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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지킬 박사와 하이드?

370
등록 : 2001-08-01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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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세계 진출기업의 일상적 노동착취… 비서구사회를 향한 유럽인의 조소는 과연 정당한가

사진/ 사회민주주의 국가인 노르웨이 의사당. 비서구사회에 대한 도덕적 모순을 극복하기는 아직 어려운 것인가.
필자가 한번은 오슬로대학교의 중국역사 시험에 시험관으로 나간 일이 있었다. 한 여학생이 중국의 천안문사태에 대해 구두대답을 해야 했다. 그 여학생이 중국 청년들의 민주화운동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데 한 교수가, “학생운동 내부의 미시적인 대인관계는 과연 민주적이었는가?”라는 어려운 질문을 돌연히 했다. 그 학생의 대답은 놀랄 만큼 단도직입적이고 자신만만했다. “중국에서 무슨 민주주의가 있을 수 있죠? 중국의 4천년 전통에도, 중국의 현실에도 민주주의 흔적은 없어요. 당연히 민주화운동의 지도자와 지지자들간에 전형적인 중국적 주종관계가 이루어졌을 뿐이죠. 그들이 이길 리야 없었지만, 만약 이겼다면 새로운 모습의 권위주의체제를 재현시켰겠죠.”

중국 민주주의에 대한 노르웨이 여학생의 생각

자신에 찬 목소리로 중국에서의 민주주의 가능성을 전면 부정했던 그 여학생의 대답을 들었을 때, 필자의 마음속에서 그야말로 만감이 교체했다. 일반 노르웨이사람들과 대다수의 노르웨이 전문가들의 상식을 그대로 보여준 그 여학생의 대답에는, 물론 상당 부분의 쓴 진리가 담겨 있었다. 제3세계의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서양의 무자비한 침략으로 주체적인 근대화의 기회를 많이 빼앗긴 중국에서 전근대적인 주종의 개념이나 ‘관계의 문화’가 온존된 것도, 자신들의 사무실로 일반 학생의 출입을 금지했던 천안문운동의 ‘의장님’들이 사실, 민주주의를 제대로 알지도 실천하지도 못했다는 것도 부정하기 힘든 사실들이다.


그러나 19세기 초까지 세계의 최대·최강 국가였던 중국 근·현대의 국난들에 대한 서양인들의 책임문제나, 천안문운동을 반인륜적인 방법으로 탄압한 현 정권이 이끄는 중국경제에 대한 노르웨이의 엄청난 투자의 도덕성문제 등은 제쳐두고라도, 노르웨이 등의 유럽사회를 민주주의의 표본으로 보는 그 여학생과 대다수 노르웨이사람들의 상식은 과연 정당한가? 비민주적 비서구 문화와 민주주의의 보루인 서구의 대조를 당연지사로 아는 그들의 집단의식은 과연 얼마나 객관적인 진리에 가까운가?

물론, 노동자의 투쟁결과인 노동법이 효력을 발휘하고 노조가 큰 권력을 가지는 이상, 그 여학생이 사회적 주종관계를 맺지 않는다 해도 별탈없이 평생을 살아갈 수 있다. 취직과정에서 백을 이용할 틈이 별로 없기도 하고, 노동법으로 평생 직장이 보장되는 이상 상사에게 아첨을 떨 필요도 없다. 이와 같은 안정된 입장에서 그 여학생은 재학 시절 각종 ‘관계’들을 맺기에 급급한 중국 학생들을 조소할 여유를 충분히 갖는다. 그리고 노르웨이의 극히 평등주의적인 분위기에서는 그 여학생이 학생회 회장이 된다 해도, 별다른 행세를 할 수가 없다.

그러나 문제는 다른 데 있다. 이처럼 민주적으로 길들여져 사는 노르웨이사람들이, 노동자 본위의 노동법도, 노조도, 감시기관도 없는 제3세계에서도 과연 민주주의를 실천할까? 그들의 민주주의는 특수한 사회환경에 의해서 형성된, 다른 환경에서는 상당히 변질되는 일종의 외면적 관습인가? 아니면, 어떤 환경에서 어떤 유혹을 받아도 지켜지는 내면적 이상인가? 여담이지만, 비(非)서구적 사회에서 민주주의를 포기(?)하고 편한 방식을 선택한 한 서구인에 대한 에피소드를 소개하고 싶다. 한국의 한 대학교에서 영어를 오랫동안 가르쳐 한국사회의 구조에 한국인 못지않게 익숙한 그는, 다른 서구인들을 만날 때마다 한국 대학의 설립자 중심의 운영방식이나 마름과 머슴의 관계를 방불케 하는 교수·학생의 관계를 열성적으로 비판하곤 했다. 그러나 자신의 연구를 위해 한자가 섞인 어려운 자료를 해석해야 할 때마다, 그는 빠짐없이 한국 학생들을 불러 번역을 시켰다. 그것이 한국에서 관례이기도 하고, 나중에 학생에게 그 ‘충성도’에 따라 유학이나 취직을 좀 도와주면 되지 않느냐는 것은, 한국인보다 더 한국적인 그 외국인 교수의 변명이었다. 그리고는 “과연 민주적이냐”는 질문에, 그는 으레 “비민주적인 지역에서 민주적으로 살면 손해 아니냐”고 반문했다. 그에게 있어서 민주주의는 보편적인 이상이나 진리가 아닌 ‘우리만의 전유물’이었던 것이다.

