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9·11 테러 직후 미군의 추격을 받던 알카에다 지도자 오사마 빈라덴이 아프가니스탄 산악지대의 은신처에서 서방 기자와 만나고 있다. 왼쪽 작은 사진은 1980년대 후반 미국의 후견을 업고 아프가니스탄 주둔 소련군과 게릴라전을 펼칠 당시의 청년 빈라덴.한겨레 자료
소련 공격헬기 무력화한 미제 스팅어미사일 특단의 대책이 필요했고, 미국은 이를 결국 찾아냈다. 1986년 9월26일 아프간 동부 국경도시 잘랄라바드의 공항 인근에 매복해 있던 파키스탄 공작원 가파르의 어깨 위에는 한 신형 무기가 얹혀 있었다. 잘랄라바드 공항에서 이착륙하는 소련군 헬기 Mi-24D를 기다리는 스팅어미사일이라는 이 신형 무기는 배터리 전원에다 열추적 장치를 내장한 대공무기였다. 곧 8대의 Mi-24D가 굉음을 울리며 공항에 착륙하려고 모습을 드러냈다. 가파르가 버튼을 누르자, 첫 발이 발사됐다. 첫 발은 오조준으로 빗나갔으나, 두 번째 미사일은 Mi-24D가 공중에서 산산이 폭발하는 장관을 선사했다. 모두 3대의 헬기가 격추됐다. 이 장면은 미국의 스파이위성 KH-11이 포착한 선명한 사진으로 CIA의 본부 랭글리로 전달됐다. 곧 동부 아프간의 무자헤딘들에게 수십 대의 스팅어미사일이 전달됐고 소련군 헬기와 수송기가 그 먹이가 됐다. 전쟁의 추는 다시 기울기 시작했다. 소련군 조종사들은 스팅어미사일의 사정고도인 1만2500피트 이상으로 비행해야 했고, 이는 소련군의 저공공습 능력을 무력화했다. 휴대용 대공미사일인 스팅어미사일은 양날의 칼이었다. 테러 세력에게 유출된다면 가공할 테러 무기로 변신하기 때문이다. 나중에 CIA는 1대당 수만달러를 주고 무자헤딘들에게 재구매하는 형식으로 회수에 나섰는데, 미처 회수되지 않은 미사일은 이슬람권 분쟁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하늘에서 스팅어미사일이 소련군을 무력화할 때, 지상에서는 새로운 무자헤딘들이 소련군을 더욱 공포감에 젖게 했다. 주로 아랍에서 온 무자헤딘들이 나날이 수를 더해갔다. 아프간 현지 무자헤딘들은 자살테러를 금기시하는데다 자신들의 삶의 터전인 도로와 교량, 마을에 대한 포격과 공격을 꺼렸다. 아랍의 무자헤딘들, 정확하게는 지하디스트들은 달랐다. 이들은 자살테러를 천국으로 가는 티켓으로 생각했고 공격 대상을 가리지 않았다. 아프간 무자헤딘들과의 충돌도 마다하지 않았다. 또한 이미 파키스탄 정보부가 국경지대에 세운 무자헤딘 게릴라 양성 캠프에서는 지하디스트 성향의 무자헤딘 1만6천~1만8천 명을 양성했다. 1986년부터는 6천~8천 명이 양성됐다. 2~3주 코스로 게릴라전 기술을 습득했고 우수 인력은 특별캠프로 입소해 폭탄 제조, 차량 폭탄, 대공무기, 지뢰, 저격 기술을 더 습득했다. 모두 테러 기술이다. 이 과정을 이수한 다수의 아프간 무자헤딘들은 나중에 탈레반의 중추 세력이 됐고, 알제리·팔레스타인·튀니지·사우디아라비아·이집트의 지하디스트들은 본국으로 돌아가 이슬람주의 무장세력의 선도분자가 됐다. 1987년 자지 전투, 영웅 빈라덴의 등장 아랍의 젊은이들이 아프간에서 더 많이 모습을 드러낼수록 아프간에 쏟아져 들어오는 돈도 늘어났다. 미국 의회는 1987년 아프간 비밀공작 예산을 무려 6억3천만달러로 증액했다. 아프간 전장이 아니라 워싱턴의 의회와 행정부 사무실을 오가는 명품족인 ‘구치’ 무자헤딘도 늘어났다. 아랍의 지하디스트들은 미국 돈에 연연하지 않았다. 사우디의 정보기관 총정보국(GID)의 돈뿐만 아니라 사우디의 자선단체 모금이 이들에게 세례처럼 뿌려졌다. 1986년 여름 오사마 빈라덴이라는 청년이 사우디에서 파키스탄의 아프간 접경도시 페샤와르로 거처를 옮겼다. 이슬람구호단체라는 단체도 결성됐다. 사우디 왕가와 연계된 건설회사를 운영하는 부호의 아들인 빈라덴은 그동안 불도저 등 건설장비를 아프간 접경지대로 수입하는 한편 아프간 전쟁 모금액을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그는 이제 아프간 전쟁 공작의 중심 도시인 페샤와르에서 파키스탄 정보부의 통제를 받지 않고 아랍 출신의 무자헤딘 자원자들을 모집하고 지원하는 일에 전념하게 된다. 