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통합의 아버지’로 불리는 장 모네(앞줄 오른쪽 두 번째)가 1951년 4월18일 ECSC 창설을 위한 ‘파리조약’ 서명 직후, 각국 대표단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한겨레 자료
협상 시작 닷새 만에 터진 한국전쟁 쉬망플랜은 1950년 5월19일 발표됐다. 미 국·프랑스·독일이 영국 런던에서 3개국 외 교장관 회의를 하기 하루 전날이다. 왜 이날 을 선택했을까? 미국의 서독에 대한 전략적 평가가 달라지면서, 유럽 통합을 둘러싸고 프랑스와 미국의 견해 차이가 벌어지고 있었 다. 런던 회의에서 미국은 루르 지역의 철강 산업에 부여된 모든 제한 조치를 해제할 생 각이었다. 왜? 미국도 전후의 초기 국면에서 는 유럽 통합을 선호했다. 서독의 재건이 필 요하지만, 그 과정이 이웃 국가들을 불안하 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냉전 을 향한 발자국 소리가 커지면서, 서독의 재 무장을 서두르기 시작했다. 1948년 서베를린 지역 출입을 일방적으로 차단하면서 이른바 ‘베를린 위기’를 부른 소련 이 1949년 핵무장을 하면서 유럽의 냉전이 구 체화했다. 1949년 ‘붉은 중국’의 등장과 더불 어 한반도가 냉전과 열전 사이를 헤매고 있 었다. 1950년 4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는 유럽의 재래식 군사력 증강을 위해 서독의 군사적 기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그해 5월2일에는 미 합참이 처음으로 서유럽 방위에 서독의 참여를 요구했다. 이미 동독 에는 8만명 이상의 ‘인민경찰’이 존재했기 때 문에, 서독의 재무장 명분도 마련됐다. 미국은 서독의 재무장과 더불어 경제재건 도 적극적으로 검토했다. 원래 전후 초기 국 면에 미국은 루르 지역을 다른 유럽 국가들 의 석탄·철강 산업과 함께 공동의 기구로 통합하라고 프랑스에 요구했다. 모네의 구상 과 다를 바 없었다. 프랑스는 2년 가까이 응 하지 않았다. 그러다 냉전 구도가 조성되면 서 미국은 서독의 경제재건을 위해 루르 지 역의 생산 제한을 풀려고 했다. 미국의 구상대로 하면 어떻게 될까? 서독 은 프랑스보다 저렴한 양질의 철을 생산할 것이고, 프랑스의 현대화 계획은 위기를 맞 게 될 것이다. 서독과 경쟁하기 위해 프랑스 는 관세를 인상할 수밖에 없고, 그렇게 되면 경쟁력이 약화된다. 반면 서독은 시장 확보 를 위해 동유럽과 정치적 협력을 확대할 것 이다. 유럽 통합은 멀어지고, 프랑스의 경제 회복도 늦어질 것이며, 유럽에서 미-소 냉전 이 심화된다. 모네와 쉬망은 이런 상황에서 문제의 틀을 전환하고자 했다. 서독을 유럽 통합에 참여시키는 것이다. 1950년 6월20일 쉬망플랜 실현을 위한 협 상이 시작됐다. 며칠 뒤 아주 멀리 떨어져 있 지만, 전세계를 걱정으로 몰아넣은 전쟁이 터졌다. 1950년 6월25일 북한군이 남침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모네는 시골 별장에 있었다. 그는 한 달 전 쉬망플랜이 발표될 때, 젊은이들이 길거리에서 하는 얘기를 들었다. 이제는 전쟁터에 끌려갈 필요가 없다고. 그런 상황에서 한국전쟁이 터진 것이다. 당장 미국이 개입할 것이고, 미국은 유럽에서 서독의 역할을 재평가할 것이고, 그러면 쉬망플랜과 유럽 통합에 상당한 난관이 조성될 것이라는 걱정이 앞섰다. “각자의 국익이 아닌 모두의 이익을 위하여”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미 국방부는 서독 재무장을 밀어붙이려 했다. 프랑스군은 인도차이나에서 어려운 전쟁을 치르고 있었고, 영국군은 전세계에 흩어져 있었다. 미국이 유럽의 안보를 위해 독일의 재무장을 요구하는 건 당연한 것이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아데나워 총리의 의식과 철학이었다. 아데나워 총리는 독일의 재무장을 촉구하는 나라 안팎의 지적에 “우리나라는 충분히 피를 흘렸습니다. 