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는 겉으로 드러나는 것만으로는 알 수 없는 경우가 적지 않다. 신문 등에 등장하는 화려하게 치장된 공적인 역사 뒤에 가려진 ‘어둠’의 관계가 종종 시간차를 두고 우리 앞에 돌연 나타나 기존의 상식을 뒤집기도 한다. 두 나라 사이의 관계가 깊으면 깊을수록, 잦으면 잦을수록 빛의 역사는 많지만 그만큼 어둠의 역사도 많은 법이다. 정부로부터 여권을 발급받고 가고자 하는 나라의 정부로부터 비자를 교부받아 비행기나 배로 국경을 넘는, 사람의 이동이 철저히 관리·통제되는 오늘날의 국경 감각과는 다른 과거가 불과 몇십 년 전에 존재했다는 사실을 통해 공적인 역사에 가려져 있는 또 하나의 역사를 상기해보자.
북행된 뒤 소식 끊긴 김동희
1960년대 베트남 파병을 거부했던 한국인은 공적인 역사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아래에 소개하는 두 한국인은 베트남전쟁 참전을 거부하고 ‘밀항’과 ‘망명’을 통해 국경을 넘은 사람들이다. 탈영, 망명으로 이어지는 두 사람의 인생 유전의 무대가 된 것은 일본이지만, 이 무대에 한국·베트남·미국·북한·쿠바가 등장한다. 두 사람에 대한 자료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한국 신문에는 미군 병사 김진수(金鎭洙)에 대한 단신 기사가 등장할 뿐이다. 일본의 국회 회의록, 운동단체의 기관지나 회고록 등 단편적인 일본 쪽 자료를 통해 두 사람의 인생 유전을 되짚어볼 수밖에 없다.
김동희(金東希)는 1965년 7월3일 부산에 있던 육군병기학교를 탈영한다. 계급은 병장이었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베트남 파병 명령을 거부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말한다. “죄 없는 베트남 사람을 죽이고 싶지 않다. 또 나를 포함한 한국군도 죽고 싶지 않다.” 그리고 8월15일 조그마한 어선에 몸을 싣고 일본 대마도로 향한다. 밀항을 택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불행히도 일본 경찰에 체포된다. 그리고 출입국 관리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약 1년의 징역형을 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복역한다. 1967년 2월19일 형기를 마치고 형무소를 나온 김동희를 기다린 것은 ‘감옥 아닌 감옥’ ‘감옥보다 더한 감옥’인 오무라 수용소였다. 나가사키에 있는 오무라 수용소는 주로 ‘강제 송환’을 위해 조선인을 가둬두려고 만든 시설이지만, 형무소보다 더한 인권유린 등으로 악명 높은 곳이다. 일본 ‘망명’을 하겠다는 그의 요구는 일본 정부의 거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에게는 한국으로 강제 송환되거나 수용소에서 기약 없는 ‘감옥 생활’을 견디는 길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결국 한국 강제 송환을 피하기 위해 북한으로 가는 길을 택한다. 일본 정부는 1968년 1월26일, 갑자기 그를 소련의 나홋카행 선박에 태워 북한으로 향하게 한다. 하지만 그가 실제로 북한에 도착했는지, 아니면 그대로 소련에 머물게 되었는지 그의 행적이 알려진 바는 전혀 없다. 오무라 수용소에 있던 그의 요구를 들어주고자 동분서주한 일본의 평화시민단체 베헤이렌(베트남에 평화를! 시민연합)을 주도한 소설가 오다 마코토의 회고록에 따르면, 1976년 10월 김일성 북한 주석과 만났을 때 그의 소식을 물어보자, 후일 “그런 사람은 북한에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고 한다. 그의 ‘북행’은 강제 송환을 요구하는 한국 정부와 ‘일본 망명’을 요구하는 일본 내 시민단체 사이에서 선택한 일본 정부의 결정이었지만, 그의 ‘북행’을 위해 실제로 일본 정부가 북쪽과 접촉을 했는지도 밝혀진 바 없다.