당시 그는 전사가 아니었고 온화한 학자인 셰이크로 인정받았다. 그리고 1년이 지나지 않은 1987년 4월17일 빈라덴과 50명의 아랍 무자헤딘들은 아프간 동부 접경지대인 코스트 인근 자지에 건설한 요새에서 소련군의 헬기와 스페츠나즈의 공격을 받고 있었다. 빈라덴 쪽은 자신들의 병력보다 4배가 큰 소련군을 상대하며 일주일을 버텼다. 약 15명의 동료를 잃었고, 빈라덴도 발을 다쳤다. 특히 빈라덴은 당뇨로 인슐린을 맞으며 전투에 임했다. 결국 그들은 후퇴했으나, 이 자지 전투는 이슬람권 지하디스트 사이에서 빈라덴이라는 인물의 탄생을 알린 사건이었다. 이 전투를 지근거리에서 지켜본 몇몇 아랍 언론인들은 이를 이슬람 세계에 알렸다. 이는 빈라덴에게 아랍 자원들이 수행한 영웅적인 전투를 선전하는 미디어 캠페인에 눈뜨게 하는 계기가 됐다. 페샤와르로 돌아온 빈라덴은 인터뷰와 강연을 펼치면서 자신과 아랍 지하디스트들의 영웅적인 자지 전투를 선전하며 더 많은 지하디스트들의 아프간전쟁 참가를 고무했다. 빈라덴이 아프간에서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등 이슬람의 반소 지하드가 에너지를 폭발적으로 분출할 때 사실 지하디스트들의 반소 투쟁은 수명을 다해가고 있었으나 누구도 그걸 알지 못했다. 1986년 11월13일 소련 공산당 정치국의 핵심 지도부는 미하일 고르바초프 서기장의 주재로 비밀회동을 했다. 개혁 성향의 고르바초프는 집권한 지 20개월째였고, 그의 글라스노스트(개방)와 페레스트로이카(개혁)라는 야심적인 정책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던 때다. 세르게이 아흐로메예프 총참모총장이 아프간∼파키스탄 국경의 봉쇄가 여의치 않다고 보고하자, 고르바초프는 “우리가 거기서 무얼 하고 있느냐고 사람들이 묻고 있다”며 “우리는 거기에서 무한정 있을 것인가, 아니면 그 전쟁을 끝내야만 하는가?”라고 물었다. 그는 대답했다. “전략적 목표는 이 전쟁을 1년 내에, 최대 2년 내에 끝내고 군을 철수하는 것이다”라고 결론 냈다. 이날 회의는 냉전 사상 가장 중요한 소련 정치국의 회의였다. 그러나 미국은 이런 소련의 내부 동향에 깜깜했고, 어쩌면 그런 결정을 바라지도 않았다. 미국은 자신들이 원하던 아프간에서 소련의 패배가 막상 현실화하자, 이를 오히려 받아들이고 싶어 하지 않았다. 이슬람 근본주의에 대한 소련의 경고 1987년 9월 워싱턴을 방문한 예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 소련 외무장관은 회의 도중 조지 슐츠 국무장관을 따로 불러내 불쑥 말을 꺼냈다. “우리는 아프간을 떠날 것이다. 5개월이나 1년 정도 걸릴 수 있으나, 확실한 것은 철군이 먼 미래의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슐츠는 당황해서 거의 반공황 상태에 빠졌다. 소련이 철군하겠다는 진정성이 의심된 게 아니라 이 사실을 레이건 정부 내의 강경파들이 어떻게 받아들이겠느냐는 우려였다. 자신이 모스크바에 대한 유화 정책을 펼친다고 비난받을 것이 뻔했다. 그는 이 사실을 몇 주 동안이나 밝히지 않았다. 셰바르드나제는 슐츠에게 또 이슬람 근본주의의 확산을 억제하는 데 미국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요청했다. 슐츠는 이 문제에 동의했으나, 레이건 행정부의 고위 관리 중 어느 누구도 이것을 생각해본 사람은 없었다. 슐츠가 소련의 철군 의사를 몇 주 동안 혼자 껴안고 있어야 하는 상황에서 이슬람주의 확산 문제가 워싱턴 지도부의 안중에 있을 리 없었다. 소련이 사라지는 자리에 어떤 새로운 세력이 들어설지 미국은 알려 하지도 않았고, 알고 싶어 하지도 않았다. 정의길 <한겨레> 국제부 선임기자 Egi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