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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사냥, 인간이 할 짓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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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08-29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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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피로 눈을 녹여야 하는 북유럽의 동물들… 평등사회의 외피에 숨겨진 야만

사진/ 36만여명으로 추산되는 노르웨이의 사냥애호가들. 엽총과 사냥 자격증 소지자의 숫자가 전 인구의 10%에 이른다.(NORWAY)
관료집단의 부패와 무능으로 망해가던 옛소련 말년에, 기득권집단으로 변해버린 공산당 간부층을 좋지 않게 생각했던 사람들에게 가장 혐오스러운 것은 엽총을 들고 사냥 복장을 입은 그들의 모습이었다. 어용언론들은 거론하지 않았던 이야기지만 사냥을 주요 오락으로 삼았던 1917년 혁명 이전의 귀족층을 흉내냈던 공산당 간부들이 수렵기만 되면 보조원들을 거느리고 곰, 사슴, 늑대 등을 ‘즐기며’ 죽일 수 있는 관영 사냥터에 가곤 한다는 것은 널리 회자되는 이야기였다.

<늑대사냥>이라는 노래를 아십니까

민생과 경제를 곤경에 빠뜨린 주범이 초호화주택과 해외여행 등의 특권도 모자라 죄없는 동물까지 오락삼아 정기적으로 죽이는 것은, 서민들로서는 가증스럽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다. 필요도 의미도 없는 살생을 주요 오락으로 삼는 상황에서, 그 살생에 희생되는 동물이 사회에서 독재의 박해를 받는 자유주의자나 반(反)체제인사와 어떤 모습에서는 동일시되기도 했다. 그 당시 장군의 아들이면서도 ‘민중의 양심’으로 불렸던 블라디미르 브소츠키(시인·가수: 1938∼80)의 <늑대 사냥>이라는 유명한 노래에서, 사냥을 당하는 ‘주인공’ 늑대는 체제의 희생자·반대자의 이미지를 띠었다.


“총탄의 비를 맞아 피를 흘리는 우리는 체념했다. (중략)

피에 젖은 우리의 따뜻한 가죽은 눈을 녹이고 있었다.

하느님이 아닌 인간이 시작한 학살극…. (중략)

숲으로 가자, 뛰어가면 죽이기가 힘들 것이다.

빨리 뛰어 새끼들을 살려라!

나는 술에 취한 사냥꾼 앞에서 날뛰면서

길 잃은 늑대들의 영혼들을 불러모은다….”

죽음을 당하는 늑대의 마지막 울음이자 압제에 넋을 잃은 민중의 영혼에 호소하는 투사의 독백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노래를 들으면서 자랐던 필자의 세대에게, ‘사냥’이라는 것은 적어도 최소한의 의식을 가진 인간이 할 일이 아니라는 것은 상식으로 인식돼 있다. 노르웨이에 오기 전까지, 환경과 생명에 대한 의식이 비교적 높고 별다른 특권층이 없는 북유럽에서라면 ‘사냥’과 같은 반인륜적인 행위가 없으리라는 것이 필자의 믿음이었다.

그 순진한 믿음이 산산이 부서졌던 것은 엽총들이 버젓이 판매되는 것을 보았을 때, 사냥애호가들의 무용담들로 가득 찬 대중적 잡지를 접했을 때, 그리고 사냥애호가 숫자가 늘어나고 있는 것에 대해서 우려를 하는 노르웨이 환경운동가와 만나 이야기했을 때인 것으로 기억된다.

동물을 죽이면서 느끼는 ‘쾌락의 본질’

사진/ 러시아의 사냥 모습. 옛 소련 말년에 '사냥'은 부패한 공산당 간부들의 대표적 취미였다.(NORWAY)
어쨌든, 필자의 예상 중 하나만 부분적으로 맞은 것으로 밝혀졌다. ‘특권층’이라고 할 만한 계층이 존재하지 않는 노르웨이에서, 사냥은 신분과시 수단의 역할을 결코 하지 않는다. 민주·평등국가이자 숲·산악지대 등이 면적의 90% 이상을 차지하는 ‘자연의 나라’ 노르웨이에서, 사냥은 아무나 즐길 수 있는 ‘일반 스포츠’일 뿐이다. 국가의 자연관리국이라는 부서에서 공식적으로 등록된 엽총과 사냥 자격증 소지자의 숫자가 노르웨이 전 인구의 거의 10%에 도달했다는 사실은, 사냥의 대중성을 잘 대변해준다. 등록된 그 ‘사냥애호가’의 숫자가 최근 30년 동안 4∼5배 늘었다는 것은, 사냥의 대중화 추세를 보여주기도 한다. 질서정연한 노르웨이에서는, 사냥을 즐기려는 사람은 먼저 총기관리·사고방지 등에 대한 시험을 통과해야 하고, 그뒤 자연관리국에 등록할 뿐만 아니라 사냥에 나갈 때마다 수수료를 내서 사전 허가를 받아야 한다. 결국 술에 취한 간부가 낯선 총기를 잘못 다루어 보조원에게까지 오발탄을 쏠 수 있었던 옛소련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질서정연하고 안정된 제도지만, 이 질서의 바탕에 깔려 있는 것 또한 무고한 동물의 고통과 죽음이 아닌가.

