인 사담의 일원으로 의심되는 사람을 체포해 장갑차에 태우고 있다. AP
지켜보던 사람들, 치명적인 실수 이들을 포함한 많은 이라크 주민들은 거리에 갑자기 출현한 미군 탱크에 놀라서 어떻게 대응할지를 모르고 처음에는 담장 위에 앉아서 그 ‘해방자’들의 생각이 무엇인지를 보려고 기다렸다. 그러다가 5월이 지나고 6월이 되자 상황은 명백해졌고, 이들도 바뀌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해방자 미국은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러 이들의 변화를 재촉했다. 부시 행정부의 이라크 침공은 중동개조론이라는 원대한 구상의 일환이었다. 중동 핵심부의 국가 이라크의 반미독재 정권을 타도하고 민주주의를 이식해, 중동 전체에 친미적인 민주주의 체제를 전파하겠다는 대담한 발상이었다. 이 발상의 타당성 여부를 떠나서, 미국의 이라크 전쟁 계획은 이의 실현에 전혀 부합하지 않았다. 도널드 럼즈펠드가 추진한 부시 행정부의 군개조론에 입각한 이라크 전쟁은 ‘더 적은 병력으로, 더 빠르게 배치해서, 결정적으로 승리한다’는 원칙에만 입각했다. 걸프전 때의 절반에 불과한 병력이었다. 미국은 허약한 이라크군과 정권을 신속히 와해시키는 데 집중했다. 여기에는 빌 클린턴 민주당 행정부 시절 미국이 발칸반도 분쟁 등지에서 개입한 국가재건 사업에 대한 혐오도 바탕했다. 분쟁 개입 이후 치안을 유지하고 정부 수립 등 국가재건 사업을 하는 것은 미군과 미국의 몫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바그다드를 점령한 미군은 치안을 유지하며 국가재건 사업을 할 병력도 없었고, 그럴 계획도 없었다. 그래서 미국이 애초 이라크 정권 붕괴 이후 구상한 접근책은 ‘인사이드아웃’이었다. 이라크에 있는 세력을 끄집어내 세운다는 의미다. 즉, 후세인 정권을 붕괴시킨 뒤 미군은 이라크 국내외에 잠재해 있던 반후세인 세력을 규합해 신속히 정권을 맡기고 빠진다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기존 군과 경찰 등 후세인 체제의 치안 병력 등을 다시 소집해, 이들에게 초보적인 치안을 맡기면서 치안력을 재건하는 방안도 포함됐다. 이는 기존 치안 병력의 반체제화를 막는 길이기도 했다. 중부군 사령부와 점령 초기 임시 당국인 이라크재건인도지원처(ORHA)의 제이 가너 처장도 당연히 이런 입장이었다. 인사이드아웃 접근책이 이라크 전쟁의 목적인 중동개조론을 실현하는 데 적합한지도 의문이었지만, 미국은 이조차 갑자기 뒤집어 전후 정책은 뒤죽박죽된다. 이라크인으로 이뤄진 임시정부 구성 실무 작업은 아프가니스탄 출신으로 부시 행정부 내의 최고위직 무슬림인 잘메이 칼릴자드 국가안보위 위원이 맡았다. 소련의 아프간 전쟁 때부터 미국 이슬람권 정책의 브레인인 칼릴자드는 미국의 아프간 침공 뒤 하미드 카르자이 정권 수립 실무도 맡았다. 그는 후세인 정권이 붕괴하기 전부터 영국 런던에 밀집했던 반후세인 이라크 망명 인사들을 소집해 이라크 남부 도시 움카스르로 데려와 이라크 신정부 구성 작업을 시작했다. 프랭크스 중부군 사령관도 바그다드 함락 일주인 뒤인 4월16일 30~60일 내로 이라크 정부가 기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 작업은 곧 제이 가너 처장의 급작스런 경질로 중단된다. 해방군이 아니라 점령군 가너는 바그다드에 도착한 지 2주 뒤, 그가 ORHA 처장으로 임무를 시작한 지 열흘도 안 된 4월30일 자신이 경질돼 외교관 출신의 폴 브레머 3세가 임명된다는 통보를 받았다. 그의 전격적 경질은 워싱턴에는 충격이었다. 그가 후세인 정권의 집권당 바트당의 당료와 관료들을 철저히 제거하는 ‘탈바트화’에 소극적이어서, 이라크 전쟁에 주도권을 쥔 부시 행정부의 네오콘 세력을 격분시켰다는 것이 정설이다. 