베트남전쟁에서 한국을 본 김진수
또 한 사람인 김진수에 대해서는 <동아일보> 1968년 1월11일치에 단신 기사가 있다. “도쿄에 있는 ‘큐바’ 대사관은 작년 4월 망명을 요구, 동 대사관에서 보호 중이던 서울 태생의 한국계 미군 일등병 케네스 크릭스(22·한국명 김진수)가 ‘잠적했다’는 사실을 지난해 12월29일 일본 외무성에 통고해왔음이 10일 밝혀졌다. 이 도망병은 서울 태생의 고아로서 열한 살 때 미국인 ‘크릭스’의 양자가 되어 도미, 5년 전 미 육군에 지원입대하여 재일 미군부대에 근무하다가 지난 66년 월남 주재 미191병기대대 특기병(타이피스트)으로 전속 근무 중, 도쿄의 큐바 대사관에 망명을 신청했던 것이다.” <경향신문>은 1968년 1월13일 일본 신문의 보도를 인용해 김진수가 “북한으로 탈주한 듯”이라는 기사를 내보냈다. 그의 미국 이름인 케네스 그릭스를 크릭스로, 그리고 스웨덴을 북한으로 보도한 것만 빼면 대체로 사실에 부합된다.
김진수는 서울 태생으로 한국전쟁에서 부모를 읽고 전쟁고아가 되었다. 미군 병사의 도움을 받아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 시민권을 얻으려고 미군에 입대하고 한국·일본의 미군기지를 거쳐 베트남에 파병된다. 휴가차 일본에 들른 그는 1967년 4월 탈영을 감행해 주일 쿠바대사관에 몸을 맡기고 쿠바 망명을 요구한다. 쿠바 정부 쪽은 망명을 받아들여 안전한 ‘일본 탈출’을 일본 정부에 요구하지만, 일본 정부는 미국 쪽의 인도 요구를 받아들여 이를 거부한다. 결국 그는 쿠바대사관을 몰래 빠져나와 당시 미군 탈영병을 지원하던 베헤이렌의 도움을 받아 소련을 거쳐 스웨덴으로 망명한다. 그의 일본 탈출은 김동희와는 달리 ‘밀항’이었던 듯하다. 김동희와 마찬가지로 그의 행적은 그 뒤에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베헤이렌 사무총장을 지낸 평화운동가 요시카와 유이치의 증언에 따르면, 망명 이후 두 번 정도 일본을 찾았고 북유럽에서 가구 무역에 종사하고 있다고 한다.
두 사람의 탈영과 망명은 모두 베트남 파병이 원인으로 작용했다. 베트남전쟁 당시 미국에서 징병을 거부한 사람은 무려 57만 명에 달한다. 이 중 2만5천 명이 기소되었고 9천 명이 유죄판결을 받았다. 전설적 권투 선수인 무하마드 알리도 이슬람교의 원리에 따라 병역을 거부해 챔피언 벨트까지 박탈당했다. 또 베헤이렌의 도움을 받아 베트남에서 탈영해 제3국으로 망명한 미군 병사도 있다. 베트남전쟁을 다룬 황석영의 <무기의 그늘>에는 미군 탈영병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따라서 미군 병사 김진수의 탈영과 망명은 분명히 특수한 사례는 아니다. 하지만 김진수의 탈영에는 베트남전쟁을 한반도 맥락에서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그의 고뇌가 자리하고 있다. 그의 일본 탈출 이후 그의 지원자들에 의해 발표된 ‘미국, 일본 그리고 세계 인민에 보내는 메시지’에서 김진수는 말한다.
