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표지이야기

원전 지지하는 ‘진보’

신좌파 이론가 요시모토 다카아키의 원전 찬성이 전향이 아닌 이유
그의 ‘소비자본주의론’에 깃든 과학기술 문명에 대한 믿음 혹은 맹신

905
등록 : 2012-04-05 10:44 수정 : 2012-04-06 11:39

크게 작게

1980년대 중반, 우연한 자리에서 만난 일본의 어느 활동가가 나에게 책 한 권을 권했다. 요시모토 다카아키의 <공동환상론>이라는 생소한 이름의 책이었다. 1968년 출간돼 당시 젊은이들에게 폭발적 인기를 얻었던 책이다. 요시모토는 이 책에서 국가란 사회계약의 산물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레닌이 말하는 부르주아지 계급을 위한 폭력장치도 아니며, 오직 공동의 관념이 만들어낸 창작이며 픽션이라는 내용을 펼친다. 지금에 와서 보면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에 가깝다.

요시모토 바나나 아버지의 부고

일본 <고치신문>에 실린 요시모토 다카아키의 부고 기사. 그는 <공동환상론>뿐 아니라 다양한 저서를 집필한 지식인이었다. 권혁태 제공
일본인 친구가 이 책을 왜 나에게 권했는지 그 속마음을 알 길은 없다. 짐작건대 <공동환상론>이 교조적인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대한 비판서로, 스탈린주의와 일본 공산당에 반대하는 1960년대 전학공투회의(전공투) 학생 및 신좌익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는 게 이유일 것이다. 그는 당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읽고 있던 나를 교조주의자라 ‘착각’하고 이 책을 읽고 교조주의에서 벗어나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러나 그 친구의 호의 아닌 호의는 실패로 돌아갔다. 이유는 간단하다. 내가 교조주의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친절이 실패로 끝난 더 큰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그가 권한 책이 너무나 난해해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일본어 실력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뒤에도 시간 날 때마다 몇 번이나 읽기를 시도했지만 그때마다 도중에 내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저런 문헌을 보니 이 책의 완독률이 5%에도 미치지 못한다니 온전히 내 지력 탓만은 아니다. 그때부터 요시모토 다카아키는 나에게 하나의 ‘숙제’가 되었다. 물론 중간중간에 이 사람의 다른 글을 접했고 내 논문 등에 그를 인용하는 일이 점차 늘어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이론을 전체적으로 이해했다고는 볼 수 없다.

그런데 지난주에 그의 부고 기사가 ‘갑자기’ 내 눈에 들어왔다. 1924년생, 87살. 요시모토 다카아키의 부고가 한국의 신문에 실리다니! 사실 그가 일본 사회에 끼친 영향은 그 난해함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듯하다. 일본 미디어가 그의 죽음을 보도하며 ‘지의 카리스마’ ‘전후 사상가’ ‘지의 거성’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을 봐도 그렇다. 따라서 한국 미디어가 그에게 관심을 갖는 것은 자연스럽다. 하지만 그가 다시 미디어의 이목을 끌게 된 것은 그의 사상이 2012년 단계에서 다시 평가받아서가 아니다. 그의 딸이 요시모토 바나나라는 점이 더 영향을 끼친 듯하다. 요시모토 다카아키의 저작은 한국에 한두 권 정도가 번역·소개돼 있지만 문학 관련서가 중심이다. 그의 격렬했던 생애와 사상이 번역·소개된 적은 없다. 반면 딸인 요시모토 바나나의 소설은 언뜻 봐도 20권 가까이 번역돼 있다.