상당수(약 3만명)의 여성을 포함한, 그리고 주로 숙련공이나 고학력 근로자로 구성된 노르웨이 ‘사냥애호가’들이, 무고한 도요새나 사슴을 정기적으로 죽이는 것을 왜 이토록 좋아하는가? 인간에게 위협도 우려도 되지 않는 나약한 동물들을 죽이면서 어떤 종류의 쾌락을 느끼는가? 만성피로증에 시달리는 한국에서는 ‘사회생활에 대한 스트레스 해소용’이라고 억지로 둘러댈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세계 최고의 노동환경과 최저의 공해, 그리고 최저의 실업률을 자랑하는 노르웨이에서 ‘스트레스’를 거론하기는 어렵다.

노르웨이 ‘사냥애호가’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들을 숲 속으로 이끄는 것은 일종의 ‘권력체험’의 요소이다. 도심사회에서 일상적인 규범 등을 지키며 평범한 일상과 평등한 사회에서 그 누구에게도 목청 높일 권리가 없는 사람이, 숲 속에 들어가기만 하면 스릴감과 함께 절대권력을 가진 군주로 변한다는 이야기다. 평등을 지켜야 하는 시민 중 하나에 불과했던 그는, 갑자기 동물에 관한 한 생사여탈권을 가진 절대군주가 된다. 결코 민주사회의 주인이 될 수 없는 그는, 총기의 위력에 힘입어 자연의 임시적인 ‘주인’이 되는 것이다. ‘사냥애호가’들의 말로는, 이와 같은 ‘권력체험’은 인간의 가장 깊은 본능으로부터 비롯된다고 한다. 이 ‘권력체험’이 인간에게 필요한 에너지를 보충해준다는 이야기를 별 부끄러움 없이 대중매체에서 할 수 있다는 것은, 문명의 외피 밑에 숨겨져 있는 야만의 ‘기저’가 얼마나 두껍고 무거운지 극명히 보여준다. 다른 인간 위에 군림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아 동물 위에라도 군림하려는 인간이, 기회만 주어진다면 다시금 인간 위에 군림할 것은 명약관화(明若觀火)다.

요즘 유행처럼 전례없이 많아진 노르웨이 남성과 제3세계 여성의 국제결혼에 대한 사회학적 설명 중에서, ‘권력본능’과 관련된 설명도 있다. 꼭 모든 국제결혼에 대해 이렇게 일반화해서 말할 수 없지만, 노르웨이 남녀간의 결합이 상대적으로 평등한 데 반해서 노르웨이 남성과 소득 수준이 낮은 지역 출신 여성의 결합을 ‘시혜/지배’의 관계로 해석하여 ‘시혜자/지배자’처럼 행동할 가능성이 많다. 한마디로, ‘사냥의 쾌락’에서 보이는 현대 북유럽인의 ‘숨겨진 야만성’이, 다른 무력한 대상에 대하여 또다른 형태로 분출될 수 있는 것이다.

동물권 보호 운동가들의 활약

사진/ 노르웨이의 숲과 산악지대에 서식하는 곰과 순록. 노르웨이 동물보호연맹은 '사냥의 전면금지'를 목표로 활동하고 있다.(NORWAY)
위안이 될 수 있는 것은, 사냥의 대중화와 함께 동물권(animal rights)보호운동도 차근차근 인기를 얻고 있다는 사실이다. 동물권 활동가들을 총망라하는 노르웨이 동물보호연맹(http://www.dyrebeskyttelsen.no/)은, 가혹한 종류의 동물 실험을 포함하는 연구를 금지시키고 농장에서의 동물에 대한 잔혹행위를 근절시키는 것 등을 주요 현실적 목표로 삼아 열띤 활약을 벌이고 있다. 동물권운동의 최종적 목표가 ‘사냥’의 전면적 금지라는 것은, 물론 두말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현재 노르웨이의 동물보호 운동가는 1만명을 넘지 못한다. 그들이 36만명의 ‘사냥애호가’와 사냥을 ‘건전한 스포츠’로 여기는 전체 국민의 약 70% 사람들을 설득시켜, 사냥 금지를 이루어낼 수 있는 날은 과연 언제쯤 올 것인가? 그날이 오기 전까지 얼마나 많은 동물들이 뜨거운 피로 눈을 녹여야 할 것인가? 지금 이 순간에도 나약한 노르웨이 동물들은 쾌락을 느끼려는 ‘사냥애호가’의 희생양이 되고 있다.

박노자/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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