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 투쟁, 전화국을 향해…
등록 : 2001-07-25 00:00 수정 :
“팔리, 팔리….” 처음 온 외국인들이 배우는 한국말 중에 “빨리, 빨리”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해외에서 생활하는 많은 한국인들은 뭐든지 쉽고, 빨리 해야 풀리는 직성 때문에 현지인들과 예기치 않은 충돌이 발생하기도 한다.
처음 한달간 남의 집 더부살이하다가 나만의 공간을 얻었을 때 가장 먼저 서두른 일은 전화설치였다. 꿈에도 그리는 인터넷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나를 애타게 찾는(?) 고국의 그리운 동포들과 ‘빨리’ 전화 통화하고 싶었다. 마침 민간 통신회사에서 기존 설치비의 반값으로 전화 가설 신청 3일 만에 전화를 개통해 준다는 선전이 한창이었다.
이사 다음날 찾아간 동네 전화국에서 주소와 이름을 적고 신청비를 낸 다음 물었다. “언제 전화 설치 하러 나오시죠?” 전화국 직원은 태연스레 답한다. “다음 주요. 기다리세요.” 이곳 필리핀은 주 5일제 근무이니까 다음주라면 적어도 월요일부터 금요일을 말하는데, 사무실도 안 나가고 무작정 5일 동안 집에서 기다릴 수 없지 않은가. 나는 재차 물었다. “저… 월요일부터 금요일 중 언제 나오시죠?” 그제서야 직원은 서류에서 눈을 떼더니 이상하다는 듯 나를 쳐다본다. “다음주, 아마 화요일이나 수요일 정도에 나올 겁니다.” 미리 전화번호도 받은 탓에 이틀 꼬박 기다리는 거야 무슨 문제일까 싶어 나는 감사하다는 말을 몇번이나 했다. 그 직원 말은 화요일이라고 했지만 혹시나 전화 가설 직원이 왔다가 문이 잠겨 그냥 갈까 싶어 일요일에는 일주일간 식량을 미리 장만해놓기까지 했다.
그러나 난 한주일간 꼼짝없이 집에 갇혀 있어야 했다. 워낙 신청자가 몰린 탓에 그럴 수도 있겠지, 애써 위로하며 그 다음주 월요일 전화국을 찾아갔다. 두세 시간을 기다린 뒤 난 애써 웃어가며, 언제 나올 것인지 다시 물었다. 직원은 아무렇지도 않게 “다음주 기다려보세요”라고 했다. 속으로 난 “참아야 하느니라”를 되새겼다. “무슨 요일에 나오실 거죠?”라는 질문에 그는 나의 예상대로 “수요일 정도요” 하고 말한다. 끄응…. 해외 이주노동자들의 고통은 불만이 있어도 참는 것이다. 사실 돈 몇푼 책상 밑으로 주거나 ‘빽’을 쓰면 빨리 전화가 나온다는 다른 한국인들의 경험을 익힌 들은 바 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난 또 일주일을 그렇게 보내면서 혼자 별의별 공상을 다하기 시작했다. “공중전화 기다리다가 살인 일어나는 한국에서 온 나요. 전화국에서 살인사건 일어나는 거 보고 싶소?”라고 말하며 한판 붙어 볼까 생각하다가 필리핀 방식으로 좀더 느긋한 방법을 고안해냈다. 그 다음날부터 난 전화국이 열리는 매일 아침 8시, “어제도 안 나왔네요. 그럼 또 기다리겠습니다” 하고 애교있는 웃음과 함께 간단한 몇 마디 하고 돌아가는 출근 투쟁(?)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자 당황한 것은 직원들이었고 자기 일처럼 미안해했다. 그러길 일주일이 지난 어느날 아침 나를 보자마자 모든 직원들이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나 “지금 바로 집에 가보세요. 전화국에서 가설직원들이 나와 있을 겁니다”라는 것이 아닌가. 부리나케 집에 돌아와보니 차량이 두대나 나와 가설작업을 하고 있었다. 얼마 전 새로 이사를 하는 문제로 다시 전화국을 찾아갔을 때 난 그들의 반가운 미소를 볼 수 있었다. 가끔은 속도를 늦추어서 산다는 것 자체가 커다란 마음 수련이 되는 것 같다.
마닐라=나효우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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