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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버스기사들의 희한한 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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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09-05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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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설은영

멕시코시티에서 9시간 걸리는 곳, 태평양 연안에 자리잡은 시우아타네호 열대 해변으로 여행을 갈 때였다. 너른 멕시코 분지에 점점이 박힌 불빛들, 멕시코시티의 야경을 멀리 바라보며 대도시 탈출의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던 때였다.

밤 12시경 모렐로스 쿠에르나바카 근처 어느 지점에선가 고속으로 질주하던 버스의 속도가 갑자기 떨어지더니 버스가 제자리에 푹 주저앉아버렸다. 나는 그저 운전사가 용변이 너무 급한 나머지 차를 세웠거니 생각했다. 차체의 야릇한 비틀거림이야 운전자의 심리가 반영된 것이 아닐까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런데 웬걸, 한참이 지났는데도 차가 옴짝달싹도 하지 않았다. 궁금증을 참지 못한 나는 차에서 내렸고 고속버스 머리 부분 아래에 달아둔 스페어타이어를 꺼내는 작은 덩치의 운전사를 발견했다. 또다른 운전사는 펑크난 왼쪽 타이어를 빼내기 위해 차체를 들어올리고 있었다(멕시코에선 6시간 이상 장시간 운전을 할 경우 두명의 운전사가 번갈아가며 운전한다). 잠에서 깬 승객 몇몇이 길가에 우두커니 서서 담배를 피워 물고 운전사가 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렇게 한 시간여를 하릴없이 흘려보냈다. 느릿느릿 굼뜬 그들의 동작에 대한 초조감은 어느새 담배 한대 짬의 느긋한 여유로 변해가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우리 버스를 지나치던 고속버스 한대가 저만치 앞에 멈춰 섰다. 호기심인지 동료애인지 알 수 없지만 앞문이 열리더니 두명의 운전사가 느릿느릿 다가왔다. 그들은 일을 거들 생각은 하지 않고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담배를 피워 물고 일하는 운전사들에게 농담을 건네기 시작한다.

우리 버스의 운전사들이 승객들에게, 막 도착한 차에 옮겨타고 싶거든 그렇게 하라고 했다. 그런데 아무도 갈아타려 들지 않았다. 기웃거리며 이것저것 잡일을 거들어 운전사들과의 연대감이 생겨서인지 나로선 알 길이 없었지만 한명의 승객도 바꿔 타지 않았다.

그때였다. 고속도로를 지나쳐가던 일곱대의 버스가 속속 우리 버스 앞뒤로 차를 세우며 흡사 고속버스 정류장을 방불케 했다. 검정 바지, 하얀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맨 운전사들이 몰려들었다. 개중엔 배지가 다른 경쟁회사의 운전사도 섞여 있었다. 이들은 농담을 건네고 담배를 주고받으며 운전사 대기실 풍경을 연출하기 시작한다. 그 순간, 어디서 나타났는지 순찰차 한대가 전조등을 환하게 밝혀 타이어 갈아 끼우는 일을 돕는다.


다시 한 시간이 흘렀다. 그 시간을 다채로운 잡담으로 보내며 인내하던 여남은 명의 운전사들은 타이어 교체작업이 무사히 끝나는 것을 지켜본 뒤에도 다시 담배를 나눠 피우며 단합을 과시했다. 그리고 뿌듯한 동료애를 확인하고 손바닥을 탁탁 털어내면서 각자 버스로 돌아가 일제히 시동을 걸었다. 놀라운 것은 그 시간 동안 단 한명의 승객도 운전사들의 단합을 방해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한 그제야 나는 우리 버스에 탄 승객 가운데 왜 한 사람도 옮겨 타지 않았는지 그 비밀을 깨닫게 되었다. 옮겨 타봤자 기다리긴 매한가지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린 새벽 3시가 다 되어 시우아타네호로 출발했다. 5월의 봄밤은 아름다웠다. 어디선가 풀벌레들이 일제히 울어대기 시작했다. 저 멀리 끝없이 펼쳐진 황량한 들판 위로 별들이 아주 초롱초롱했다. 우리 버스는 무려 13시간 넘게 달린 끝에 펠리컨들이 바다로 곤두박질치는 해변에 드디어 도착했다. 그리고 나는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것도 실감하지 못한 채 여관방에 장렬히 널브러졌다.

멕시코시티=박정훈 통신원 jhpark2001@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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