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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평화활동가 두 번 죽인 이스라엘

자매도시로 맺어주려던 23살 미국인 레이첼 코리의 죽음… 가자지구 강제철거 막다 62t 불도저에 ‘뭉개져’ 숨진 사고, 법정은 이스라엘군 무죄 판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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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2-09-10 20:15 수정 : 2012-09-10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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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철 코리는 1979년 4월10일 미국 서부 워싱턴주 올림피아에서 태어났다. 살아 있다면, 올해 서른세 살이다.

올림피아의 퓨젓만 부근에서 자연과 더불어 성장한 코리는 꿈 많은 아이였다. 그의 어머니 신디 코리는 2003년 7월 <워싱턴중동문제리포트>와 한 인터뷰에서 코리의 초등학교 5학년 때 장래희망 목록을 이렇게 전했다. ‘변호사, 춤꾼, 배우, 엄마, 동화작가, 마라톤 선수, 시인, 피아니스트, 애완동물가게 주인, 우주비행사, 환경운동가, 인권운동가, 심리학자, 발레 교사, 사상 첫 여성 대통령….’

미쳐 돌아가는 팔레스타인에 가다

코리는 중학교 1학년 때 교사들의 처우 개선을 요구하는 동맹휴업을 주도할 정도로 적극적인 성격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는 교환학생으로 선발돼 6주 동안 러시아 사할린섬에서 생활한 경험도 있단다. “당시 머물렀던 러시아 가정의 살림살이를 보며 ‘어려운 이웃들’에 눈을 뜬 것 같다”고 코리의 어머니는 회고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코리는 고향에 있는 에버그린주립대에 진학한 뒤부터 외부 활동에 열심이었다. 대학 1학년부터 3학년까지, 매주 짬을 내 지역 정신병원에서 환자 돌보미로 활동했다. 주정부에 딸린 환경보호기관에서 자원활동을 하려고 아예 1년간 휴학을 하기도 했다.

평화운동가 레이첼 코리의 유가족이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 선고 공판이 8월28일 열렸다. 사진은 인터넷에 퍼진 레이첼 코리의 생전 모습과 그녀를 무참히 짓밟은 뒤 후진해서 가는 불도저 모습.
2002년 가을 대학 4학년이 된 코리는 ‘엉뚱한 꿈’을 꾸기 시작했다. 팔레스타인 땅 가자지구 최남단에 자리한 라파와 고향인 올림피아를 자매도시로 맺어주겠다는 계획을 세운 게다. 그 시작으로 라파와 올림피아의 어린이들 간 펜팔을 하는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그는 팔레스타인을 지원하는 평화운동단체인 ‘국제연대운동’(ISM)의 일원으로 활동하려고 2003년 1월22일 이스라엘에 도착했다.

당시 ISM은 요르단강 서안지역에 본부를 두고 있었다. 그곳에서 이틀간 교육을 받은 코리는 사전 준비작업을 거쳐 2003년 1월27일 이스라엘군 에레츠 검문소를 통해 가자지구로 들어갔다. 미국의 진보적 격월간지 <머더존스>는 2003년 9·10월호에서 “당시 코리가 교육받은 내용 가운데는 시위와 관련한 안전수칙이 포함돼 있었다”고 전했다. 이를테면 △형광색 점퍼를 입고 △절대 뛰지 말고 △(이스라엘)군을 자극하지 말고 △메가폰을 이용해 의사를 전달하고 △눈에 잘 띄도록 하라는 식이었단다.


가자지구 최남단, 시나이반도 이집트 국경과 맞닿아 있는 라파는 도시 전체가 거대한 난민촌이다. 코리가 도착했을 때는 이스라엘군이 ‘안전’을 이유로 팔레스타인 주민 가옥 강제철거에 한창 열을 내고 있을 무렵이다. 라파에서의 첫날밤을 코리는 라파 중심가 ‘블록J’에서 천막을 치고 보냈다. 이스라엘군 감시초소에서 시도 때도 없이 총탄이 날아들었다. 당시 코리 일행의 통역을 맡았던 팔레스타인 활동가는 <머더존스>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2003년 초는 거의 미쳐 돌아가고 있었다. 이스라엘 땅과 맞닿은 가자지구 바깥쪽 전역에서 강제철거 작업이 이뤄지고 있었다. 국제연대 활동가들도 다른 일엔 전혀 신경 쓰지 못하고, 오로지 강제철거를 막기 위한 비폭력 저항운동에 집중했다. 신변 안전을 보장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1달러, 가족이 바라는 명예회복 비용

오랜 세월 야만적 폭력에 길들여진 주민들은 쉽게 마음을 열지 않았다. 코리는 아랍어를 배우며, 그들에게 천천히 다가서기로 했다. 그렇게 시간이 갔다. 그해 3월14일 현지 <중동방송>과 한 인터뷰에서 코리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의 생존능력 자체를 조직적으로 파괴하는 장면을 목격하고 있다. 주민들과 저녁 식사를 하려고 마주 앉으면, 나와 함께 식사하는 이 사람들을 죽이려는 무기가 사방에서 번득이고 있다는 사실이 갑자기 떠올라 겁을 집어먹고는 한다.”

