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에 달한 민족말살정책… 정보부원들에게 쫓기며 터키 내 쿠르드인의 참상을 돌아보다
터키에 도착해 쿠르디스탄(터키 동부 쿠르드인 거주지역)으로 떠나기 직전 필자가 찾은 곳은 이스탄불의 쿠르드어연구소였다. 이곳은 터키에 있는 유일한 쿠르드어연구단체이며 그만큼 터키 정부가 눈엣가시처럼 여기고 있다. 이곳의 소장인 하산 카야(36)는 지난해 열린 쿠르드어에 대한 세미나건으로 오는 9월11일에 법정에 출두하여 터키 법원의 판결을 기다려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다. 현재 그의 심정은 착잡하기 그지없다. 쿠르드어를 가르친 게 아니라 단지 쿠르드어에 대한 세미나를 했다는 이유로 2년의 감옥살이를 예상하고 있다.
지금까지 터키 정부의 쿠르드민족에 대한 민족말살정책은 집요하게 전개돼왔다. 오토만제국이 막을 내리고 현대 터키가 시작된 1923년부터 터키 헌법은 터키에서의 다른 민족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한 민족 한 언어’라는 국시는 1980년 터키에 군부정권이 들어서면서 한층 더 강화되었다. 당연히 쿠르드인학교와 대학교, 출판사나 신문사, TV, 라디오 등은 금지되었고 쿠르드어 사용도 금지되었다. “자신을 쿠르드인이라고 밝히면 일자리도 구할 수 없고 완전히 사회에서 추방되고 심지어 감옥에 가는 경우도 있다”고 하산 카야는 말했다.
이슬람의 여성게릴라
터키 전역에 걸쳐 조직돼 있는 쿠르드당인 하데프당원들의 배웅과 함께 쿠르디스탄으로 가는 기나긴 여정에 올랐다. 비행기로 가는 방법도 있지만 쿠르드인들을 더욱 잘 이해하기 위해서 이들과 함께 버스로 가는 길을 택했다. 엄청난 위험부담도 따랐다. 쿠르디스탄으로 들어가는 길목 곳곳에는 군사검문소가 설치돼 있고 일일이 검문을 통과해야 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끝없이 달렸던 버스는 어느덧 하룻밤이 지나면서 광활한 메소포타미아평야에 들어서고 있었다. 첫 번째 도시 우르파를 지나면서 공기가 무거워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시내 중심가에 군부대가 자리잡고 있었고 군용차량들과 무장군인들의 모습은 어디에서나 쉽게 볼 수 있었다. 낡고 지저분한 건물과 길거리는 가난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터키와의 차이는 금방 눈에 들어왔다. ‘쿠르디스탄의 수도’라 불리는 디야르바키르에 들어서는 길목에는 중무장한 터키 군인들이 지나가는 모든 차량들을 검문하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필자는 바짝 긴장했다. 지난해 쿠르드 민족에 관한 기사를 쓰면서 전 쿠르드사회주의노동당(PKK) 게릴라를 인터뷰한 적이 있었는데 그가 얘기하던 검문소가 바로 이곳이었다. 고향을 목전에 두고서 이곳에서 터키 보안군들이 그를 다시 이스탄불로 되돌려보냈던 것이다. 그 길로 그는 산으로 들어가서 게릴라가 됐다. 인구 200만명의 디야르바키르는 쿠르디스탄에서 가장 큰 쿠르드 도시이며 반역의 기운이 가장 높은 도시로 이름나 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하데프당으로 찾아갔다. 이곳에서 9년을 복역하고 바로 한달 전에 석방된 뒤 지금은 자유를 즐기고 있다는 전 PKK 여성게릴라를 만났다. 그는 “PKK 게릴라들 중 삼분의 일이 여성게릴라들이며 이들의 무장투쟁이 쿠르드사회에서 여성들의 지위를 한층 높이는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면서 여성게릴라운동의 의의를 말했다. 여성들의 문 밖 출입도 통제하는 회교국에서 직접 총을 들고 전투하는 모습은 회교여성들로서는 혁명적인 것임에 틀림없다. 이 도시의 시장은 하데프당 출신이 맡고 있다. 지난해 초에 3개 도시의 시장들이 경찰에 구금되는 사건이 있었는데 유럽연합의 항의로 며칠 뒤 풀려났다. 곧 시위원회의 위원 중 한명이 자기 집에 나를 데려가려고 왔다. 그러나 다시 당사로 차를 몰아서 되돌아왔다. 경찰이 뒤따른다는 것이었다. 그의 말로는 자기 집에 묵게 해주고 싶지만 필자가 떠나고 난 다음 자신이 경찰의 심문에 시달려야 하며 구속될 수도 있다고 했다. 그가 공포에 떨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날 밤은 호텔에서 머물렀다. 정보부원들이 호텔 밖에서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으나 개의치 않았다. 이 도시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들이 쿠르드인들이고 단지 경찰과 군인들, 그리고 국영기업체 직원들만 터키인들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거리의 대형상가와 은행에는 터키 국기가 게양돼 있어 터키 도시라는 것을 은연중에 강조하고 있었다. 중무장한 장갑차들이 도시를 순찰하는 모습과 많은 수의 경찰관들이 눈에 띄었다. 계엄령을 방불케 하는 상황이었다. 이곳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말로는 지난해까지만 해도 거리는 전시를 방불케 했다고 했다. 테러는 언제 어디서나 일어났으며 대상은 쿠르드 시민들이었다.