폴 브레머가 ORHA를 연합군임시행정처(CPA)로 바꾸고 이를 사실상 임시정부로 설정하면서 기존의 ‘인사이드아웃’ 방안은 ‘아웃사이드인’으로 급격히 선회했다. 즉, 외부 세력이 이라크로 들어와 당분간 통치한다는 것이었다. 폴 브레머는 임명 전 부시와의 인터뷰에서 “우리가 선사하는 해방은 미국이 세계에 주는 선물이 아니다. 그것은 신이 인류에게 주는 선물이다”라는 부시의 연두교서 어구를 부인에게서 받았다며 보여줬다. 부시는 웃음지으며 브레머의 손을 굳게 잡고, 자신이 합당한 인물을 선택했다고 확신했다고 한다. 브레머는 부시와 네오콘들이 꿈꾸는 중동개조론에 입각해 전후 이라크 정책을 펼치겠다고 부시에게 말했다. 그는 이라크 사태가 100m 단거리 경주가 아니라 마라톤이 될 것이라고도 말했다. 부시는 “그 일이 끝날 때까지 우리는 머물 것이다”라며 브레머에게 시간이 얼마큼 걸리더라도 자유롭게 원하는 대로 하라고 했다. 5월11일 부임한 브레머는 마치 식민시대 총독처럼 군림했다. 칼릴자드가 5월15일에 열기로 주선했던 새로운 임시 이라크 정부 구성 회의는 취소됐다. 브레머가 이라크에 온 지 열흘 만에 선포한 CPA 명령 1호는 바트당의 상위 4계급 당료들의 신이라크 정부 봉직을 금지하는 탈바트화 정책이었다. 하루 뒤인 5월23일 그는 더 충격적인 명령 2호를 선포했다. 이라크군과 모든 후세인 정권의 국가기관 해체를 선포했다. 그는 또 ‘7단계 540일’ 계획이라는 대담하고 장구한 전후 일정을 명세화했다. 새로운 이라크 헌법을 기초하고, 이를 승인하는 국민투표를 실시하고, 이에 기초해 선거법을 만들고, 그러고 나서 전국·광역·기초 선거를 실시해 이라크 정부를 구성한다는 일정이었다. 그는 백악관에 보낸 첫 보고서에서 이라크 정치인들과 정치적 대화를 재개하되, 급박한 이양은 없다는 것이 새로운 기저라고 밝혔다. 부시도 “당신은 나의 전적인 지지와 확신을 받는다. 우리는 조급함에 맞서야 한다”고 브레머에게 전권을 주었다. 한마디로 서구식 민주주의 제도를 이라크에 완전히 이식하겠다는 것이었지만, 미국이 하는 것을 지켜보던 이라크 주민들에게 상황은 명백해졌다. 미군은 해방군이 아니라 점령군이었다. 브레머의 철저한 탈바트화 정책으로 6만5천~9만5천 명에 이르는 공화국수비대, 이라크 정보국, 페다인 민병대, 바트당 간부들은 직장을 잃고 반미·반체제 세력의 중추로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30만 명에 달하는 이라크군 병사들 역시 기약 없는 실업자 신세로 전락했다. 이들 모두에게는 무기가 있었고, 그 주변에는 불만에 찬 수니파 아랍인들이 있었다. 부시가 승전 선언을 하면서 바그다드가 포함된 ‘수니 삼각지대’의 무질서는 깊어지며 서서히 조직적인 저항으로 바뀌어갔다. 수니 삼각지대는 이라크의 최대 인구조밀 지역으로 후세인 정권 시절 주류였던 수니파 아랍인들이 주로 거주하는 지역이다. 북쪽의 티크리트, 동쪽의 바쿠바, 서쪽의 라마디를 잇는, 한 변의 길이가 약 200km인 삼각지대다. 바그다드는 이 삼각지대의 남쪽 변에 위치한다. 후세인 정권 시절 인구구성에서는 시아파에 비해 소수였으나 정권의 주류였던 수니파 아랍인들이 미군 점령 이후 자신들의 지위가 격하되자 먼저 반란과 폭동의 대열에 앞장섰다. 페다인 민병대와 공화국수비대는 대부분 수니파 아랍인들로 구성돼 있기도 했다. 본격적인 내란으로 소규모 게릴라 스타일의 무장그룹들이 소총과 RPG, 그리고 기초적인 사제폭탄(IEDs)으로 순찰 중인 미군과 호송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특히 바그다드와 그곳에서 서쪽으로 약 70km 떨어진 팔루자에서 미군과 주민들 간의 긴장이 고조되며 대중 폭동과 소규모 충돌이 상시화됐다. 이라크는 본격적으로 내란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정의길 <한겨레> 국제부 선임기자 Egi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