우리는 재무장을 원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아데나워 총리의 태도는 프랑스와 유럽에 대단한 행운이었다. 이제 ECSC 추진을 서둘러야 한다. 그러나 협상은 쉽지 않았다. 영국은 처음부터 참여하지 않았다. 프랑스 내부에선 영국이 빠진 유럽 통합을 반대하는 의견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영국의 참여를 기다릴 상황이 아니었다. 프랑스 공산당은 ECSC가 반공적이고 반소련적이라는 입장에서 반대했고, 드골파도 국가주의 입장에서 초국가적 협력을 반대했다. 서독 내부적으로도 반대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았다. 루르 지역에는 전 독일 제국 군사력의 바탕이 된 ‘콘체른’이나 ‘트러스트’ 등 관련 업계의 독과점 체제가 자연스럽게 구축돼 있었다. 주권이 공동의 관리기구에 위임되면, 기업집단의 독점적 지위가 깨지는 것이라 반발이 특히 심했다. ECSC 출범을 위한 협상은 프랑스와 독일, 이탈리아,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의 6자회담으로 이뤄졌다. 1950년 6월20일 회의가 시작됐다. 대표단은 각국에서 10명씩 모두 60명이었다. 모네는 분열을 극복하고,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며, 서로 협력하게 하는 데 타고난 재주를 지녔다. 모네는 회의를 시작하면서 부탁했다. “우리는 자기 나라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이익을 위해 이 자리에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나 당시까지 초국가 협력의 경험은 거의 없었다. 벨기에·네덜란드·룩셈부르크 등 이른바 베네룩스 3국은 소수파로서 ‘견제’를 강조했다. 함께 토론하면서 공동 의식이 조성됐지만, 본국에 돌아가 지침을 받아오면 다시 국가별 이익을 앞세우기 시작했다. 10개월여의 실무적 노력으로 마침내 1951년 4월18일 프랑스 파리에서 ECSC 조약이 체결됐다. 아데나워 총리의 첫 번째 공식 해외출장 기회이자, 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 정부 대표단의 첫 번째 파리 방문이기도 했다. 조약 체결식은 초국가적인 방식으로 이뤄졌다. 네덜란드산 고급 피지에 독일 잉크로 프랑스 출판국에서 인쇄한 조약 사본을, 룩셈부르크 풀로 붙인 벨기에 양피지로 감아 이탈리아 실크리본으로 묶었다. 6개국은 석탄과 철강 생산에 협력하기로 합의했다. 사법재판소, 고위 행정관청, 각료이사회, 공동회의 등의 독립 기구도 구성했다. 장 모네가 초대 의장을 맡았다. 조약은 각국의 비준을 거쳐 1952년 7월23일 발효됐다. 유럽 통합의 길이 열린 것이다. 냉전의 반격에도 흔들리지 않은 그들 상호 의존을 실현시킨 최초의 인물, 후세 사람들은 장 모네를 그렇게 부른다. 그의 지혜를 프랑스의 쉬망과 독일의 아데나워가 받아서 현실로 만들었다. 과거를 성찰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정치인들은 막 시작된 냉전의 반격, 그리고 한국전쟁의 열전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세월이 흘러 많은 사람들이 묻는다. 왜 유럽은 지역 통합을 이루었는데 동북아시아는 여전히 냉전의 터널에서 벗어나지 못하느냐고. 전쟁이 남긴 증오의 크기, 유럽이 더 클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은 왜 다른가? 독일에는 반성하고 성찰하는 정치인이 있었다. 프랑스에는 증오에 찬 복수가 아니라, 화해를 선택한 지혜가 있었다. 동북아시아에는 아직도 과거의 대립 구조에 사로잡혀, 미래의 문에 못질을 하는 어리석은 정치인이 적지 않다. 특히 이 땅 한반도에. 인제대 통일학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