“원전 반대하면 원숭이로 돌아간다”

하지만 그의 죽음이 이 시점에서 세상의 이목을 끈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그가 후쿠시마 원전 사고 뒤부터 1년 동안 줄기차게 원전에 찬성하는 발언을 반복해왔기 때문이다. 거의 ‘원전 전도사’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원전을 없애면 (과학의) 진보가 없어진다”(2011년 5월27일), “과학에 퇴보는 없다”(2011년 8월5일), “원전에 반대하는 것은 문명을 포기하는 것이다”(2011년 10월)라며 원전과 과학기술에 대한 변함없는 신념을 밝히더니 급기야는 올해 1월 초에는 <슈칸신초>(週刊新潮)라는 주간지와의 인터뷰에서는 “원전에 반대하면 인간은 원숭이로 돌아간다”는 자극적인 발언을 쏟아냈다. 그의 말을 인용해보자. “공포심을 100% 없애고 싶다면 원전을 완전히 없애는 방법밖에 없다. 하지만 원전을 없애면 공포심은 없어지지만 문명을 발전시켜온 오랜 노력은 물거품이 된다. 인류가 키워온 핵개발 기술은 모두 의미가 없어진다. 이는 인간이 원숭이와 갈라져 지금까지 발전해온 그 역사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 인류 진화의 역사를 과학기술 문명의 역사와 동일시하고 이를 원전 찬성의 논거로 삼는, 과학기술 문명에 대한 종교에 가까운 그의 믿음은 그의 의도와 관계없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자동차 사고로 사람이 죽었다고 해서 자동차를 없애자는 논리와 같다”는 그의 발언은 적지 않은 파장을 남겼다.


극우 상업주의의 대표적 잡지인 <슈칸신초>와 인터뷰한 것도 논란이 된 듯하다. 게다가 이 잡지는 원전 관련 전력회사 광고 지출액 순위에서 4위에 자리하고 있다. 그렇다면 원전회사의 의중이 이 인터뷰 기사의 의도에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고도 할 수 없다. 그래서 평론가인 사타카 신은 원전을 홍보하는 ‘원전 문화인 50명’에 요시모토 다카아키를 포함시키고 있다. 극우 정치인인 도쿄지사 이시하라 신타로가 원전 찬성의 논거로 요시모토의 이 발언을 인용했을 정도니, 원전 찬성파에게 요시모토의 발언은 아마 ‘가뭄에 단비’였을 것이다.

요시모토의 원전 찬성 발언은 물론 ‘전향’은 아니다. 사실 일본의 마르크스주의와 원자력은 강한 친화력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반체제적 신좌익 지식인이라 평가되는 요시모토가 원전에 찬성했다고 해서 이를 사상적인 전향이라고는 할 수 없다. 게다가 그는 이미 1980년대 초반부터 핵개발을 지지하는 발언을 적극적으로 펼쳐왔다. 요시모토가 핵 문제에 대한 논쟁의 중심에 서게 된 것은 다음 두 가지 경로다. 하나는 1981년에 있었던 ‘문학자의 반핵 서명’ 문제다. 당시 미국의 핵무기 유럽 배치 계획이 표면화돼 세계적으로 반핵운동이 고양되고 있었고 일본에서도 문학자들이 반핵 서명 운동을 펼쳤다. 요시모토는 문학자의 반핵 서명이 결국 미국을 ‘전쟁 도발의 자본주의국가’로, 그리고 소련을 ‘평화세력’으로 간주하는 것이니 반핵 서명에는 찬성할 수 없다는 뜻을 표명한다. 이 때문에 주위에서 요시모토는 핵무기 찬성파 혹은 전쟁 긍정파로 맹공격을 받게 된다.

그가 혐오한 공산당 이론과 닮아

물론 요시모토의 ‘고집’이 일본의 반핵평화운동의 ‘소련 경사’를 비판하는 차원이라면, 이를 전향이라 할 수는 없다. 더구나 그가 1960년대부터 반스탈린주의와 반소련을 슬로건으로 삼은 신좌익 세력의 이념적 중심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의 ‘고집’에는 일관성이 있다. 또 일본의 반핵평화운동이 1960년대 사회주의의 핵무장에 대한 견해 차이로 분열을 겪었으니 요시모토의 ‘반기’가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다. 하지만 원전 문제에 대한 요시모토의 의견을 보면 그의 과학문명에 대한 신앙이 이미 1980년대에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1982년 출판된 <반핵 이론(異論)>이라는 책에서 원전이 “문명사의 도달점”이며 “물질에너지를 과학이 해방한 것”이니, 좌익 진보 진영이 원전을 부정하는 것은 “문명에 대한 반동”이라고 비판한다.

