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길연 북한 외무성 부상이 지난해 10월2일 유엔 총회장에서 미국의 핵 정책을 비판하는 연설을 하고 있다(왼쪽). 척 헤이글 장관은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핵무기 폐기를 지지하는 현역 국방장관이란 평가를 받는다.한겨레 자료
오바마의 오랜 꿈이었던 ‘핵 없는 세계’
오바마 대통령은 연설에서 미국의 책무를 강조했다. 가장 많은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고, 유일하게 핵무기를 사용한 경험이 있는 미국이, ‘핵무기 없는 세계’를 만드는 데 ‘도덕적 책무’가 있다는 것이다. 이에 바탕해 그는 미국의 정책 방향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과거와 달리 미국이 모범을 보일 테니 다른 나라들도 협조하라는 것이었다.
오바마 행정부는 우선 러시아와의 핵군축 협상 재개를 선언했다. 이는 2010년 4월 장거리 핵탄두를 2018년까지 1550기로 줄이는 합의로 이어져, 1950년 이래 실전 배치된 핵무기를 가장 낮은 수준으로 끌어내렸다. 또한 △포괄핵실험금지조약(CTBT)의 ‘즉각적이고 적극적인’ 비준 △핵태세검토보고서(NPR) 수정 △2010년 핵무기 관련 정상회의 개최 △4년 이내 핵물질에 대한 국제적 통제 방안 마련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사찰 역량 강화 및 핵확산금지조약(NPT) 개정 추진 △핵물질 생산 금지 조약 추진 등 야심찬 과제들이 제시됐다. CTBT 비준과 2002년 선제 핵공격을 명시한 NPR 수정은 전임 부시 정부의 핵 전략을 뒤집은 것이었다.
프라하 연설을 이행하기 위해 그해 9월24일 오바마 대통령은 사상 처음으로 ‘유엔 안보리 의장국’으로서 영구 핵 보유 5개국 정상회담을 열었다. 이를 바탕으로 유엔 안보리에서 채택한 결의 제1887호는, 핵 보유국의 군축과 NPT 강화를 동시에 추진하면서 핵 확산 방지를 강화하기 위한 구체적 조처를 담았다. 지역 차원의 비핵지대 확대 및 창설에 대한 지지와 비핵국가에 대한 핵 불사용 보장(이른바 ‘소극적 안전 보장’) 등 비핵국가들의 요구 또한 수용했다. 오바마는 반핵 평화운동의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는 ‘핵 없는 세계’란 비전을 내세움으로써 핵 확산을 차단하려는 미국의 정책이 ‘도덕적 명분’을 확보할 수 있다는 전략적 판단을 한 것이다.
북한과 이란은 오바마의 핵 없는 세계의 ‘최대 문제아’가 됐다. 북한은 이에 반발했다. 안보리 결의 1887호는 핵 보유국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이중 기준적인 문건이며, 핵 열강들의 지배주의적 야망을 대변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박길연 외무성 부상은 유엔 총회 연설에서 “미국이 핵정책을 변경시키려 하지 않고 있는 현 단계에서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안정을 유지하려면 우리의 믿음직한 핵 보유로 지역의 핵 균형을 보장하는 길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북은 지난 2월까지 2번의 핵실험과 현대적인 우라늄 농축시설 확보, 헌법 개정을 통한 핵 보유국 명시, 서울에 이은 워싱턴 불바다론 등 핵무기 사용 위협으로 나왔다. 그에 맞서 오바마 행정부는 동맹에 대한 안보 공약을 내세워 2009년 6월 한-미 정상회담에서 ‘확장된 억지’를 명시한 이래 B2, B52, 전략잠수함 등을 동원한 핵공격 연습과 핵우산 강화로 맞섰다. 냉전시대의 핵무기 경쟁을 재현시킨 것이다. 그렇게 오바마의 ‘핵 없는 세계’는, 적어도 한반도에서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작동했다. 그건 문정인 교수가 지적했듯이, 오바마 1기 내내 북-미 관계가 미국의 제재와 이에 맞선 핵실험 등 북한의 위협이 반복되는 ‘죄와 벌’의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북한의 화답 “핵 보유는 비핵화 위한 전략일 뿐”
지난 6월19일 오바마 대통령은 독일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문에서 연설했다. 그는 이날 연설에서 ‘핵 없는 세상’을 ‘정의가 수반되는 평화’로 규정했다. 4년 전 프라하 연설에서 밝힌 ‘핵 없는 세계 2.0’이었다. 그리고 러시아에 전략 핵무기를 추가로 최대 3분의 1 더 줄이자고 제안했다. 이는 2030년까지 세계 핵무기의 완전 폐기를 목표로 하는 다국적 반핵단체 ‘글로벌 제로’(Global Zero) 쪽이 2012년 5월 내놓은 보고서에서 제시한 ‘미-러의 핵무기를 900기로 줄이자’는 제안에 근접한 것이다.
