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표지이야기

배신 눈물 복수, 그리고 침묵

370
등록 : 2001-08-01 00:00 수정 :

크게 작게

단 한마디의 정견도 밝힐 줄 모르는 초대대통령의 딸… 고단한 시민사회를 예고한다

사진/ 경험 부족, 정치력 부재, 지적능력 의문, 통합사고력 취약…. 메가와티가 상표처럼 달고 다닌 이미지들이다.
“최악 가운데 최선이었다.” 1999년 와히드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 시민들 사이에 나돈 말이었다. “메가와티의 사회 파괴력이 와히드의 것보다는 약하지 않겠나.” 이건 지난 7월23일 와히드를 쫓아내고 제5대 대통령에 취임한 메가와티를 두고 자카르타 시민들이 자조적으로 즐겨 쓰는 말이다.

“침묵으로 위장한 카리스마에 질렸다”

1999년 10월20일 국민협의회, 메가와티는 ‘오빠’, ‘동생’이라 부르며 철석같이 믿었던 압둘라흐만 와히드에게 쓰라린 패배를 맛봤고, 좀처럼 속내를 드러내지 않던 그는 기어이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세상에 이런 오빠가 다 있다니….” 울분을 터트렸던 메가와티는 그로부터 정확하게 21달 만에 같은 자리에서 ‘복수’의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메가와티가 지금 축배를 들 수 있다고 믿는 이들은 아무도 없다. 난파 직전에 몰린 2억5천만명을 태운 거대한 인도네시아호를 앞으로 3년 동안 끌어가야 하는 ‘선장’의 능력을 놓고 승객들이 몹시 불안해하고 있는 탓이다. 경험 부족, 정치력 부재, 지적능력 의문, 통합사고력 취약…. 메가와티가 상표처럼 달고 다닌 자신에 대한 이 부정적인 인상들을 어떻게 지우느냐에 따라 인도네시아호의 운명이 달려 있으니.

초대 대통령 수카르노의 맏딸이라는 환상이 투영된 그에게 목숨을 바치겠노라 서명한 3개의 무장 선봉대가 있는가 하면, 조건없이 열광하는 수천만명의 지지자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지금까지 드러난 특장이라고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카리스마와 정치적 본능 정도뿐이라는 사실에 시민들의 고민은 깊어지고 있다.

“침묵으로 위장된 카리스마에 질렸다.” 인권변호사로 유명한 무니르는 정치가로서 메가와티의 침묵을 오히려 부족한 경험이나 능력보다 더 위험한 요소로 꼽았다. “와히드가 지나치게 떠벌려 사태를 혼란스럽게 한 점은 있지만 적어도 언로가 열려 있었고 잘되건 못 되건 시민들이 정치의 흐름을 알 수 있었다는 점에서는 민주적인 방식으로 인정할 만했다.” 시사주간지 <템포>의 타우픽 기자도 메가와티의 침묵을 우려하고 있다. 오죽했으면 한때 시민들 사이에 “대통령은 장님이고 부통령은 벙어리다”는 말까지 나돌았을 지경이니.

7월27일은 메가와티의 오늘이 있게 한 매우 중요한 날이었다. 1996년 바로 이날, 메가와티의 민주당-투쟁파 사무실은 당시 수하르토의 골카당과 군부의 비호를 받는 청년들에게 쑥밭이 되었다. 다섯명의 메가와티 지지자들이 살해당했고 수많은 이들이 피투성이가 되었던 날이다. 그 사건으로부터 메가와티는 독재자에게 박해받는 시민들의 민주적 상징으로 떠올랐고, 5년 뒤 대통령이 되는 결정적인 토대를 마련했다. 그러나 5주기에 참석을 기대했던 지지자들에게 찬물을 끼얹고 그녀는 조용한 ‘사색’을 하겠노라 자카르타를 떠나버렸다. 물론 단 한마디 말도 없이.

쓰여진 연설문 5분 낭독에 고상한 미소뿐

되돌아보면, 1998년 5월 수하르토 독재타도를 외치며 수많은 젊은이들이 쓰러져가던 그날도 메가와티는 어김없이 침묵했다. “메가와티는 학생들의 피가 서린 열매를 앉아서 받아먹지 말라.” 당시 학생들은 분노했다. 물론 이번 와히드 탄핵정국에서도 그 침묵은 유감없이 위력을 발휘했다. 단 한마디의 사견도 정견도 밝히지 않은 채, 시간이 되자 그냥 와서 대통령자리에 앉은 셈이다.

7월23일 밤 9시30분, 부통령궁에서 열린 메가와티의 대통령 취임 첫 정견 발표장에서도 다가올 대통령의 침묵은 예고되었다. 대통령이 된 그는, 쓰여진 연설문을 5분간 낭독하고는 고상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를 떠났다. 단 한 문장의 예외도, 단 하나의 질문도 받지 않은 채. 자리를 빼곡이 매웠던 내·외신기자들은 말을 잃고 그녀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살아서 돌아올 수 없다는 악명 높은 부루섬 감옥에서 수하르토 독재의 계절을 보냈던 세계적인 저항문학가 프라모에댜가 <벙어리의 독백>을 쓰면서 온몸으로 한 시대를 떠안았다면, 메가와티는 ‘대통령의 침묵’으로 고단한 시민사회를 예고하고 있는 모양이다.

자카르타= 글·사진 정문태/ 국제분쟁 전문기자


좋은 언론을 향한 동행,
한겨레를 후원해 주세요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보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