여자 화장실조차 없는 우간다 공장

현지의 전례대로 학생들에게 초법적인 요역을 부과하는 그 교수의 모습은, 많은 노르웨이 기업들이 제3세계에서 보여주는 노동관계 형태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다. 한 좋은 예로서, 노르웨이 자본과 우간다 자본이 합작으로 설립·운영하는 ‘잠보 로우제스’(Jambo Roses Ltd.)라는 한 장미꽃 재배회사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그 회사가 생산하는 아름다운 장미꽃들은 즉시 노르웨이로 직송되어 주유소, 슈퍼 등에서 널리 시판된다. 매우 저렴한 생산·운송비용과 노르웨이 물가에 비해 상당히 싼 시판가격으로, 이 사업은 노르웨이 자본의 ‘노다지’랄 수 있다. 고용 창출, 빈곤 해소 등의 긍정적인 효과를 들어, 제3세계에 대한 지원을 명분으로 삼는 노르웨이 국영개발협조국(NORAD)은 이 사업에 대한 국고 보조금을 내기도 하고, ‘모범적인 개발 프로젝트’로 크게 선전하기도 한다. 그러나 문제는, 이 ‘모범적인 노다지’의 현지 노동자에 대한 예속화·착취는, 상상을 초월한다는 것이다.

제3세계와 노르웨이 기업들간의 거래의 공정성을 감시하는 ‘노르워치’(Norwatch)라는 민간기구의 자료에 따르면, 젊은 여성이 대부분인 현지 노무자들은 서류로 된 계약서조차 없다. 계약이란 열심히 하면 계속 시켜준다는 회사쪽의 모호한 언약(?)일 뿐이다. 감독관의 요구에 순종하지 않으면 즉시 해고하는 데에 별 문제도 없다. 입사 직후의 한달 초임은 회사가 사고 등에 대한 ‘보증금’ 명목으로 특별한 계좌에 예치한다. 그러나 노무자들이 해고 이후에 그 돈을 되찾기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준법질서가 잘 잡혀 있지 않은 우간다에서는, 비록 노동자의 몫이라 해도 실제로 돈을 주는 것은 회사의 판단에 달려 있다. ‘효과적인 경영’을 위해서 회사 내에는 여자 화장실조차 없다. 멀리 있는 화장실에 보내주거나 보내주지 않는 것도 오로지 감독관의 ‘재량권’이라 한다. 하루에 11∼12시간 일하고 한달에 20∼30달러 상당의 월급을 받는 것은 우간다 기업들과 큰 차이가 없지만, 노르웨이 자본의 특징은 각 노동자의 능력을 시험해 각자에게 ‘개별적 월급’을 정해주는 것이다.

단순 육체노동에서 능력은 결국, 주문이 쇄도할 때 무보수 잔업을 시키는 감독관의 명령을 어느 정도 잘 따르느냐는 것이 된다. ‘충실성’이란 물론 경영진의 주관적인 판단이며 결국, 회사에서의 ‘생존 요령’은, 상사에 대한 맹종과 아부가 주를 이룬다. 앞서 말한 노르웨이 여학생이 그토록 조소했던 10년 전 중국의 학생운동 사회보다 훨씬 권위주의적이고 중세적인 분위기이다. 노르웨이 기업들의 진상을 밝혀주는 자료가 인터넷에 공개됐는데(www.fivh.no/norwatch/english/eng norw.htm) 제도권은 이에 대한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버마에서의 노예노동과 대량학살처럼 충격적인 사건이 생긴다면 노르웨이 자본의 문제점이 거론될 수도 있지만, 제3세계에서의 노르웨이 기업의 웬만한 비민주적 운영은 묵과된다. 국내에서는 법대로 민주주의를 지키지만, 서구 열강의 침략으로 민주적 법과 전통이 부족한 제3세계에서는 마음대로 또는 현지의 부정적 전례대로 기업을 운영해도 된다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신념 아닌 관습일 뿐

물론, 스칸디나비아 자본이 진출한 모든 나라에서 이와 같은 권위주의가 자행되는 것은 아니다. 한국과 같은 교육수준이 높고 노동운동이 비교적 활발한 준(準)주변부 국가에서는, 현지 전례뿐만 아니고 자국의 전례도 따를 확률이 꽤 높다. 문제는, 비(非)서구지역의 비민주성을 그토록 비웃는 서구사람들 상당수에게, 민주주의는 신념이기보다는 단지 사회의 한 관습일 뿐이라는 것이다. 안 지켜도 되는 그리고 안 지킬 수 있는 지역에서 그들은 민주주의와 도덕을 너무나 쉽게 용도 폐기한다. 민주적 핵심부 국가, 형식적 민주주의만 지켜지는 준(準)주변부 국가, 그리고 독재나 과두정치의 주변부 국가로 나누어진 현 세계에서, 이같은 이중기준(double standard)적 태도는 용납되는 것인가? 사회민주주의로 알려진 스칸디나비아, 그리고 주변부에 대한 그들의 비민주적 의식, 그 도덕적 모순을 극복하기는 아직 어려워보인다.

박노자/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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