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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화장실에 괴물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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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07-04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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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화장실 문을 열었더니 샤워실 바닥에, 천장에 달려 있던 환풍기 뚜껑이 떨어져 있었다. 뚜껑이 헐거워졌나? 부지런한 남자라면 즉시 뚜껑을 끼웠겠지만 어디 내가 그런가. 뚜껑을 주워 화장실 한편에 두고 잊어버렸다.

몇 시간 뒤 볼일을 보러 불을 켜고 화장실 문을 연 순간 난 태어나서 가장 무서운 광경을 목격하고 말았다. 머리는 쥐, 몸은 너구리를 닮은 무언가가 환풍기 날에 끼여 버둥거리고 있었다. 상상해보라. 하얀 천장을 배경으로 거꾸로 매달려 몸부림치며 나를 바라보고 있는 시커먼 괴물을! 그것도 가장 안전과 평화가 넘쳐야 할 장소에서. 시드니로 온 지 4년째 난 상상할 수도 없었던 상황을 맞은 것이다. 아내와 딸은 이미 안방에 피신해서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이웃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사람들을 부르는 사이 괴물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환풍기만 허허로이 돌고 있었다. 바닥엔 괴물의 것으로 추정되는 털 같은 것이 떨어져 있었다.

대체 그 괴물은 무엇이었을까? 이웃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쥐, 너구리, 오소리 등등…. 그때 한 꼬마가 “혹시 퍼슴 아닐까요?”라고 했다. 퍼슴이라? 당장 <호주 포유류 사전>을 찾아보았다. 의외로 쉽게 천장에 거꾸로 매달려 나를 바라보던 괴물의 사진과 설명을 발견할 수 있었다. 퍼슴은 오스트레일리아 토착동물의 하나로 커다란 들쥐처럼 생겼는데 원래 나무가 주된 서식처다. 야생동물이지만 위험하진 않다. 주택개발 등으로 점점 서식지가 줄어들면서 비교적 따뜻한 주택이나 아파트 옥상층 천장에서 겨울을 나는 놈들이 많다고 한다.

화장실 구석에 모셔두었던 환풍기 뚜껑을 다시 끼웠다. 공포가 게으름을 깨끗이 씻어버린 것이다. 아내와 딸은 거의 패닉 상태였다. 화장실 들어가길 무서워했다. 나도 그랬다. 화장실에 들어가면 자꾸 천장에서 뭔가 떨어질 것 같은 불안감이 느껴졌다. 세수를 하다 말고 환풍기쪽을 힐끗 쳐다보고 아무런 이상이 없음을 확인해야만 했다. 밤마다 천장 위에서 뭘 하는지 꿍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한두놈이 아닌 것 같았다. 환풍기가 돌아가면 ‘가가가각’ 하는 날카로운 금속성이 들릴 때가 많았다. 퍼슴이 이빨을 가나 아님 손톱을 가나…. 일상의 평화는 이미 무너졌다. 가장으로서 어떻게든 가정의 평화를 회복해야 했다. 시청 야생동물과에 이 사건을 신고했지만 실망스런 대답이었다. 퍼슴은 보호대상동물로 지정되어 함부로 포획하지 못한다고 했다. 퍼슴이 다친 경우 보호차원에서 포획이 가능하지만 이때도 발견지역으로부터 반지름 50m 밖으로 이동시킬 수 없다고 했다. 황당했다. 퍼슴의 생존권도 나의 주거권만큼이나 법적 보호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나의 결론은 좀 황당했지만 ‘공존’이었다. 궁여지책으로 목수를 불러 환풍기 뚜껑을 나사로 다시 조여 달았다. 퍼슴을 막기엔 어려움이 없으리라. 좀 안심이 되었다. 꿍꽝거리는 소리는 계속되었지만 참아야 했다.


몇달이 흐른 뒤 퍼슴과 나는 다시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이로 돌아갔다. 그러나 우리 가족 모두는 잘 알고 있다. 저 천장 어딘가에는 몇 마리인지도 모를 퍼슴들이 낮에는 자다가 밤이 되면 어슬렁거리고 있을 거라는 걸. 공존은 어쩌면 선택이 아니라 운명인지 모른다.

시드니=정동철 통신원 dje08085@mail.usyel.edu.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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