2003년 3월16일, 그날도 이스라엘군은 라파와 이집트 국경 사이에서 대대적인 철거작전에 나섰다. 이날 동원된 불도저는 일명 ‘두비’(곰인형)로 불리는 ‘캐터필러 D9R’였다. 군수업계 전문매체 <아미테크놀로지닷컴>의 자료를 보면, 이 불도저는 △길이 8.1m △너비 4.5m △높이 4m의 거대한 몸집에 무게만도 62t에 이른다. 방탄 기능은 물론 기관총과 유탄 발사기 등까지 장착할 수 있단다. 중장비보다는 중화기에 가깝다.

이날도 코리는 동료 활동가 7명과 함께 철거 현장으로 내달렸다. 여느 때처럼 붉은 형광색 재킷을 받쳐 입고, 손에는 메카폰을 들었다. 그리고 자신도 몇 차례 묵은 적 있는 팔레스타인 약사 사미르 나스랄라의 집으로 돌진해오는 거대한 불도저 앞을 맨몸으로 막아섰다. 순식간이었다. 불도저는 멈추지 않았다. 코리는 쓰러졌다. 그날 오후 5시5분께 코리의 뭉개진 몸을 실은 적신월사 구급차가 나자르병원 응급실에 도착했다. 15분 뒤인 그날 오후 5시20분께 그는 마지막 숨을 거뒀다. 23년11개월의 삶이 그렇게 스러졌다.

증언은 엇갈린다. 현장에 함께 있던 ISM 활동가들은 당시 등과 한 인터뷰에서 “불도저를 몰던 이스라엘군 병사가 고의로 코리를 덮쳤다”고 주장했다. 반면 이스라엘 일간 <하레츠>는 지난해 4월3일치에서 사건 당시 현장에 있던 군 지휘관의 말을 따 “그날은 가옥 철거가 아니라 이미 철거된 건물의 잔해 정리 작업만 예정돼 있었다”고 주장했다. ‘의도치 않은 사고’였다는 게다.

코리가 숨진 지 나흘 뒤인 2003년 3월20일 미국은 이라크를 침공했다. 아랍권 전체가 들썩였다. 팔레스타인 땅도 마찬가지다. 가자지구의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그해 4월5일 코리의 동료인 ISM 활동가 브라이언 에버리가 얼굴로 날아드는 총알을 맞고 중상을 입었고, 엿새 뒤인 4월11일엔 톰 헌덜이 이스라엘군의 총격으로 뇌사 상태에 빠졌다. 그야말로 ‘미쳐 돌아가는’ 세월이었다.

2010년 2월 코리의 부모는 오랜 준비를 거쳐 이스라엘 군 당국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다. 청구 금액은 ‘1달러’, 억울한 죽음의 책임만 물으면 족하다는 뜻이 담겼다. 현장을 목격한 ISM 활동가들의 입국을 거부하던 이스라엘 정부는 미 국무부의 항의를 받고서야 이를 허용했다. 사건 당시 현장에서 코리를 돌봤던 팔레스타인 의료진은 끝내 가자지구에 발이 묶여 증언대에 설 수 없었다. 재판은 지루하게 이어졌다.

‘이스라엘군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

지난 8월28일 이스라엘 북부 하이파지방법원 재판부는 2년5개월여의 심리를 마감하고 선고공판에 나섰다. 현지 <이스라엘타임스>가 인터넷판에서 전한 기사를 보면, 재판부의 판결은 이렇게 요약이 가능하다. ‘첫째, 코리의 사고였다. 사고를 자초한 것은 코리다. 충분히 위험을 피할 수 있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둘째, 이스라엘군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 사건을 의도하지도, 당시 부주의하지도 않았다. 더구나 사건 발생 불과 몇 시간 전에도 주변에서 이스라엘군을 겨냥한 무장공격이 벌어졌다. 따라서 현장에 있던 이스라엘군 병사들은 ‘전투행위 도중’이었으므로 어떤 책임도 면할 수 있다.’

코리의 죽음 이후 10년 세월이 지났다. 가자의 현실은 달라진 게 없다. 아니, 더 나빠졌다. 철저한 봉쇄와 잦은 무장공세 속에 만신창이가 됐다. 유엔 중동평화특별조정관실(UNSCO)은 지난 8월27일 내놓은 보고서에서 “현재와 같은 상황이 지속된다면 2020년에는 가자지구가 인간이 생존할 수 없는 땅이 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이스라엘 정부에 가자지구 봉쇄를 풀라고 촉구하는 결의안(1860호)을 채택한 건 2009년 1월8일이다. 가자는 여전히 봉쇄된 채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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