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아프가니스탄에서 활동하던 당의 오사마 빈라덴. 잘랄라바드 인근 동굴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한겨레 자료
1996년 2월, 수단 정부는 미국 및 사우디 관리들에게 접근해 자신들이 어떤 행동을 취하면 국제적 압력이 완화될지 문의하기 시작했다. 사우디 정부 쪽과의 협의 과정에서 수단 정부는 빈라덴을 추방해 송환해주겠다고 제안했다. 사우디 정부는 수단에서 빈라덴이 추방되기를 원했으나, 이미 그의 사우디 시민권을 박탈한 상황에서 사우디 땅에 그의 발을 다시 들여놓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빈라덴을 국내로 데려와 처벌해서 국내의 이슬람주의 세력을 자극하는 부담을 지고 싶지 않았다. 미국은 1996년 1월 중앙정보국(CIA) 대테러센터 내에 빈라덴의 추적을 전담하는 알렉스테이션을 설치했으나, 빈라덴을 국내로 인도할 법적 근거는 마련하지 못한 상태였다. 빈라덴은 당시까지 국가안보적 의제가 아니라, CIA 내의 중요 과제일 뿐이었다. 미국은 빈라덴의 신병을 놓고 수단과 사우디가 협상하는 것을 눈치챘으나, 별다른 조처는 취하지 않았다. 다만 CIA는 ‘수단 정부에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위한 대책’이라는 요구사항을 통해 빈라덴과 그 조직에 대한 정보 제공을 요구하고, 그의 추방에 관해서는 명시적으로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1996년 상반기는 빈라덴을 조기 체포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으나, 미국과 사우디의 소극적인 자세로 그 기회는 날아갔다. 미국은 빈라덴을 체포할 수도 있었다 수단 정부는 빈라덴에게 떠날 것을 통보했다. 당시 중개 역할을 했던 수단 관리는 빈라덴이 “내가 떠나는 것이 당신들에게 좋다면 나는 떠날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만 말하자. 내가 머물든 떠나든, 미국인들은 당신들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회고했다. 빈라덴은 대안을 찾아야 했다. 자신의 성전을 시작한 아프간, 그곳에서도 자신의 명성을 떨친 계기인 자지 전투의 인접 도시 잘랄라바드는 자연스런 후보였다. 잘랄라바드의 무자헤딘 세력에게 빈라덴은 여전히 성스러운 인물로 남아 있었고, 그가 간다면 환영받을 것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결국 수단 정부는 전세기를 마련해 빈라덴 일행을 두 차례에 걸쳐 아프간으로 실어보냈다. 빈라덴이 아프간에 도착했을 때, 교착 상태였던 아프간 내전은 새로운 전기를 맞고 있었다. 탈레반이라는 새로운 세력이 급속히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카불을 선점해 이름뿐인 아프간 정부를 구성한 북부 타지크족 출신의 아마드 샤 마수드 세력과 파키스탄의 지원을 받는 남부 파슈툰족 출신의 이슬람주의 세력 굴부딘 헤크마티아르 세력의 지루한 카불 공방전은 1992년부터 계속되고 있었다. 아프간 전역은 무장 군벌이 횡행하며 법과 질서가 완전히 무너진 아노미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1994년부터 모습을 드러낸 탈레반의 등장은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하려 궐기한 정의의 세력이라는 신화로 채색됐다. 지도자 물라 오마르가 동네의 어린 소녀를 납치해 성폭행한 무장 군벌 지도자를 처형하면서 탈레반 운동은 시작됐고, 오마르는 전투 중에 다친 눈을 현장에서 자신이 칼로 도려내는 영웅적 강인함을 가진 지도자라는 신화는 내전에 염증을 내던 아프간 주민들에게 호소력을 더했다. 신화의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탈레반의 시작과 부상은 아프간 최대 민족인 파슈툰족의 민족주의, 이슬람주의, 그리고 파키스탄의 지원이라는 삼박자가 어우러져 빚어낸 산물이었다. ‘이슬람 학생’ 혹은 ‘지식의 추구자’라는 뜻인 탈레반은 보수적인 이슬람 신앙 벨트인 아프간 남부 칸다하르 지역의 전통 마을에서 일상적인 풍경이었다. 이슬람 학교인 마드라스에서 공부하는 학생인 탈레반은 마을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기도를 이끌고, 장례를 주관하고, 분쟁을 중재하는 등 종교 서비스를 제공하며 마을 주민들의 기부로 먹고사는 일종의 하위 성직자였다. 