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난민 신청한 이라크 쿠르드인 핫산 최초 인터뷰…미국의 이라크 경제제재는 쓸데없는 짓
“정말 말이 하고 싶었습니다.”
두 시간 이상 듣기조차 괴로운 그의 ‘증언’을 듣고난 뒤, “그래서 당신이 원하는 게 무엇이냐”라는 질문을 하자, 그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이렇게 말했다. “원하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단지 내 얘기를 들어줄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결국 눈시울을 붉히고 말았다. 오랫동안의 ‘침묵’은 그의 영혼을 갉아먹고 있었다.
핫산(가명)은 국내 체류중인 유일한 이라크 쿠르드인이다(그는 이라크에 남아 있는 가족의 신변을 걱정해 이름과 나이를 밝히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쿠르드인 마을 카네킨에서 자랐으며, 바그다드에서 대학을 마치고 수의사로 일하고 있던 ‘엘리트’였다. 그러나 결국 ‘공포’를 이기지 못하고 요르단으로 탈출한 뒤 한국 비자를 받았다. 그렇게 그는 전세계 1200만 난민 중 한 사람이 되었다.
오잘란 사태를 통해 터키의 쿠르드인들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져 있지만, 이라크 내 쿠르드인들의 삶은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다. 후세인 정권에 의해 현지 취재가 엄격히 봉쇄돼 있기 때문이다. 후세인은 국내 위기상황 때마다 쿠르드인에 대한 인종차별을 적절히 이용했다. 이라크 북부는 국제협약에 의해 구르드인 보호지역이 설정돼 있다. 그러나 핫산처럼 거주지역 바깥에 살고 있는 쿠르드인들에게는 무차별적인 체포와 고문, 죽음의 공포가 일상화되어 있다.
“어디에도 구원은 없습니다.” 핫산은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치밀한 감시와 통제로 자국에서의 인권운동은 불가능한 실정이고, 자국 이익을 챙기기 바쁜 미국이나 서방에 기대는 것도 허망할 뿐이다. 이라크 쿠르드인의 참상을 알리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이다. 그러나 희망은 거기에서 시작한다. 핫산은 다음 세대의 젊은이들 중 누군가가 일어설 것이라고 힘주어 이야기한다. 그들을 기다리며 핫산이 그렇게 하고 싶었던 말은 무엇일까.
-이라크 쿠르드인들의 상황을 간략히 설명해달라.
=1970년 무스타파 바르자니가 쿠르드 독립운동을 이끌며 이라크 정부와 자치주를 완전히 인정하는 협약을 맺었다. 이는 계속적인 투쟁의 성과였다. 그러나 1975년 후세인은 쿠르드운동을 도와주던 이란과 알제리협정을 맺었다. 그 협정의 내용은 쿠르드인들의 독립운동을 막기 위해 이란에게 일부 쿠르드 거주지역을 포함한 영토를 내주는 것이었다. 그뒤로 쿠르드인의 투쟁은 완전히 봉쇄됐다. 1980년에는 쿠르드 젊은이들을 이란으로 내쫓았다. 1983년에는 바르자니의 지지자들을 강제수용소로 보냈다. 가장 참혹한 학살은 1988년에 일어났다.
-1988년의 학살은 꽤 알려진 사건인데, 도대체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인가.
=그해는 이란-이라크 전쟁이 끝나고 정권이 ‘희생양’을 찾던 때다. 이라크군은 국제협약을 어기고 쿠르드인 거주지역 안에 있는 도시인 하랍자를 점령했다. 하랍자에 살던 대부분의 쿠르드인들이 남부로 강제이주당했는데, 돌아오지 않았다. 간신히 살아남은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대부분 생매장당했다는 것이다. 하랍자를 점령할 때 이라크군은 독가스마저 사용했다(그러나 이라크 정권은 부인하고 있다). 어린이들과 부녀자마저 독가스에 중독돼 처참하게 죽어갔다.
-국내 상황이 불안할 때마다 후세인은 쿠르드인들을 탄압하는 것 같은데, 걸프전이 끝났을 때는 어떠했나.
=1991년에 내 집 마당에도 군인들이 쳐들어왔다. 그리고 내 집도 헬리콥터 공격의 타깃이 됐다. 당시 200만명의 쿠르드인들이 두려움을 못 이겨 이란으로 도망갔다.
-이란으로 이주한 쿠르드인들의 삶은 어떤가.
=그리 좋지 않다. 물론 이라크에서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사는 것보단 낫다. 그러나 경제적 궁핍에 시달리고 있고, 인종차별도 여전하다. 심지어 이란에서 숨진 쿠르드인 어린아이는 매장할 곳을 찾지 못해 결국 내 고향 카네킨으로 옮겨 장례를 치렀다.
-후세인이 또다시 이라크 영토 내 쿠르드인 마을이나 쿠르드인 거주지역을 공격할 것이라 보는가.
=물론이다. 그는 반드시 다시 쳐들어올 것이다. 내 고향 카네킨은 이라크군의 공격으로 거의 파괴됐다. 남은 사람들은 텐트를 치고 산다. 후세인은 쿠르드인 마을을 미제가 점령하고 있으니 파괴해야 한다고 선전한다.
-당신도 체포되어 고문당한 적이 있는가.