그들은 왜 일본으로 갔나
“미국에서 10년 동안 살면서 나는 미국 시민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미국 군대에 들어가 일개 병사가 되어 한국·일본, 그리고 마지막에는 베트남에 파병되어 우선 남한의 참혹한 현실을 보고 동시에 왜 그렇게 되었는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베트남에서 전쟁이 가져다준 상황을 보고 만일 미국이 한반도에서 행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베트남에서도 목적을 이루려 한다면 베트남 사람들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그 미래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베트남 사람들의 고통을 목격하고 이에 가담하는 것, 미 합중국의 시민이 되는 것, 즉 실제로는 범죄자가 되는 것에 그 어떤 흥미도 희망도 품지 않게 되었”고 “지금의 미국”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탈영을 감행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을 전쟁고아로 내몬 한국전쟁의 경험에서 베트남전쟁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의 탈영과 망명은 일본이라는 무대 위에서 펼쳐졌다. 왜 그럴까? 물론 당시 앞에서 말한 베헤이렌이라는 시민단체가 존재하고 베트남 미군 탈영병을 돕는 ‘반전탈주 미군 병사 원조 일본 기술위원회’(JATEC)가 조직적 활동을 통해 이 병사들의 제3국 망명을 비합법적으로 전개했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을 가능성은 있다. 실제로 많은 미군 탈영병들은 이들 조직의 존재를 사전에 알고 탈영을 감행했다고 한다. 하지만 기록에 따르면 두 사람이 베헤이렌이나 JATEC의 존재를 탈영 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정황은 전혀 파악되지 않는다. 이들 단체의 도움을 받은 것은 모두 탈영 이후다. 그렇다면 이들을 일본으로 이끈 것은 다른 맥락에서 보아야 한다.
김동희 자신이 ‘망명 신청서’에서 “헌법 전문 및 헌법 제9조의 전쟁 포기를 규정한 평화주의를 관철시키려 노력하는 일본”이기 때문이라고 밝혔듯이 평화헌법이 이들을 일본으로 이끈 배경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무장과 무력 사용을 금지하는 일본의 평화헌법을 일본 사회가 실천에 옮기고 있었다면, 이들의 망명극은 일본에서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평화헌법은 실제로 기능하지 않았고 오히려 베트남전쟁을 위한 기지를 미국에 무한대로 제공하고 자위대가 무력을 증강하는 현실이 일본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들을 일본으로 이끈 것은 평화헌법의 이념이었지만, 이들을 일본 밖으로 내친 것도 평화헌법의 현실이었다.
인생유전에 드리운 그늘진 역사
사실 김동희는 일본에 ‘거주’할 권리가 있었다. 그는 1937년 제주도에서 태어났지만 바로 일본으로 건너와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 일본에서 거주했다. 해방 직후 다시 한반도 돌아갔지만, 제주도 4·3 민중봉기나 한국전쟁을 겪은 많은 제주도 사람들이 그러했듯이 그도 일본 ‘밀항’을 감행한다. 그의 삼형제가 일본에 거주하고 있었으니 그의 일본 밀항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재일조선인 작가 서경식의 작은아버지가 그러했듯이(<언어의 감옥에서>), 일본에서 자라난 재일조선인에게 밀항은 ‘가족이 사는 땅’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래서 김동희는 1955년 4월 밀항해 약 5년 동안 일본에서 생활한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민족학교에도 다녔고 일본 대학에도 입학한다. 하지만 경찰에 체포돼 1960년 3월 한국으로 강제 송환되었고, 다시 1962년 5월에 밀항했다가 10월에 또다시 강제 송환된다. 1965년의 탈영과 밀항은 세 번째인 셈이다. 결국 ‘가족이 사는 땅’인 일본에서 거주하려는 그의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종착역이 확인되지 않는 이들의 인생 유전에는 식민지, 4·3 민중봉기,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남북 분단이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김동희와 김진수, 두 사람을 찾고 싶다. 그래서 공적인 역사에 가려져 있는 그림자의 역사를 보고 싶다.
성공회대 일본학과 교수
1964년 제1차 베트남 파병 때 부산 시민들이 파월 장병을 환송하고 있다. 정부기록사진집
1968년 1월11일치 <동아일보> 1면에 김진수에 대한 단신 기사가 실렸다.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갈무리
성공회대 일본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