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표지이야기

무샤라프, 최후의 도박

378
등록 : 2001-09-26 00:00 수정 :

크게 작게

정치와 이슬람 중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미국의 테러보복 천명 뒤 가장 숨가쁜 파키스탄

사진/ "대테러전쟁에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하여 미국의 환심을 산 파키스탄 무샤라프 대통령. 그러나 취약한 정치적 기반 속에서 이슬람교 단체들로부터 몰매를 맞고 있다.(SYGMA)
뉴욕과 워싱턴을 목표물로 삼았던 이른바 ‘11일의 테러’ 뒤, 가장 급격한 정치적 변화를 맞고 있는 나라는 파키스탄이고 가장 미묘한 입장에 빠진 나라도 파키스탄이다. 예상컨대 가장 이익을 볼 나라도 또 손해를 볼 나라도 역시 파키스탄이다.

지난 9월11의 사건 즉시 아프가니스탄이 ‘악마의 소굴’로 결정되면서부터 파키스탄은 숨가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우선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비교적 조용한 도시였던 수도 이슬라마바드가 최근 “기자들로 뒤덮였다”고 할 만큼 국제언론의 중심지가 되어 북새통을 이룬다는 사실이다. 아프가니스탄의 유일한 출입구 노릇을 해온 이슬라마바드는 예전에도 아프가니스탄 뉴스가 뜰 때마다 외신기자들로 붐비는 도시긴 했지만, 이번처럼 1천여명으로 추산되는 대규모 군단이 몰아닥친 적은 없었다.

무샤라프와 시민들의 거리


이러다보니, 이슬라마바드 정가도 급격히 달아올랐다. 각 정당의 말꾼들뿐만 아니라 외무부, 국방부, 재무부, 공보부 가릴 것 없이 웬만한 자리 책임자들은 외신들의 인터뷰 요청으로 곤혹을 치르고 있다. 미국대사관을 비롯하여 관련 각국 대사관들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시민사회도 동시에 분주해졌다. 학계의 명망가들이나 전문가들이 시도 때도 없이 들이닥치는 기자들 탓에 피곤증을 보이기 시작했다면, 사업가들은 호재를 만나 즐거운 비명들이다. 특히 무선전화기는 한동안 새 번호가 바닥나기도 했을 정도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가장 바쁘고 가장 긴장된 인물은 역시 대통령 페르베즈 무샤라프 장군일 듯하다. 11일의 테러 뒤, 미국 정부가 대테러전쟁을 선언하며 주적을 오사마 빈 라덴과 그를 숨기고 있는 아프가니스탄으로 지목하자 무샤라프 장군은 “미국의 대테러전쟁에 가능한 한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밝혀 일단 미국의 환심을 사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취약한 정치적 기반에다 특히 이슬람교 단체들로부터 몰매를 맞으며 국내적으로는 상당한 시련을 겪는 형편이다.

이런 가운데 지난 9월19일 수요일 밤, 무샤라프 장군은 텔레비전과 라디오를 통해 특별담화를 발표하며 반정부 분위기를 잠재우려고 애썼다. “지금은 1971년 전쟁 뒤 국가적으로 가장 중대한 상황을 맞고 있다. 군 최고사령관으로서 국가방위와 안정을 가장 우선할 것이며, 국민들과 군인들 그리고 사회 모든 분야가 국방과 안전을 위해 목숨을 바칠 결의를 했다.”

그러나 무샤라프 장군의 비장한 연설도 별로 효력이 없었다. 바로 그 다음날부터 이슬람교 단체들이 주도하는 시위가 전국 주요 도시를 휩쓸기 시작했고, 21일에는 라호르와 페샤와르 그리고 카라치에서 대규모 반정부.반미시위가 벌어졌다. 특히 카라치의 시위에서는 4명의 사망자가 발생해 현재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시위 참여자들은 미국을 향한 지하드(성전)를 외치며 곳곳에서 성조기와 부시 인형을 불살랐다. 오사마 빈 라덴은 영웅의 이름으로 외쳐졌다.

“아프가니스탄과 싸우기 전에 먼저 미국과 싸우자”는 슬로건이 등장했고 “이슬람교의 배신자”라는 슬로건은 무샤라프 장군을 직접 표적으로 삼았다. 파키스탄 최대 이슬람교 단체인 자미아티-아이-이슬라미의 정신적인 지도자 카지 후세인은 미국과 결탁한 무샤라프 장군의 행위를 “적에 모든 것을 내준 용서할 수 없는 일”로 규정했다. 일부 종교지도자들을 감정적인 사람들로 몰아붙인 무샤라프 장군의 9월19일 연설은 이슬람교 단체들이 주도한 시위에서 난타를 당했다. “파키스탄이 우선이고, 나머지는 모두 두 번째 일들일 뿐”이라며 무샤라프는 애국적 민족주의를 강조했지만, 시위 군중은 이슬람교 형제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을 외치며 종교적 민족주의를 강조해, 현재 무샤라프 정부와 시민들 사이의 극심한 간격을 노출했다.

“일부 극단적인 이슬람교주의자들의 논리라고 정부가 매도하고 있는데, 표현의 차이만 있을 뿐, 반미·반정부 정서는 전체 시민들의 것이라고 봐도 좋다.” 라호르에서 서점을 경영하는 지아파트의 말은 실제로 파키스탄 시민들의 인식을 대변하기에 모자람이 없다. “왜 미국이 이슬람교국인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하겠다는 데 같은 이슬람교국인 파키스탄이 지원해야 하나?”

