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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시민들만 몰랐던 작전명 '장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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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08-22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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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와 희생, 절대적인 복족만을 강요했떤 베를린장벽 설치 40주년

사진/ 소련 구역에 위치한 베르나우어 거리의 집들은 프랑스 구역과 맞닿아 있었다. 창문을 뛰어내리면 바로 서베를린 땅이다.
지금으로부터 40년 전, 당시 동독의 공산당 서기장 울브리히트는 베를린장벽 설치의 변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서베를린은 인신매매와 첩자가 판을 치는, 놀고먹는 이들의 천국이다. 흥청거리는 미국영화들은 젊은이들의 정신을 오염시키고 있다. 서베를린은 우리 젊은이들에게 살인과 폭력을 가르치는 해악의 근원이다!” “많은 사람들이 장벽 설치로 나를 미워할 것임을 알고 있다. 그러나 ‘사회주의’를 위해 나는 이를 감내할 준비가 되어 있다.” 1961년 8월13일 이후 설치된 베를린장벽은, 최소한 동독 공산당에게 ‘간악한 자본주의’로부터 선량한 동독 시민을 보호하기 위한 ‘평화와 구원’의 조치였던 것이다.

‘보호망’이냐 ‘감옥’이냐

그로부터 28년이 흐른 지난 1989년 11월9일, 영원할 것 같던 베를린장벽은 자유를 외치며 밀려든 동독 시민들에 의해 맥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이후 베를린장벽의 ‘물리적’인 철거가 신속하게 진행되었고, 이듬해 통일독일 정부를 구성할 총선이 실시되었다. 3선에 도전했던 ‘통일 총리’ 헬무트 콜은 동독지역 선거유세에서, “여러분, 서독사람이 가지고 있는 튼튼한 냉장고가 필요하십니까. 늘씬하고 번쩍거리는 벤츠도 타고 싶으시죠. 여러분들도 이제는 여름이면 비행기를 타고 햇살이 비치는 남국으로 휴가를 떠나야 하지 않겠습니까?”라며 마치 소원을 들어주는 요술방방이라도 가지고 있는 양 현혹적인 말들로 지지를 호소했다. 마침 동독 시민의 손에는, 많은 학자들과 정치인들의 반대 속에서 헬무트 콜 총리가 밀어붙이기식으로 도입한 단일통화, 서독 마르크화가 한 다발씩 들려 있었다. 듣도 보도 못했던 물건들이 동독지역 상점의 진열장을 숨가쁘게 메워나갔고, 여기에도 성이 차지 않은 일부 사람들은 서독 대도시들로 건너가 한바탕 ‘소비의 미덕’을 즐기고 있었다. 요술방망이의 달콤한 유혹 때문인지, 동독 시민들은 이 지역에서 아무런 역사적, 정치적 기반을 갖고 있지 않았던 우파 기독교민주당(CDU)에 과반수가 넘는 압도적 지지를 선사했다. 45년 역사의, 이른바 ‘노동자, 농민국가’ 동독의 완전한 몰락을 의미하는 순간이었고, 제2차 베를린장벽의 붕괴이기도 했다. 과연 울브리히트가 역설했던 ‘자본주의에 대한 보호망’은 동독 시민에게 아무런 자본주의 항체를 만들어주지 못했던,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눈물만을 요구했던 역사의 실패작이었을까?

사진/ 베르나우어 거리. 장벽을 대신했던 집들이 헐리고, 현재는 장벽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61년 당시 동독 정부에 베를린장벽은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던 것 같다. 1945년 독일이 동서로 양분된 이래, 동독에서 서독을 향하는 이주 및 탈출행렬은 꼬리를 물고 이어져 나갔다. 61년까지 그 숫자는 무려 270만명에 다다랐다. 하루 평균 동독을 떠나는 인구는 서독지역에 매일 하나의 새로운 마을이 생겨나는 규모였다. 따라서 이는 동독 정부에 단순한 경제 노동력의 감소를 벗어나 국가 존재의 위협으로 까지 받아들여졌다. 5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이 이주 행렬은 동독 공산당에 그리 싫지만은 않은 것이었다. 초기 동독을 떠나는 사람들은 대부분 기업가나 대토지 소유자들로, 어차피 이들은 ‘노동자, 농민국가’ 건설의 걸림돌이었고, 하나의 사회저항세력이었다. 그러나 젊은이, 기술자 그리고 지식인들이 이주행렬에 합류하면서 상황은 반전됐다. 급기야 동독 정부는 1957년 서독 여행비자 발급을 중단하기에 이르렀고, 또한 동·서독 경계선에는 하나둘씩 철조망이 설치되기 시작하였다. 동독을 허가없이 떠나다 체포될 경우, 이들은 ‘공화국 도망자’로 간주되어, 3년간의 실형에 처해졌다. 이때부터 합법적이던 이주가 탈출로 변하게 되었고, 이듬해에는 이들 탈출자에 대한 발포 명령이 내려진다. 장벽이 설치되기 직전인 1960년 한해 동안 동독을 탈출한 이는 약 20만명, 이중 약 15만명이 서베를린을 탈출 경로로 이용하였다. 울브리히트는 한 대중연설을 통해 “1961년까지 서독의 생활수준을 따라잡겠다”고 공언하면서 탈출 행렬의 기세를 꺾어보려고 시도했다. 사회주의자의 입에서 “자본주의의 몰락” 대신 “자본주의를 따라잡겠다”는 고백이 나올 정도로 당시 상황은 그들에게 심각하고 위협적인 것이었다.