오바마 2기의 척 헤이글 국방장관은 이 보고서 작성에 깊이 관여했다. 지난 1월 오바마가 헤이글을 국방장관으로 지명하자, 그가 상원의 인준을 받으면 미 역사상 처음으로 핵무기 폐기를 지지한 국방장관이 된다는 평가가 나온 건 이 때문이었다. 실제로 헤이글은 인준 청문회 과정에서 2009년 아랍 위성방송 <알자지라>와 한 인터뷰에서 내놓은 발언이 공개돼 곤혹을 치르기도 했다. 공화당 상원의원이던 그는 당시 북한과 이란의 핵개발 문제에 대한 질문에 “미국과 동맹국들은 핵무기를 보유할 수 있다고 하면서 다른 국가들은 가질 수 없다고 가르칠 수 있겠는가. 진실성도 없고 논리적으로도 맞지 않는다. 결국 지금까지 우리는 논쟁에서 지고 있다”고 답했다.
4년 전 프라하 연설 때 장거리 로켓을 쏘아올렸던 북한은 베를린 연설을 앞둔 6월16일 국방위원회 중대 담화를 내놓았다. 북-미 고위급 회담을 열어 ‘미국이 내놓은 핵 없는 세계 건설 문제’를 논의하자는 것이다. 담화를 보면, 조선반도의 비핵화는 ‘군대와 인민의 의지’이며, ‘김일성·김정일의 유훈’이자, ‘당과 국가, 천만 군·민이 반드시 실현해야 할 정책적 과제’가 됐다. 반면 핵 보유는 ‘조선반도의 비핵화를 실현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일 뿐이었다. 프라하 연설에 대해 핵 보유로 맞섰다면, 베를린 연설에서는 조선반도의 비핵화로 화답한 것이다.
북한이 오바마 2기의 ‘핵 없는 세계’를 향한 정책을 적극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적어도 다음 두 가지는 북한의 이런 판단에 긍정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하나는 지난 4월 초 미 국방부가 발표한 신형 대륙간탄도미사일 미니트맨3 시험발사 연기다. 미니트맨 시험발사는 정례적인 핵전력 현대화를 위해 이미 예정됐던 것이다. 그럼에도 미 국방부는 ‘기술적 문제’가 아니라, “한반도 긴장과 북한의 오판 우려 때문에 연기했다”고 밝혔다. 미국이 전략 핵미사일 발사를 북한과 연계시킨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정부의 한 고위 당국자는 “미니트맨 발사 연기는 미국이 북한에 준 가장 확실한 메시지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 뒤 북한 역시 4월11일 존 케리 미 국무장관의 한·중·일 순방 시점에 무수단을 발사 대기 상태에서 해제했다. 대화 국면으로 전환하는 첫 조짐이었다.
북핵 해법, 6자회담 틀 넘어설까
다른 하나는 오바마 대통령이 3월19일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국방정책·대량파과무기·군축 담당 조정관에 엘리자베스 셔우드랜들 국무부 특별보좌관 겸 유럽국장을 임명한 것이다. 그는 북한 핵 문제를 담당한 게리 세이모어 조정관의 후임이었다. 동시에 그에게는 국방정책을 조정하는 임무가 추가됐다. 톰 도닐런 NSC 보좌관은 “그가 프라하 연설에서 밝힌 목표(핵 없는 세계)를 추진할 것”이라고 말했다.
셔우드랜들은 클린턴 행정부 시절 우크라이나·카자흐스탄 등지의 비핵화 과정에서 핵심적 역할을 한 페리 전 국방장관의 최측근으로, 애슈턴 카터 현 국방부 부장관과도 가까운 사이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경력을 바탕으로 그에게는 핵군축의 국방정책화와 북한 핵 문제, 오바마의 ‘핵 없는 세계’ 정책을 총괄하는 임무가 부과되는 셈이다. 그런 점에서 6자회담을 통한 북한의 비핵화와는 다른, 세계적 차원에서의 비핵화 가운데 일부인 ‘조선반도의 비핵화’를 위한 미국의 새로운 접근이 점쳐진다.
강태호 기자 한겨레 정치부 kankan1@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