탈레반에게는 마을 여인들이 얼굴을 가리지 않을 정도로 칸다하르 지역의 전통 마을에서는 삶의 한 부분이었다. 소련의 아프간 침공 뒤 탈레반은 총을 잡고 무자헤딘 투쟁에 뛰어든 한 세력이었다. 아프간 전쟁은 탈레반을 양산하며 그들의 신앙까지 바꾸었다. 전쟁으로 인해 파키스탄 국경지대로 피란 간 청년들과 소년들은 사우디의 자금으로 파키스탄 정보부가 만든 수많은 마드라스에서 근본주의 성향의 이슬람주의 탈레반으로 성장했다. 전쟁이 그들의 신앙을 바꿔놓았다 전시 마드라스 중 가장 대규모이고 영향력이 컸던 곳은 파키스탄 페샤와르 동쪽 그랜드트렁크로드변에 자리잡은 하카니아로, 수만 명의 아프간·파키스탄 탈레반에게 무료로 숙식과 교육을 제공했다. 이 학생들 중 적지 않은 이가 칸다하르 출신의 파슈툰족이었다. 하카니아의 교과는 사우디의 보수적 이슬람인 와하비즘에서 더욱 보수적으로 분화한 인도 데오반디즘과 초국적 이슬람주의의 결합이었다. 데오반드는 인도의 한 마을 이름으로 그곳의 마드라스는 19세기부터 인도 무슬림 사이에서 근본주의 운동의 고향이었다. 무함마드 초기 시절 무슬림들의 생활방식을 그대로 고수해야 한다는 데오반디즘은 이슬람에 대한 모든 현대적 해석뿐만 아니라 그 생활 방식도 배격했다. 칸다하르는 1970년대에 쿠데타로 실각한 아프간의 마지막 왕조인 두라니 왕조의 근거지로, 아프간 전역을 통치했던 파슈툰족의 영화를 상징하는 곳이다. 칸다하르는 동쪽 파키스탄에서 수도 카불뿐만 아니라 중앙아시아 쪽으로 연결되는 교역로의 중심이다. 하지만 소련 침공에 이은 내전으로 칸다하르 지역은 성폭행과 납치, 폭력이 일상화된 연옥으로 변했다. 무엇보다 칸다하르를 거치는 교역로는 수많은 무장 군벌이 통행료를 받으며 연명하는 곳으로 전락했다. 1994년께 파키스탄 퀘타에서 칸다하르를 거쳐 헤라트와 이란으로 가는 길에는 수백 곳의 통행료 징수처가 있었고, 칸다하르와 카불 사이의 길도 마찬가지였다. 교역에 의존하는 파슈툰족 주요 부족의 상인들로서는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탈레반은 이 지역의 기업인들이 모금한 25만달러 상당의 신변보호 자금을 바탕으로 1994년 봄 소규모 민병대로 등장했다. 풍부한 전투 경험과 신앙에 바탕한 헌신, 그리고 같은 학교에서 뒹굴었던 동지애를 지닌 이들은 칸다하르 지역의 소규모 군벌들에 대한 과감한 공격과 척결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이때 가장 영향력이 큰 부족인 두라니 부족 등 칸다하르 지역의 파슈툰족 주요 부족의 지도자들과 탈레반의 결합이 이뤄진다. 파슈툰계 아마자이 부족의 지도자이자 파키스탄과 중앙아시아를 연결하는 운송업자인 하시마트 가니 아마자이는 당시 탈레반의 제안을 이렇게 회고한다. “보라, 모든 군벌 사령관들은 이 나라를 약탈하고 있다. 그들은 조국을 갈기갈기 찢어서 팔아먹고 있다. 통행료 징수처를 만들고 여자들을 성폭행하고 있다”며 망명 중인 왕을 다시 복위시켜, 아프간의 지도력을 만드는 전통적 부족 대집회인 로야지르가도 복원하겠다고 제안했다. 파슈툰족 왕조를 다시 복원해 아프간의 평화를 회복하자는 제안은 파슈툰족 지도자들로서는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었다. 파슈툰족의 최대 부족 두라니 부족에서도 가장 영향력이 있는 카르자이 가문의 수장 압둘 아드카르자이는 탈레반 지지의 중심 인물이 됐다. 두라니 왕조의 창시자 아흐마드 샤 두라니가 속한 직계 가문 수장의 지지는 탈레반 운동에 불을 붙이는 계기가 됐다. 압둘 아드카르자이의 아들이 하미드 카르자이다. 그는 2001년 미군의 침공 뒤 탈레반 정권을 붕괴시키고 탄생한 아프간 정부의 수반이 되어, 탈레반 세력과 불구대천의 원수로 변한다. 초읽기에 들어간 탈레반의 집권 칸다하르 지역에서 법과 질서를 회복하는 세력으로 등장한 탈레반은 곧 파키스탄의 지원이 결합되면서 가장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한다. 당시 파키스탄의 베나지르 부토 정권은 중앙아시아로 이어지는 교역로의 부활을 파키스탄 부흥을 위한 국가적 의제로 설정했고, 파키스탄 정보부는 부토의 이 계획을 도와줄 세력으로 탈레반을 끌어들인다. 빈라덴이 아프간에 온 1996년 봄은 탈레반이 이미 파키스탄의 지원을 받고 카불 함락을 목전에 둔 상황이었다. 아프간에 새로운 세대의 이슬람주의 세력이 탄생하는 전야였다. 빈라덴은 이를 직감적으로 파악했고, 이는 빈라덴과 탈레반의 동맹으로 이어진다. 정의길 <한겨레> 국제부 선임기자 Egi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