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동안 72명의 남자 어린이를 성추행한 ‘엽기 교사’… 한 제자의 자살로 내막 밝혀지다
6월23일 프랑스 니에브르 지방법원.
피고: 자키 케제메르(62·Jacky Kaisersmertz)
직업: 퇴직한 초등교사
판결: 18년 징역
죄명: 30년 동안 72명의 미성년자들을 성추행하거나 강간한 죄
아르노, 파트릭, 시몽, 브뤼노, 장피에르, 에릭… 공무원, 교사, 제빵사, 엔지니어, 경찰…. 이름이 다르고 직업이 다른, 30∼40대 나이의 이들에겐 공통점이 있었다. 모두 남자며, 케제메르가 한때 그들의 교사였다는 것. 그래서 그와 함께 결코 아름다운 추억이 되지 못하는, 아니 오히려 잊고 싶지만 잊을 수 없는 악몽이 된 학창 시절을 보냈다는 것. 망쳐버린 학창 시절이 아직도 정상적인 성생활을 방해하고 있지만, 그 악몽이 종결될 수 있을까 하는 한 가지 바람으로 교사의 파렴치한 행동들을 증언하기 위해 그들은 니에브르법원에 증인으로 참석했다. 벌써 10, 20년 혹은 30년 전의 일들이지만 결코 잊혀지지 않는 그 기억들을 이번에는 ‘정의’의 이름으로 속속들이 상기시켜 진술해야 하는 힘겨운 자리였다. “첫 성관계는 고역이었죠” “처음엔 접촉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교실에서, 교사의 책상 뒤에서. 그리고 언젠가부터 그는 집으로 찾아와, 내가 도와야 할 일이 있다거나 낚시하러 간다고 부모님께 말하며 나를 불러냈습니다. 주로 목요일이었죠. 그때 나는 8, 9살이었습니다. 그뒤 오랫동안 나는 남자들이 무서웠습니다. 사람들을 바로 바라볼 수도 없었습니다. 내 얼굴에 마치 그가 남긴 흔적이 남아 있어 사람들이 읽을 것만 같았습니다.” “첫사랑과의 첫 성관계는 제게 아주 큰 고역이었습니다. 그의 이미지를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일단 옷을 입고 나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처신했고, 아무런 해명도 없었습니다. 심지어 그가 제게 한 짓들이 마치 당연한 듯 여겨질 정도였죠. 그리곤 결코 지울 수 없는 낙인이 찍힌 듯한….” “처음엔 엉엉 울었어요. 하도 아파서 3일 동안 걸을 수조차 없었어요. 마치 치밀하게 준비된 놀이의 노리개마냥, 가끔씩 그는 호주머니에 돈을 넣어주기도 했어요.” 당시 적게는 8, 9살 많게는 13, 14살이었던 그들은 수업시간에, 쉬는 시간에, 방과후에, 체육시간에, 교실에서, 몇달간 혹은 몇년간 계속해서 교사로부터 성추행과 강간을 당해왔다고 진술했다. 그들 중에는 그 자리에서 난생 처음 피해사실을 진술하는 이들도 있었다. 어떻게 그런 어린 나이에 그토록 아픈 고통을 혼자서만 간직할 수 있었을까.“그래요. 죄책감을 느꼈습니다. 수치심도요. 저항하지 못한 수치심…. 치료를 받으면서도, 정신과 의사를 만나서도.” 한달에 한두번씩 3년간 계속 강간을 당했던 한 증인은 이렇게 말했다. “그가 몇 가지 시늉을 해보이며 내게 다가왔습니다. 볼펜으로….”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또다른 증인은 현재 44살이 된 중년이다. “그것을 당신에게 삽입시켰나요?” 판사의 되묻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는 그는 이제껏 아무에게도 뱉어내지 않은 자신만의 무거운 비밀을, 아직도 입술 밖으로 밀어내지 못한 채 입 속에서만 굴렸다. 죄책감과 수치심, 그로 인한 피해자들의 침묵은 케제메르가 30년 동안 파렴치한 짓을 반복할 수 있도록 한 주요 요인이다. 