3시간 반에 걸친 작전명 ‘장미’

사진/ 베를린장벽 40주년 기념전시장에 전시된 당시 장벽 건설 장면.
당시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었던 흐루시초프에게도 동독은 커다란 걱정거리였다. 소련에 동독의 몰락은, 인접한 폴란드를 비롯한 동유럽 공산주의 블록 전체의 상실을 의미했다. 다급해진 흐루시초프는, 새롭게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존 F. 케네디와의 61년 6월 미·소정상회담을 통해 서베를린 통제권을 넘겨줄 것을 요구하였다. 케네디는 서베를린에 대한 어떠한 도발도 전쟁을 의미한다며 강력하게 반발하여, 연이어 거대한 규모의 군비증강 계획을 발표했다. 그러나 전쟁은 동·서 양 진영이 결코 원치 않던 해법이었다. 울브리히트는 “독점자본주의자들이 양심도 없이 우리의 가장 훌륭한 생산력(인력)을 빼앗아간다. 국경선이 계속 열려 있을 경우, 이는 동독의 몰락을 의미한다며”며 모스크바에서 열린 동유럽 블록 공산당 서기장회의에 장벽 설치를 공식적으로 요구했다. 소련의 허가없는 장벽 설치란 불가능했다. 그해 7월 모스크바의 최종인가가 떨어졌고, 이때부터 베를린 시내 한복판을 가르는 장벽 설치가 비밀리에 준비되었다. 그러나 165.7km에 이르는 경계선을 봉쇄하기 위한 대규모 준비작업을 서방 정보기관 모르게 진행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장벽이 설치된다는 사실을 까마득하게 모르고 있었던 것은 오로지 동·서독 시민들이었다. 케네디도 8월 초 한 연설에서 “흐루시초프는 어떻게 해서든지 탈출행렬을 막으려 할 것입니다. 아마 그는 장벽을 쌓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를 저지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장벽 설치를 기정 사실로 받아들였다.

1961년 8월13일 새벽 1시, 작전명 ‘장미’. “사회주의의 적으로부터 조국(동독)을 보호하기 위한” 거대한 작전이 개시됐다. 81개 동·서베를린 통과지점 중 68개가 봉쇄됐고, 5m 간격으로 경찰과 군인이 경계선에 배치됐다. 철조망이 놓이고, 콘크리트 장애물이 설치됐다. 193개 도로가 차단됐고, 12개의 지하철, 전철 노선이 봉쇄됐다. 또한 탈출 경로로 쓰일 수 있는 경계선 인근 모든 하수·배수구 내부까지 철근으로 메워졌다. 단지 3시간30분 만에 모든 작전이 완료됐다. 새벽 5시, 평소와 다름없이 출근길에 오른 동베를린 시민들은 서베를린 시민만을 태우고 떠나는 전철을 타지 못한 채 군인들에 의해 역사 밖으로 내몰렸다. 일부는 선로로 뛰어들었고, 아우성과 눈물이 역사 주변을 가득 메웠다. 오전 10시45분, 경계선을 가로질러 흐르는 베를린 슈프레강에 뛰어들어 서쪽을 향해 헤엄쳐오는 동독 시민 100명의 처절한 모습이 서독 방송사에 의해 방송되기도 했다. 성난 군중이 곳곳에서 군대와 충돌하였으나 봉기는 일어나지 않았다. 탱크의 출현과 함께 거리는 점차 조용해졌다.

장벽에 뿌려진 탈출자들의 피

사진/ '눈물의 궁전'이라고 불렸던 프리드리히 거리의 역. 베를린장벽 때문에 헤어져야만 했던 연인, 가족, 친척들이 빌리 브란트의 동방정책 이후 정기적으로 만날 수 있었던 곳이다.
그러나 베를린장벽도 거센 탈출의 물결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장벽 설치 뒤 4주 동안 발각된 탈출시도만 216건. 살벌한 위험 속에서도 동독 시민들은 지붕에서 뛰어내렸고, 강을 헤엄쳐 건넜고, 자동차로 철조망을 뚫고 돌진해 갔다. 서베를린 대학생들은 즉각 구호단체를 조직해 나갔다. 최근 TV에 방영된 기록영화에 의하면, 이 단체의 비밀작업에 의해, 서베를린 대학생 여권을 손에 든 동베를린 대학생 450여명이 탈출에 성공했다. 1988년 장벽이 무너질 때까지 총 4만명이 탈출하였다는 서독 정부의 공식발표도 있었다.

베를린장벽 건설 40주년을 맞아 최근 독일연방 문서기록실이 발표한 연구자료에 의하면, 950명이 동·서독 국경선을 넘다 목숨을 잃었다. 이중 230명이 베를린장벽을 넘지 못한 채 피를 흘리며 쓰러져갔다. 무려 7만2천명에 이르는 시민들이 탈출시도 죄로 형무소 생활을 해야 했다. 이처럼 베를린장벽는 이를 넘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피와 희생을 요구하였고, 장벽 뒤 동독에 남겨진 이들에게는 절대적인 복종이 강요됐다. 그러나 결국 베를린장벽은 ‘자본주의에 대한 보호막’이라는 울브리히트의 간절한 소망을 이루어주지 않은 채 역사 속으로 사라져갔다. 복종은 상처를 더욱 깊게 할 뿐이라는 교훈을 남기고 말이다.

베를린=글·사진 강정수 통신원 jskang@web.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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