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노동당 정부 영국 국가의료체계 개혁안 발표… 당사자들간에 찬·반 논쟁 가열
동네 병원에서 초진을 받으려 해도 며칠이 걸리고, 수술을 받으려면 길게는 1년 반이나 기다려야 하는 나라. ‘병원식사보다 들판의 풀을 뜯어먹는 것이 차라리 더 낫다’는 비아냥을 듣고, 주요 선진국 중 가장 낮은 암 치료율을 보이는 나라. 이것이 세계에서 최초로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 의료보장체계인 NHS(National Health Service)를 확립했던 영국의 현주소다.
NHS의 명예를 되찾자
시행과정에서 나타난 여러 가지 문제에도 불구하고 노동당은 NHS에 대해 각별한 애정을 갖고 있다.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처칠의 보수당 정부를 이기고 집권한 노동당 정부가 1948년에 시작한 이 국가의료체계는 세계에서 최초로 모든 국민에게 의료 서비스에 대한 보편적 접근권을 보장했다는 데 큰 의미가 있었다. 이는 미국과 구별되는 유럽의료체계의 근간이 되었다. 지금 영국에서는 그동안 국민과 언론의 단골 불평거리였던 이 국가의료체계가 도마 위에 오르고 있다. 지난 총선거에서 의료개혁을 공약으로 내걸었던 노동당 정부가 마침내 지난달 말 이 NHS에 대한 전면 개혁안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이를 놓고 영국사회에서는 의료기관과 각 이해 당사자들간의 논쟁이 불붙고 있다. 이번에 발표된 의료개혁안의 내용은 한마디로 말해서 환자가 기다려야 하는 대기시간을 줄이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환자가 원할 때 24시간 안에 의료인을 만날 수 있으며 1차 진료기관의 일반의(GP)를 48시간 내에 만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 2004년까지의 계획이다. 2005년까지는 수술 대기시간을 현재 최장 18개월에서 6개월로 단축하고 2008년까지 이를 3개월 이내로 줄이겠다는 야심찬 계획도 포함되어 있다. 이를 위해서 2005년까지 2만명의 간호사를 추가로 증원하며 7500명의 전문의와 2천명의 일반의, 그리고 6750명의 기타 의료인을 늘리고, 병상 수도 획기적으로 늘리는 것도 계획에 들어 있다. 이러한 개혁안을 뒷받침하기 위해 의료 관련 예산을 연차적으로 크게 증액하겠다고 한다. 그래서 “다시금 우리의 의료체계를 전세계가 부러워하도록 만들겠다”는 것이 토니 블레어 총리의 청사진이다. 전반적으로 의료계는 노동당의 개혁안을 환영하는 분위기다. 더 많은 예산이 의료계로 흘러들어오는 데 반대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금만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각각의 이해 당사자간에 매우 큰 입장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우선, 많은 의사들이 블레어 총리의 개혁안에 격렬히 반발하고 있다. 신규 전문의 면허 소지자는 7년 동안 의무적으로 국가의료기관에서 근무해야 한다는 조건 때문이다. 이는 국가의료체계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 많은 의사를 확보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의사들이 민간병원에서 일하는 것을 가능하면 막아야 하기 때문에 나온 고육지책이지만, 미국 못지않은 신자유주의를 추구하는 현대 영국의 의사들이 가만 있을 리 없다. 게다가 개혁안은 기존의 의사에 대해서는 이러한 의무조항에서 벗어나도록 해 의사사회 내부의 세대간 분열을 꾀하고, 일반의의 재량권을 확대해 일반의와 전공의 사이의 분열을 조장하고 있다는 지적도 들린다. 또 기존의 한정된 의료인력을 모두 가동하기 위해서 간호사들에게 퇴원 결정이나 간단한 치료를 할 수 있도록 재량권을 더 준 것도 의사들의 반발을 사고 있다. 간호사들은 반대할 이유가 없다. 다만 이렇게 될 경우 기존의 준간호사들이 대거 간호사로 임용될 텐데 그 절차가 공정해야 한다는 주문을 하고 있을 뿐이다. 분노하는 의사, 웃는 간호사
병원들은 조금 불안한 눈치다. 소비자 위주의 의료 서비스라는 명제하에 환자로 하여금 병원의 서비스를 평가하도록 해 우수한 병원에 대해서는 더 많은 자율권을, 열등한 병원에 대해서는 더 심한 간섭을 하겠다는, 경쟁요소의 도입이 이번 개혁안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회 일각에서는 또 개혁안이냐는 심드렁한 목소리도 들린다. 사실 현재의 국가의료체계는 블레어 총리가 주장하듯이 “1948년 노동당 정부가 처음으로 도입한 이래 52년 만에 진정한 개혁을 기다리는 낡은 제도”가 아니라 크게 보아도 1970년대 초반, 1980년대 후반에 보수당과 노동당 정부가 번갈아가며 땜질해온 결과물이다. 게다가 정부가 주장하는 예산증액도 전체 예산 대비로 볼 때 70년대 초반 개혁안보다 더 적기 때문에 별로 획기적이지도 근본적이지도 않다는 반론도 나오고 있다. 또 개혁의 시점을 너무 멀리 잡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보수지인 <데일리 텔리그라프>는 ‘8년을 더 기다려야 블레어의 새로운 개혁안이 현실화된다’는 제목의 기사를 1면 머릿기사로 실으면서, “21세기형 새로운 NHS를 보려면 그때까지 기다리면서 계속 노동당 정부가 집권하도록 도와주어야 하느냐”고 꼬집고 있다.
물론 이번 노동당의 개혁안에는 뉴 펭귄 영어사전이 규정하는 ‘전통 사회주의의 수정된 형식’이라는 이른바 블레어리즘에 속하는 정책들이 늘 그렇듯 노동당답지 않은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병원간의 경쟁 강화뿐만 아니라 노동당으로서는 최초로 민간병원이 존재하는 현실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블레어리즘, 후퇴와 타협
사실 그동안 국가의료체계에 대한 불만은 민간의료기관을 우후죽순격으로 늘리는 결과로 이어졌다. 원할 때는 언제나 진료와 치료가 가능하고 수준 높은 서비스를 보장받을 수 있지만 진료비는 보통 국가의료기관의 10배 이상이어서 한마디로 부자들만 이용할 수 있었던 민간의료기관은 특히 보수당 정부하에서 크게 늘어났다. 그런데 이번 개혁안에는, 만약 무슨 이유가 생겨 갑자기 수술이 취소가 된다면 28일 이내 ‘다른 의료기관’에서 수술을 받고 그 수술비를 국가가 대신 지불한다는 조항이 있다. 이는 노동당 정부가 민간의료기관들을 처음으로 인정했다는 말이 된다. 국민의 생로병사를 국가가 책임지겠다는 일념하에 모든 병원을 국유화하고 모든 의료 종사자들을 공무원으로 만들어버린 50여년 전 노동당의 패기를 생각하면 후퇴와 타협이라 할 수밖에 없다.
어쨌거나 급격히 내려가던 노동당의 인기가 지난달 말부터 간신히 올라오고 있는 지금, 옛 노동당 동지들의 이념을 또다시 훼손시킬 것을 감수하고 만든 이번 국가의료체계의 개혁안이 토니 블레어와 그의 당을 수렁에서 건져내는 마지막 구원투수가 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옥스퍼드=주미사 통신원 lamesse@hanmail.net