그렇더라도 학부모들은 아이들의 행동이나 교사의 행동에 의문을 품은 적은 없었을까? “그가 집으로 찾아올 때 가끔씩 숨기도 했지만, 그런 다음날 그는 학교에서 화가 잔뜩 나 있었고, 따귀를 내리치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늘 그를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했죠. 부모요? 엄마와 아빠는 내가 교사와 함께 방과후 활동하는 것을 오히려 만족해했습니다.” 아버지에게 성폭행당한 기억
케제메르의 무기는 바로 교사라는 신분이었다. 그 신분이 갖는 신뢰감과 권위로써 아이들을 공포에 몰아넣고, 그 공포심을 나날이 키워가 자신의 범죄가 그와 피해자 사이의 영원한 비밀이 되게끔 했다. “아무한테도 얘기하면 안 돼. 우리 둘만의 비밀이야. 그렇지 않으면 나는 감옥에 가야 해.” 반협박조로 케제메르가 한 말을 한 증인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죄의 내역이 확연해지는 상황에서 피고인을 죄인으로서보다는 인간으로 이해해보려 하는 피고인쪽 변호사는 ‘왜 그는 어린이 강간범이 되었는가’라는 문제를 밝혀보려 했다.
케제메르는 1938년 파리에서 태어났다. 전쟁상황이라 시골의 삼촌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전쟁이 끝나자 파리로 귀환했다. 엄격하고 까다로운 어머니와 알콜중독자인 아버지 때문에 집은 그야말로 엉망이었다고 그는 당시를 회상한다. 게다가 술에 찌든 아버지는 아들의 침실을 찾아와 성추행을 했다. 7살 때부터 12살까지 지루하게 계속된 일이었다. 12살이 된 어느날 “이런 짓을 하는 건 나쁘다”고 아버지에게 윽박질렀다. 하지만 그 피해자가 20살이 채 되기도 전에 가해자가 될 것이라고는 스스로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스포츠를 좋아하고, 가르치길 좋아했던 그는 체육교사 자격증과 함께 사범학교를 뛰어난 성적으로 졸업했고, 1967년 1만여명의 주민이 거주하는 프랑스의 소도시 코즌으로 발령받아 1993년 정년 때까지 한곳에서 교직생활을 했다. 재직 첫해인 1967년 첫 피해자가 생겼고 1996년까지 범행을 저질렀으니, 거기서 그는 교육서비스를 한 것이 아니라 ‘섹스서비스’를 30년 동안 강요한 셈이다.
하지만 죄인에게도 가족은 있다. “결혼을 하면 나아질 것이라고 여겼죠.” 당시 벌써 42명을 성추행했던 그는 1970년 여교사와 결혼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결혼도 그의 짐승 같은 행동을 멈추게 하지는 못했지만 그는 1973년과 1978년에 각각 아들을 얻었다. “딸이었으면 했습니다. 내가 비정상적인 행동을 하고 있다는 걸 느꼈고, 만일 아들이 생긴다면 그런 행동들을 극복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아내가 첫 임신을 했을 때, 미래를 의심하며 간절히 딸을 원했다. 하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그 아들들은 가장으로서의 케제메르를 큰 흠이 없는 인물로 간주하고 있다.
30년 동안 그는 옆동네 시청의 고문으로 초빙되었는가 하면, 담당하는 반 외에도 아이들의 체육활동 및 교외 자연활동을 전담했고, 지역인들과는 당구협회를 결성해 회장직을 역임하기도 했다. 다시 말해 존경받는 지역인물로 자리하며 아이들을 맘놓고 건드릴 수 있는 인물이 되었다. 세월과 함께 담당하는 아이들이 교체되어갔지만 그는 좀처럼 변하지 않았다.