그리고 핵무기로서의 핵은 정치의 문제지만 핵에너지로서의 원자력은 과학기술의 문제이니 정치와 과학을 혼동해서는 안 되며 양자를 구별해야 한다고 말한다. 즉 그는 핵에너지의 군사적 이용은 정치의 문제이니 반대해야 하지만, 핵에너지의 평화적 이용은 과학의 문제이니 문명사적 차원에서 찬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원전을 핵무기와 구별해 과학문명의 도달점으로 보고 이를 순수하게 과학의 영역에 가두어 보호하려는 요시모토의 관점은, 원전 개발과 그 확산 과정을 핵무기 개발과 분리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냉전 구조와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는 역사적 사실을 무시한 일종의 폭론(暴論)에 가깝다. 또 원전은 정치의 영역이 아니라는 그의 발언은 이미 매우 정치적이다. 물론 원전 반대를 반과학으로 보는 그의 견해는 독창적인 것은 아니다.

그가 혐오했던 일본 공산당 미야모토 겐지 위원장도 원전 반대를 반과학이라 했고, 지금 일본 공산당의 관점도 이에 가깝다. 저명한 경제학자 아리사와 히로미도 “핵무기에는 반대하지만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에는 찬성한다”는 의견을 밝혔다. 따라서 그는 1950년대부터 미국 정부나 일본 정부가 주장해오던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이라는 ‘허구’의 언설에 한마디를 덧붙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반권력·반체제의 화신이라 불린 그가 1980년대에 왜 ‘원전 전도사’를 자처하게 된 것일까? 그가 펼친 이른바 ‘소비자본주의론’과 관련이 있다. 그는 일본이 자본주의의 고도화를 통해 대량생산·대량소비·대량폐기 단계에 접어들었으며 이를 통해 대중이 해방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소비자본주의는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이며 따라서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초자본주의’ 혹은 ‘탈자본주의’의 가능성을 열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런 자본주의 예찬론은 기본적으로 서구적 근대를 세계사의 최고 단계로 보는 그의 견해와 맞닿아 있을 뿐만 아니라, 서구적 근대를 지탱해온 과학기술 문명에 대한 그의 종교적 믿음과 분리할 수 없다.

보수, 진보로 나뉘지 않는 후쿠시마 문제

하지만 그의 소비자본주의론은 1980년대 중반의 시대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당시 일본은 버블 경제의 최전성기였다. 더 많이 쓰고 더 많이 먹고 마시는 게 미덕인 시대였다. 물론 소비사회의 출현은 이미 1960년대부터 시작되었지만 질과 양에서 전혀 다른 차원의 소비사회가 1980년대 일본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따라서 과잉 소비와 다양한 소비가 불러온 문화론이 지식인 담론의 핵심이었다. 게다가 버블 말기에는 사회주의권의 붕괴가 시작되었으니 그의 소비자본주의론은 시대의 산물이었던 셈이다. 1986년에 체르노빌 원전 사고가 일어났지만, 그것은 요시모토나 일본 사회가 보기에 기술적 수준이 낮은 사회주의 소련의 문제였다. 고도화된 소비자본주의 일본과는 무관한 교훈적 사고였을 뿐이다.

이렇게 보면 후쿠시마 원전 사고의 문제는 지난번 연재에서 밝혔듯이 보수·진보의 문제는 아니다. 민주주의적 가치나 진보의 이념이 반드시 원전 찬성의 논리와 모순되는 것이 아니듯이, 파시즘이나 보수의 이념이 원전 폐기의 논리와 반드시 모순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죽을 때까지 과학문명과 진보의 이름을 들어 원전에 대해 적극 지지의 뜻을 굽히지 않은 신좌익 진보파 요시모토의 생애와 신념이 이를 잘 대변해준다.




성공회대 일본학과 교수


좋은 언론을 향한 동행,
한겨레를 후원해 주세요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보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