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사를 청산하지 못한 한-일 협정은, 일본 정치인의 망언과 한국 국민의 분노가 반복되는 악순환을 분만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 간사이 네트워크 회원들이 2013년 5월 일본 오사카시청 앞에서 하시모토 도루 시장의 망언을 규탄하며 진정한 사과를 촉구하고 있다.한겨레 이정아
1952년 1차 회담에서 한국 쪽은 1949년 작성한 조서에서 전쟁의 인적·물적 피해와 민간의 보상 요구를 축소했고, 일본 정부의 수탈에 의한 피해를 삭제했다. 그럼에도 일본은 역청구권 개념으로 맞섰다. 한국의 청구권 요구에 대응하기 위한 협상 전술이었다. 조선에 살았던 일본인들의 재산에 대한 권리를 주장한 것이다. 일본은 전후 복구 과정에 있었고, 배상에 대한 경제적 부담을 걱정했다. 조선에서 살다 돌아온 50만 명 수준의 일본인들도 고려했다. ‘독립 축하금’ 혹은 ‘경제협력 자금’ 일본의 역청구권 주장에 대해 1952년 한국은 미국 정부에 해석을 요청했다. 회담 기간에 한-일 양국은 지속적으로 미국에 중재를 요청했다. 그래서 한-일 협정을 양자 협상이 아니라, 아예 3자 협상으로 규정하는 의견도 있다. 미국 국무성은 주미 한국대사관에 답신을 보냈다. 이른바 1952년 4월의 러스크 서한이다. 미국은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제4조에 따라 일본의 역청구권 주장은 근거가 없다고 답했다. 동시에 한국의 대일 청구권은 일본인의 재산 처분으로 상쇄됐다는 의견도 적었다. 미국이나 영국 등 강대국들은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배상에 인색했다. 자신들에게도 부메랑으로 돌아올 수 있는 선례를 남기지 않으려 했다. 한-일 회담은 냉전이라는 무대 위에서 전개됐다. 미국은 아시아에서 확고한 반공 전선을 구축하기 위해 한-일 관계의 정상화를 원했다. 경제적 측면도 작용했다. 1950년대 후반 미국은 국제수지 적자가 증가하면서 대외 무상 원조를 차관으로 전환했다. 일본에 경제적 책임 분담을 요구했고, 한-일 협상에 적극적으로 임하라고 촉구했다. 1960년대 들어 케네디 행정부는 한국에는 실질적 이득을, 일본에는 지원의 명분을 줘서 차이를 좁히려고 했다. 당연히 역사 문제를 중시하지 않았다. 청구권 개념에서 경제협력 자금으로 성격을 변경한 것도 미국이고, 3억5천만달러에서 4억5천만달러의 협상 금액을 제시한 것도 미국이다. 1964년 말부터 한-일 협정을 둘러싼 한-미-일 3국 관계가 더 빨리 돌아가기 시작한 것도 정세 변화 때문이었다. 8월 통킹만 사건을 계기로 미국은 북베트남에 폭격을 시작했다. 1965년 2월부터 한국의 비전투부대의 베트남 파견이 시작됐다. 10월에는 중국이 핵실험에 성공했다. 존슨 행정부는 한-일 협정을 서둘렀다. 일본은 ‘청구권’이라는 개념엔 과거 식민지 역사에 대한 평가가 개입되기 때문에 회담 기간 내내 돈의 명목을 ‘독립 축하금’ 혹은 ‘경제협력 자금’이라고 주장했다. 1962년 11월 김종필 중앙정보부장과 오히라 외상의 회담에서 대략적인 액수가 합의됐다. 무상 3억달러, 유상 2억달러, 민간 신용공여 1억달러 이상이었다. 일본의 협상 전략은 철저한 증거 논쟁으로 한국의 청구권 요구를 단념시키고, 그 대신 경제협력 방식으로 타결하는 것이었다. 경제협력 방식은 일본 기업들에 새로운 기회이기도 했다. 당시 외무성 조약 국장이던 나카가와는 “상대국에 공장이 생기고 일본의 기계가 돌아가면, 수리를 위해 일본에서 부품을 수입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일본의 손해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박정희 정부도 경제적 측면에서 한-일 협정을 서둘렀다. 수출 지향 산업화를 위해서는 한-일 양국의 국제분업 체계를 강화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대일청구권의 법적 근거가 부족하고 증빙자료가 불충분해서 청구권 금액이 감액되는 것보다 경제협력 방식이 훨씬 유리하다는 판단도 했다. 독도 문제, 협상의 마지막 고비 박정희 정부의 협상 전략을 어떻게 평가할까? 명분보다 실리를 우선했다는 평가가 있다. 과연 그럴까? 청구권의 성격과 액수를 다른 동남아 국가와 비교해볼 필요가 있다. 유상차관과 상업차관을 제외한 무상 금액만 비교해보자. 버마는 3억4천만달러(1954년 2억달러, 1963년 추가 협정으로 1억4천만달러), 필리핀은 5억5천만달러를 배상받았다. 인도네시아도 1957년 4억달러(2억2300만달러, 무역 채권 1억7천만달러 포기)를 배상받았다. 