“복합적인 감정과 함께, 그 일은 늘 제 머릿속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 지역을 연상하면 케제메르가 떠올랐죠. 하지만 그는 거침없어 보였습니다. 끔찍한 일이었지만, 아마도 그는 자신의 지위에 확신을 갖고 있었던 모양입니다”라는 한 증인의 회상처럼, 그의 명성도 그의 비밀도 그의 이중생활도 그렇게 자리를 굳혀갔고, 그는 아무도 손댈 수 없는 지역사회의 거물이 되어갔다.
자신에게 구토가 난다지만…
그렇다고 30년 내내 잠잠했던 것은 아니다. 1960대 말 한 학부모의 항의가 있었는가 하면, 1976년에는 세명의 학부모 항의가 동시에 제기되어 케제메르에 대한 혐의를 담은 편지가 교육부에 제출되고, 교육부의 지시에 의해 케제메르는 교장의 통제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교장은 교사의 어떤 행동도 금지하지 않았다. “당시 시대상황은 아이들의 의사가 지금처럼 존중되지도, 그렇다고 지금처럼 섹스를 마구 언급하지도 않았죠. 결국 아이들의 거짓말일 수도 있는 있다는 얘기죠.” 당시 교장의 진술이다. 터부인 섹스를 들먹이며 지역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들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다시 잠잠해졌다. 들통날 뻔했던 그 끔찍한 일들은 아이들을 놀라게 하지 않으려는 학부모들의 배려와 점잖게 해결(?)하려는 당시 교육계의 배려가 결부되어 아이들 사이에서 퍼지는 신빙성 없는 소문으로 축소되고 있었다. 그러고보면 케제메르는 참 운이 좋은 셈이었고, 그 운은 1996년까지 계속되었다. 1996년 12월 옛 제자이자, 당시 경찰관이었던 28살의 청년 티에리 드뱅이 피해자로서는 처음으로 그를 검찰에 고소했다. 그러나 10년도 훨씬 지난 옛일이라 그 소송은 무효가 될 뻔했다. 이듬해 1월 티에리는 장농거울에 “케제메르, 어린이 강간범”이라는 메시지를 남긴 채 자살했다. 검찰이 신중하게 조사하게 된 것은 그 직후였다. 72명의 희생자를 찾아헤매었던 방대한 조사였다.
결국 티에리의 자살이 케제메르를 법정에 서게 한 것이다. 바꿔 말해 그가 재판을 받아 그의 죄가를 치르도록 하기까지는 72명의 피해자에다 한명이 목숨을 끊어야만 했다는 얘기다. 일주일간의 재판 뒤 결국 그는 18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나의 비정상적인 행동이 피해자들에게 얼마나 많은 해를 입혔는지 인정합니다. 나를 혐오했으며, 지금도 나를 혐오하고 있습니다. 나 자신에게 구토가 다 납니다. 내가 저지른 일들을 어떻게 치유할 수 있을지 자문해봅니다. 피해자 모두에게 용서를 빕니다.” 법정에서 그는 이런 최후진술을 했다. 그러나 그의 뒤늦은 참회가 망쳐버린 어린 시절의 상처를 복구할 수 없으며, 잃은 생명을 되살릴 수도 없음은 분명하다.