강제이주의 배경에는 석유가
다음날 터키인권위원회 디야르바키르지부의 간사인 쿠르드여성인권변호사인 레이한 얄진닥을 만나 쿠르디스탄지역의 인권현황을 들었다. 그에 의하면 2년 전 오잘란 구속 이후 상황이 상대적으로 좋아졌으나 여전히 쿠르디스탄지역에서의 공포정치는 사라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 예로 지난 1월25일에 발생한 하데프당 실로피 지부장인 세르다 타니시와 당원인 에부베키르 데니즈가 실종된 사건이 있었다. 이들 두 사람은 이 지역의 터키 보안대에 출두한 뒤 사라졌다는 것이다. 보안대에서는 이들을 보지 못했다고 발뺌하고 있지만 이곳으로 이들을 태워준 친구와 두명의 지역청년들이 증언하고 있다. 이 변호사는 “모두 이들이 터키 보안군에 의해 살해됐다고 믿고 있다”고 말했다. 하데프당원이라고 밝힌 한 청년은 이 지역 청년들 중 갑자기 길거리에서 경찰의 불심검문으로 한두번 구속된 적이 없는 사람은 보기 힘들다고 말했다.
인권위원회 사무실을 나오면서 두대의 정보부 차가 뒤따르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필자는 그들의 ‘표적’이 되었다. 필자는 다른 도시에서는 이들이 미행하지 않으리란 기대를 하면서 바트만시로 가는 미니버스에 몸을 실었다. 그러나 다른 도시의 정보부원들이 중간에서 교대까지 하며 미행하고 있었다. 미니버스의 운전사는 겁에 질려 새파랗게 변했다. 필자가 도리어 그를 안심시켜야 할 형편이었다. 바트만시에 도착하자마자 다시 신변의 안전을 위해 하데프당에 갔다. 당위원장은 바트만의 실업률이 70%가 넘는다고 하면서 터키 정부의 의도적인 투자회피를 비판했다. 필자는 이곳에서 정보부의 추적을 끝장내기로 마음먹고 정보부에 전화해줄 것을 당간부에게 부탁했다. 정보부원은 여권의 사본을 요구했고 여권 사본만 손에 넣으면 추적을 멈추겠다고 약속했다. 왜 미행하는지 이유를 묻자 “당신 신변의 안전”을 위해서라는 것이다.
다음날 하산키프로 가는 길에서도 여전히 그들이 미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바트만시를 벗어나면서 대규모의 정유소와 수백대의 유조차들이 석유를 운송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이 지역이 엄청난 양의 석유가 생산되고 있는 유전지대라는 것도 확인할 수 있었다. 쿠르드인들을 이곳에서 강제로 이주시키려는 터키 정부의 정책은 이곳의 유전지대를 지나면서 그 의문이 풀렸다. 이 지역을 거의 계엄령 상태로 통치하는 이유도 바로 이것 때문이라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스쳐지나갔다.
계속 미행하는 정보부의 차와 함께 하산키프에 도착했다. 고고학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이 지역은 가장 오래된 고대 메소포타미아문명의 발상지 중 하나이며 그 역사는 1만년 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수만명의 쿠르드인들은 티그리스강 양편의 절벽에 만들어진 천연동굴 속에서 수천년을 살아왔으며 동굴암각화와 궁궐터 등 많은 고대유물들이 산재해 있었다. 터키 정부가 집을 지어주겠다고 회유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이 마을로 내려오고 지금은 동굴집을 가게나 식당으로 사용하고 있고, 두 가족만 동굴집에서 살고 있었다. 이곳에서 가게를 운영하는 청년의 이야기로는 10년 전만 해도 1만명의 주민들이 동굴집에 살았으나 터키 정부의 이주정책으로 현재 2천명 정도의 주민만이 남아 있다고 했다. 그리고 ‘일리수댐프로젝트’로 내년이면 이곳이 수몰될 것이라고 말했다.
수천년 고대유적이 물에 잠긴다