(사진/영국 국가의료체계가 대수술을 앞두고 있다. 독감 치료를 받지 못하고 대기중인 한 할머니)
시행과정에서 나타난 여러 가지 문제에도 불구하고 노동당은 NHS에 대해 각별한 애정을 갖고 있다.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처칠의 보수당 정부를 이기고 집권한 노동당 정부가 1948년에 시작한 이 국가의료체계는 세계에서 최초로 모든 국민에게 의료 서비스에 대한 보편적 접근권을 보장했다는 데 큰 의미가 있었다. 이는 미국과 구별되는 유럽의료체계의 근간이 되었다. 지금 영국에서는 그동안 국민과 언론의 단골 불평거리였던 이 국가의료체계가 도마 위에 오르고 있다. 지난 총선거에서 의료개혁을 공약으로 내걸었던 노동당 정부가 마침내 지난달 말 이 NHS에 대한 전면 개혁안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이를 놓고 영국사회에서는 의료기관과 각 이해 당사자들간의 논쟁이 불붙고 있다. 이번에 발표된 의료개혁안의 내용은 한마디로 말해서 환자가 기다려야 하는 대기시간을 줄이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환자가 원할 때 24시간 안에 의료인을 만날 수 있으며 1차 진료기관의 일반의(GP)를 48시간 내에 만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 2004년까지의 계획이다. 2005년까지는 수술 대기시간을 현재 최장 18개월에서 6개월로 단축하고 2008년까지 이를 3개월 이내로 줄이겠다는 야심찬 계획도 포함되어 있다. 이를 위해서 2005년까지 2만명의 간호사를 추가로 증원하며 7500명의 전문의와 2천명의 일반의, 그리고 6750명의 기타 의료인을 늘리고, 병상 수도 획기적으로 늘리는 것도 계획에 들어 있다. 이러한 개혁안을 뒷받침하기 위해 의료 관련 예산을 연차적으로 크게 증액하겠다고 한다. 그래서 “다시금 우리의 의료체계를 전세계가 부러워하도록 만들겠다”는 것이 토니 블레어 총리의 청사진이다. 전반적으로 의료계는 노동당의 개혁안을 환영하는 분위기다. 더 많은 예산이 의료계로 흘러들어오는 데 반대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금만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각각의 이해 당사자간에 매우 큰 입장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우선, 많은 의사들이 블레어 총리의 개혁안에 격렬히 반발하고 있다. 신규 전문의 면허 소지자는 7년 동안 의무적으로 국가의료기관에서 근무해야 한다는 조건 때문이다. 이는 국가의료체계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 많은 의사를 확보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의사들이 민간병원에서 일하는 것을 가능하면 막아야 하기 때문에 나온 고육지책이지만, 미국 못지않은 신자유주의를 추구하는 현대 영국의 의사들이 가만 있을 리 없다. 게다가 개혁안은 기존의 의사에 대해서는 이러한 의무조항에서 벗어나도록 해 의사사회 내부의 세대간 분열을 꾀하고, 일반의의 재량권을 확대해 일반의와 전공의 사이의 분열을 조장하고 있다는 지적도 들린다. 또 기존의 한정된 의료인력을 모두 가동하기 위해서 간호사들에게 퇴원 결정이나 간단한 치료를 할 수 있도록 재량권을 더 준 것도 의사들의 반발을 사고 있다. 간호사들은 반대할 이유가 없다. 다만 이렇게 될 경우 기존의 준간호사들이 대거 간호사로 임용될 텐데 그 절차가 공정해야 한다는 주문을 하고 있을 뿐이다. 분노하는 의사, 웃는 간호사

(사진/노동당이 제출한 의료개혁안은 의료 당사자들간의 논란을 낳고 있다. 개혁안이 통과되면 간호사을의 지위는 좀더 높아질 전망이다.)

(사진/지난 5월 16일 임금 인상 투쟁을 벌이고 있는 간호사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