파리=이선주/ 자유기고가

사진/ 집 앞에서 경찰에 체포되는 케제메르. 그는 재직기간 동안 지역유지로 대접받았다.(SYGMA)
아르노, 파트릭, 시몽, 브뤼노, 장피에르, 에릭… 공무원, 교사, 제빵사, 엔지니어, 경찰…. 이름이 다르고 직업이 다른, 30∼40대 나이의 이들에겐 공통점이 있었다. 모두 남자며, 케제메르가 한때 그들의 교사였다는 것. 그래서 그와 함께 결코 아름다운 추억이 되지 못하는, 아니 오히려 잊고 싶지만 잊을 수 없는 악몽이 된 학창 시절을 보냈다는 것. 망쳐버린 학창 시절이 아직도 정상적인 성생활을 방해하고 있지만, 그 악몽이 종결될 수 있을까 하는 한 가지 바람으로 교사의 파렴치한 행동들을 증언하기 위해 그들은 니에브르법원에 증인으로 참석했다. 벌써 10, 20년 혹은 30년 전의 일들이지만 결코 잊혀지지 않는 그 기억들을 이번에는 ‘정의’의 이름으로 속속들이 상기시켜 진술해야 하는 힘겨운 자리였다. “첫 성관계는 고역이었죠” “처음엔 접촉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교실에서, 교사의 책상 뒤에서. 그리고 언젠가부터 그는 집으로 찾아와, 내가 도와야 할 일이 있다거나 낚시하러 간다고 부모님께 말하며 나를 불러냈습니다. 주로 목요일이었죠. 그때 나는 8, 9살이었습니다. 그뒤 오랫동안 나는 남자들이 무서웠습니다. 사람들을 바로 바라볼 수도 없었습니다. 내 얼굴에 마치 그가 남긴 흔적이 남아 있어 사람들이 읽을 것만 같았습니다.” “첫사랑과의 첫 성관계는 제게 아주 큰 고역이었습니다. 그의 이미지를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일단 옷을 입고 나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처신했고, 아무런 해명도 없었습니다. 심지어 그가 제게 한 짓들이 마치 당연한 듯 여겨질 정도였죠. 그리곤 결코 지울 수 없는 낙인이 찍힌 듯한….” “처음엔 엉엉 울었어요. 하도 아파서 3일 동안 걸을 수조차 없었어요. 마치 치밀하게 준비된 놀이의 노리개마냥, 가끔씩 그는 호주머니에 돈을 넣어주기도 했어요.” 당시 적게는 8, 9살 많게는 13, 14살이었던 그들은 수업시간에, 쉬는 시간에, 방과후에, 체육시간에, 교실에서, 몇달간 혹은 몇년간 계속해서 교사로부터 성추행과 강간을 당해왔다고 진술했다. 그들 중에는 그 자리에서 난생 처음 피해사실을 진술하는 이들도 있었다. 어떻게 그런 어린 나이에 그토록 아픈 고통을 혼자서만 간직할 수 있었을까.“그래요. 죄책감을 느꼈습니다. 수치심도요. 저항하지 못한 수치심…. 치료를 받으면서도, 정신과 의사를 만나서도.” 한달에 한두번씩 3년간 계속 강간을 당했던 한 증인은 이렇게 말했다. “그가 몇 가지 시늉을 해보이며 내게 다가왔습니다. 볼펜으로….”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또다른 증인은 현재 44살이 된 중년이다. “그것을 당신에게 삽입시켰나요?” 판사의 되묻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는 그는 이제껏 아무에게도 뱉어내지 않은 자신만의 무거운 비밀을, 아직도 입술 밖으로 밀어내지 못한 채 입 속에서만 굴렸다. 죄책감과 수치심, 그로 인한 피해자들의 침묵은 케제메르가 30년 동안 파렴치한 짓을 반복할 수 있도록 한 주요 요인이다. 그렇더라도 학부모들은 아이들의 행동이나 교사의 행동에 의문을 품은 적은 없었을까? “그가 집으로 찾아올 때 가끔씩 숨기도 했지만, 그런 다음날 그는 학교에서 화가 잔뜩 나 있었고, 따귀를 내리치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늘 그를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했죠. 부모요? 엄마와 아빠는 내가 교사와 함께 방과후 활동하는 것을 오히려 만족해했습니다.” 아버지에게 성폭행당한 기억

사진/ 소송을 제기하고 무산될 위기에 처하자 자살한 케제메르의 제자 티에리 드뱅(사진 오른쪽).(SYGM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