이번주부터 ‘미국에 다짐받기’ 돌입

사진/ 라호르에서의 반미시위. "파키스탄은 미국과 먼저 싸우라"는게 일반 시민들의 정서다.(정문태)
시민들의 반감을 사고 있는 무샤라프 정부의 처지는 말 그대로 ‘오도 가도 못하게 된’ 꼴이다. 국내적으로는 지난해 쿠데타로 집권한 무샤라프의 정치적 기반이 매우 취약한 형편인데다, 이슬람 근본주의의 확장으로 정치의 위기감마저 고조되고 있는 실정이며 여기에 사회·경제는 1998년 핵실험으로 경제제재를 당해 아사 직전 상태에 빠져 있다. 국제적으로도 탈레반을 지원한 ‘검은’ 세력으로 낙인찍혀 거동이 자유롭지 못한 형편인데, 탈레반을 얻은 대신 중앙아시아의 주변 모든 국가들을 잃는 고독한 상황 속에서 카슈미르를 놓고 인도와 충돌하는 전통적인 악재를 안고 왔다. 뿐만 아니라, 냉전기간 동안 미국의 최대 이슬람교 우방국으로서 누렸던 각종 혜택들은 사라지고, 현재 파키스탄에 남은 것은 시장 규모가 큰 인도쪽으로 눈길을 돌려버린 싸늘한 미국의 그림자와 러시아를 비롯한 중앙아시아의 해묵은 악감정뿐인 실정이다.

결국 무샤라프 정권은 ‘11일의 테러’로 비롯된 미국의 대아프가니스탄 공격 지원건을 놓고 국내외적으로 산적한 이 모든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포착한 것으로 판단한 모양이다. “미국에 필요한 공격 전진기지를 제공하고 정보와 병참지원을 할 것이다.” 반대자들에게는 “감정적으로 볼 것이 아니라 논리와 지혜로 상황을 보자”는 말을 덧붙이며…. 무샤라프는 전쟁에 필요한 가장 핵심적인 것들이 무엇인지를, 또 전쟁에서 돈이 되는 분야가 어떤 것인지를 누구보다 잘 아는 군인으로서 미국의 요구에 앞서 이미 지원분야를 공개적으로 밝히기까지 했다. 말하자면 정치와 이슬람교를 놓고 그는 최후의 도박을 벌이고 있는 셈이다.

현재까지 표면적으로 보면 무샤라프의 도박은 비교적 정확한 수순을 밟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상황에 따라 ‘립서비스’에 그칠 공산도 있지만, 미국 정부는 파키스탄의 부채상환 연기와 경제제재 해소를 공개적으로 거론하기 시작했고, 국제통화기금과 아시아개발은행도 금융지원을 들먹이고 나섰다. 발빠른 일본 정부는 미국에 대한 전비부담 형식으로 파키스탄을 직접 지원하는 방안을 띄워올리며 꿩먹고 알먹기에 관심을 보였다. 이번주부터 본격적으로 미국과 동맹국들 사이에서 무샤라프 정권은 ‘다짐받기’에 돌입할 듯한데, 받는 만큼 주는 것이 국제적인 관례이고 보면, 결국 국내적인 반발을 어떻게 무마해 나갈 것인가를 놓고 다시 한번 엄청난 진통을 겪을 것으로 보인다.

장사꾼? 정치가? 배신자?

사진/ 98년 탈레반을 위해 싸우다가 북부동맹군에 잡힌 파키스탄인 포로들. 이들 포로들의 처치처럼 파키스탄은 현재 가장 미묘한 입장에 처해 있다.(정문태)
그러나 비정한 국제사회에서 장기적으로 볼 때, 무샤라프의 단기 도박이 진정한 이익을 가져다줄 것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회의적이다. “이익없는 원조없다”는 논리에 정통한 프로페셔널 자본국들을 상대로 외채상환 연기와 단기수혈을 받는 대신 국제 이슬람교사회를 잃어야 하는 냉엄한 현실을 두고 하는 말이다.

무샤라프는 오늘밤에도 사우디아라비아나 아랍에미리트의 부귀를 꿈꿀는지 모르지만, 그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장기적인 전망을 가능케 할 천연자원도 생산시설도 없는 허전한 파키스탄이 기다리고 있을 지도 모른다. 이슬람교를 팔아먹은 장사꾼이 될 것인지, 파키스탄을 구조한 정치가가 될 것인지, 이도 저도 아닌 배신자가 되고 말 것인지, 어쨌든 무샤라프의 운명은 이제 다가올 미국의 대아프가니스탄 공격과 함께 하나씩 드러나게 될 것이고, 파키스탄 시민들은 난데없는 뉴욕과 워싱턴의 불길이 자신들의 장래를 재단하는 희한한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땅은 무더위에 지쳐 있고 하늘은 혼탁하기만 하다. 2001년 9월 파키스탄의 풍경은 흐릿한 만화경 속의 그림처럼 흘러가고 있다. 아무것도 식별되는 것 없고 잡을 수도 없는 것이, 그저 주체할 수 없는 거대한 세력의 흐름에 따라….

이슬라마바드·라호르=정문태/ 국제분쟁 전문기자

asianetwork@news.hani.co.kr


좋은 언론을 향한 동행,
한겨레를 후원해 주세요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보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