지난해 영국 정부가 이 프로젝트를 위해 자금을 후원하려 했으나 환경단체의 거센 반발에 부딪혀 발을 뺀 상태이나 여전히 이 프로젝트가 살아 있음을 확인했다. 이 일대가 물에 잠기면 수만명의 쿠르드인들이 도시로 옮겨가게 될 것이며 고대문명의 자취는 물 속으로 사라지게 될 것이다. 필자를 미행해왔던 정보부원들과 약 20명의 정복경찰들은 이제는 아예 공개적으로 미행했다. 화장실, 인터넷 카페, 도로변 카페… 어디에나 따라다녔다. 처음에는 귀찮게 생각했다가 이제는 공포로 다가왔다. 이들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으므로 무슨 일을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지난해 이탈리아 기자도 구속된 적이 있었다고 들었기 때문에 구속도 각오해야만 했다. 미디앗이라는 작은 도시로 옮겼다. 이곳에서는 회교의 영향력이 무척 강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필자가 쿠르드인이냐고 물으면 아랍터키인이라고 답하거나 아랍인이라고 답했다. 분명히 쿠르드인들이지만 정체성을 상실한 사람들이었다. 터키 정부의 쿠르드족 분열정책이 성공한 사례라고 누군가가 귀띔했다. 이곳 사람들은 터키 정부로부터 생활보조금 등의 명목으로 금전적인 지원을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계속되는 추적에 심신이 피곤해지면서 오직 ‘탈출’이라는 단어만 뇌리를 맴돌았다. “이들의 손에 카세트테이프와 필름이 들어가면 인터뷰에 응해준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당할 수 있다”는 불안감도 엄습해왔다. 다음날 아침 다시 바트만시로 되돌아갔다. 이곳의 호텔로 하데프당원들을 불러서 경찰에 연락하여 추적을 멈추게 하라고 요구했으나 이들도 속수무책이었다. 정보부원들이 호텔을 완전히 포위했다. 모든 출입구에는 정보부원들이 진을 치고 있었고 한 정보부원이 호텔 종업원들에게 무언가 명령하는 것이 보였다. 그는 종업원들에게 내가 호텔에서 나가는 것을 즉각 보고하라고 했으며 만약 그렇지 않을 경우에 호텔문을 닫게 하겠다는 협박까지 했다. 그리고 하데프당원들이 왔을 때 통역을 했던 한 호텔식당의 요리사가 정보부원에게 심문받았다는 얘기도 전해 들었다. 호텔 종업원들은 모두 영문도 모른 채 공포에 떨었다.
그들을 겨누는 삼성 자주포
아침이 되면서 결정적인 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했다. 미니버스는 나를 태우고 버스정류장으로 갔다. 여기서 30분 이상을 기다려야 했다. 6시가 되자 사람을 가득 실은 미니버스가 움직이기 시작했는데 뒤를 돌아보고서는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녹색의 정보부 승용차였다. 운전사에게 호텔로 다시 데려다줄 것을 부탁했다. 호텔에 진을 치고 이들이 나를 체포할 때까지 싸우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안면이 있던 한 정보부원도 호텔로비로 따라들어왔다. 그는 당장 이 지역을 떠나지 않을 경우 체포해 강제추방하겠다고 했으며 이미 충분한 증거를 확보해놓은 상태라고 말했다. 이들도 완전히 지쳤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필자는 마침내 떠나기로 작정했다. 자유의 공기를 맡고 싶었기 때문이다. 4박5일 동안 이곳의 쿠르드인들이 겪었던 고통을 조금이나마 겪은 것은 의미있는 경험이었다. 공포 속에서의 4박5일은 자유의 소중함을 뼛속까지 심어준 소중한 날들이었다.
그러나 떠나면서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었다. 터키는 몇달 전에 경제위기를 맞아 IMF 구제금융을 받아들인 바 있지만 여전히 군비증강을 계속하고 있다. 터키 정부는 막대한 군비를 쿠르드 민족의 통제와 말살을 위해 사용해오고 있다. 터키는 다른 나라, 특히 미국으로부터 매년 신형무기를 수입하여 이를 쿠르드인들을 대상으로 시험해왔다. 1988년 사담 후세인이 쿠르드인을 대상으로 화학무기를 시험했듯이. 지난 7월20일 한국 국방부는 삼성테크윈과 터키 정부가 2011년까지 10년 동안 신형(K9)자주포 300문(10억달러)을 수출하기로 계약했다고 자랑스럽게 발표했다. 한국의 신형자주포들이 쿠르드 민족을 억압하는 도구로 사용될 것이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아테네=하영식 통신원 youngsig@otenet.gr

사진/ 쿠르디스탄 지역에서는 군용차량과 완전무장한 군인들이 자주 눈에 띈다. 언제나 계엄령상태와 긴장감이 감돈다.

사진/ 회교국 여성들의 지위를 드높인 데서 의의를 찾을 수 있는 쿠르드 여성게릴라들.

사진/ 훈련을 받고 있는 쿠르드 게릴라들. 99년 오잘란 체포이후 쿠르드 민족해방운동은 민주적인 방식으로 노선을 전환했다.

사진/ 이스탄불시 쿠르드인 구역의 차 판매원 모습.

사진/ 오잘란을 위해 싸우는 쿠르드 여성변호사 하디제 코르굿.

사진/ 하산키프를 흐르는 티그리스강과 절벽의 동굴들. 수천년 동안 쿠르드인들의 이곳에 거주해 왔으나 이 지역은 댐 프로젝트로 인해 여전시 수몰될 위기에 놓여 있다.

사진/ 이스탄불 쿠르드인 구역에서 맞별이 부모가 일 나간 사이 혼자가 된 어린이의 모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