=있다. 대학 시절 공원에 놀러갔을 때였다. 이라크 경찰이 내 신분증을 보더니 쿠르드인 마을인 카네킨 출신이란 이유만으로 경찰서로 끌고갔다. 그곳에서 3일 동안 고문을 당했다. 고문 때문에 다리가 부러졌다.
-단지 쿠르드인이란 이유만으로 그랬단 말인가.
=그렇다. 다른 어떤 이유도 없었다. 불심검문하다 쿠르드인이면 무조건 연행한다. 이라크에서 우리는 외계인이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인간이 가져야 할 권리를 누려본 적이 없다.
-쿠르드인들의 권익을 위한 국제적인 조직이 있다고 알고 있다. 그 조직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현재 여러 개의 분파로 나뉘어 있다. 그 분파 중 가장 큰 것이 KDP와 PUK이다. 두 분파의 차이는 별로 없지만 KDP가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하다면 PUK는 좌파적인 성향이 강하다. 나도 대학 시절 몰래 KDP에 가입한 적이 있다. 그러나 각국에 흩어져 있는 쿠르드인들의 다른 상황, 다른 문화 때문에 서로 세력다툼이 치열하다. 솔직히 말하면 상황이 어렵다. 그러나 희망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더 강해져야 하고 더 군사적으로 조직돼야 한다. 제발 서로 싸우지 않았으면 좋겠다.
-현재 미국과 유엔은 이라크에 경제제재를 가하고 있다. 경제제재가 후세인을 압박하는 데 도움이 되는가.
=전혀 아니다. 오히려 후세인은 경제제재를 교묘히 이용해 자신의 권력기반을 다진다. 도대체 왜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해서 민중만 고통받게 하는지 모르겠다.
-서방이 당신들의 인권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나.
=그렇지 않다. 그들은 기회적이고, 정치적이며 자국의 이익이 있을 때만 움직인다. 문제는 우리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데, 정말 어려운 일이다.
-이라크를 탈출한 직접적인 계기는.
=고립감이었다. 정권의 탄압은 점점 심해졌고, 난 체포당할 것 같은 위기감을 느꼈다. 내가 대학에서 KDP에 가입하는 등 여러 가지 비밀활동에 참여했다는 걸 그들이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러면 왜 상대적으로 정권의 힘이 미치지 않는 쿠르드인 거주지역으로 가지 못했나.
=쿠르드인 거주지역이라고 안전한 곳은 아니다. 게다가 그곳은 이라크 경찰의 감시가 심했고, 남아 있는 가족들을 남기고 도망칠 수는 없었다.
-당신은 쿠르드인만의 국가를 원하는 건가.
=우리만의 국가는 그저 꿈일 뿐이다. 유일한 대안은 이라크가 좀더 민주화되고 인권을 생각하는 국가가 되는 것이다. 나는 다음 세대의 젊은이들을 믿는다. 그들은 우리의 권리를 위해 영원히 싸울 것이다. 그러나 그건 총을 들고 싸우는 것은 아니다.
-후세인이 물러나면 좀더 상황이 좋아질 것이라 생각하나.
=분명 상황은 훨씬 나아질 것이다. 그러나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다. 후세인은 반드시 국제전범법정에 가야 한다. 쿠르드인 학살만으로도 죄는 충분하다. 미국은 모든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전혀 책임을 묻지 않는다.
-이라크 국회에도 쿠르드인 의원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어떻게 생각하나.
=그들은 선거에 의해 선출된 사람이 아니라 후세인에게 고용된 사람이다. 그들은 높은 임금과 좋은 집, 차를 제공받고 후세인의 정책을 찬양한다. 대부분의 쿠르드인들은 그들을 증오한다.
-한국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내가 이라크에 있던 시간은 악몽이었다. 나는 ‘신이여, 우리의 말, 우리의 고통을 들어주는 사람이 왜 없습니까’라고 묻곤 했다. 나는 한국사람들이 쿠르드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줬으면 좋겠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가 겪고 있을 고통을. 그것뿐이다.
-당신은 한국 정부에 난민신청을 했다. 만약 한국 정부가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 생각인가.
=지금 내게 다른 선택은 없다. 나는 인권을 존중하는 한국 국민들을 믿는다. 한국은 내 신청을 받아들여줄 것이다.
유현산 기자 bretolt@hani.co.kr

사진/ 1988년 이라크군의 하랍자 침공 당시 독가스에 의해 숨진 쿠르드 어린이들.

사진/ 수의사일을 하고 있는 핫산.(사진 왼쪽) 그는 가족의 신변을 염려해 최근 사진 공개를 꺼렸다.

사진/ 이라크군에 의해 황폐화된 핫산의 고향마을 카네킨. 멀리 군사용 건물이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