명칭도 버마와 필리핀의 경우 ‘배상’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잘된 협상으로 보기 어렵다. 더 큰 문제는 개인청구권의 근거를 봉쇄한 점이다. 한-일 협정은 “청구권 문제가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됐다”고 규정했다. 일본은 이 조항을 근거로 전쟁 피해자들의 개인 청구권이 소멸됐다는 입장을 취한다. 1945년 8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조선인 원폭 피해자, 징용·징병 피해자, 그리고 종군위안부는 보상받지 못했다. 박정희 정부는 민간인의 대일 보상 문제를 한국 내에서 일괄처리한다고 밝혔지만, 절차가 까다로워 실제 보상받은 사람이 거의 없다. 독도 문제도 한-일 협정의 쟁점 중 하나였다. 일본은 처음부터 독도가 자신들의 영토임을 주장했다. 그래서 일본은 독도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자고 한국을 설득했다. 국제사법재판소는 분쟁 당사국이 합의해야만 조정 절차가 이루어진다. 김종필-오히라 회담에서 오히라는 “양쪽이 국내 정치적인 문제로 독도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어렵다면, 국교 정상화 교섭 후에는 반드시 이 건을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한다는 약속을 한국 쪽이 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때 김종필은 ‘제3국 조정안’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당시 박정희 의장의 훈령과 다른 것이었다. 훈령은 “이 문제가 한-일 회담의 현안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왜 김종필은 이렇게 주장했을까? 미국을 염두에 둔 3국 조정 방안이라는 것이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는 점을 생각한 것이었다. 실효적 지배를 하고 있는 한국의 입장에서, 독도 문제를 미해결 상태로 유지하기 위한 작전상의 대안이었다는 주장이다. 당시 미국은 독도 문제와 관련해 분쟁을 피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필요하다면 한국과 일본의 공동 소유 방안도 검토할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 독도 문제는 협상의 마지막 고비였다. 분쟁 해결에 관한 교환 공문을 작성할 때, 일본은 “다케시마 주권에 관한 분쟁을 포함하며”라는 문구를 고집했다. 물론 이 구절은 한국 쪽의 반발로 삭제됐다. 최종적인 문안은 “양국 간의 분쟁은 우선 외교상의 경로를 통해 해결하고, 해결할 수 없는 경우에는 양국 정부가 합의하는 절차에 따라 조정을 통해 해결하기로 한다”는 것이다. 한국은 독도가 분쟁 해결의 대상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일본은 이 조항에 독도가 포함된다고 해석했다. 그래서 일본은 처음에는 ‘중재’라는 단어를 집어넣으려 했고, 그것이 안 되자 결국 ‘조정’이라는 단어를 삽입했다. 이 조항을 둘러싼 양쪽의 협상은 1965년 6월22일 오전 협정 조인식 25분 전에야 끝났다. 협상가는 이익만큼 역사 책임 인식해야 한국은 너무 서둘렀다. 일본은 그런 한국의 입장을 이용해서 합의의 최종 순간까지 최대한 양보를 끌어내려고 했다. 한-일 협정은 한국에서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박정희 정권은 국내 협상의 중요성을 무시했다. 국제적 냉전 상황에도 불구하고, 국내 여론을 협상의 지렛대로 삼았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리고 한-일 협정은 ‘청산되지 않은 역사’를 물려주었다. 당시 경동교회의 강원룡 목사는 한-일 회담을 ‘정상화가 아니라 비정상화를 위한 회담’이라고 비판했다. 현재까지도 반복되는 일본 정치인의 망언과 한국 국민의 분노가 끝없이 계속되는 악순환을 예측한 말이다. 어설프게 역사의 상처를 봉합하면, 역사는 반드시 복수한다. 그래서 협상가는 당장의 이익만큼이나 역사의 책임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김연철 인제대 통일학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