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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정치인이 먼저 커밍아웃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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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07-04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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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 아래서 치러진 성대한 동성애축제… 커밍아웃한 베를린 시장은 ‘스타 정치인’

사진/ 지난 6월16일 함부르크에서 시작된 올해 CSD 행사는 8월4일까지 독일 10여개 도시에서 진행된다.
비가 간간이 내리던 지난 6월23일 토요일 오후, 베를린 하늘 위로 무지개가 시원스럽게 떠올랐다. 그 아래로 테크노음악이 쩌렁쩌렁 울려퍼지면서 거대한 행렬이 움직이고 있었다. 1969년 뉴욕의 ‘크리스토퍼 거리’에서 일어난 동성애자들의 궐기를 기념하는 이번 행사에 사상 유례없는 규모인 50만명의 인파가 몰려들었다. 80여대의 퍼레이드차량 위에선 세계 각지에서 몰려든 동성애자들이 현란하게 춤을 추고 있었다. 거리는 온통 호루라기를 불며 흥에 겨워하는 젊은이들, 연인들과 유모차를 끌고 꼬마아이들 손을 잡고 찾아온 ‘가족’들이 함께 어우러져 있었다. 초등학교 딸아이와 함께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며 무언가 열심히 귓속말을 주고받는 어머니들의 모습도 눈에 띄었다.

베를린 동성애자들이 극우파에 맞선다

잠시 비가 흩뿌릴 때면 동성애를 상징하는 무지개 빛깔 우산들이 거리를 수놓았고, 그 밑으로 행진하던 이들과 구경나온 이들이 자연스럽게 미끄러져 들어갔다. 이 장면을 지켜보던 노부부의 대화가 귓가를 스쳤다. “사실 저 사람들이 무슨 나쁜 짓을 한 건 아니지!” 구경인파 중 가방에서 준비해온 샴페인과 잔을 꺼내 축배를 나누는 레즈비언 쌍도 눈에 들어왔다. 사진을 찍으려고 하자 수줍어하면서도 행복해하는 이들의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다. 베를린 경찰 소속 동성애자들은 차량 한대에 올라타 대열에 합류했고, 그뒤를 ‘버스 및 지하철노조’ 동성애자들이 시민들에게 ‘노선 안내도’를 나눠주며 따랐다. 집권 녹색당도 이미 15년 전 ‘커밍아웃’한 연방 국회의원 2명과 최근 광우병과 구제역 파동을 수습하며 최고의 인기(인기도 3위)를 누리고 있는 연방 농무부 장관이 차량 위에서 연신 시민들에게 손을 흔들어대고 있었다.


올해로 23주년을 맞는 베를린의 ‘크리스토퍼 거리 기념일’(Christopher Street Day, 약칭 CSD)이 처음부터 이 같은 축제의 장이었던 것은 아니다. 80년대만 해도 고작 3천여명의 동성애자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요구하며 베를린 거리에 나섰고, 이들은 경찰과 빈번한 충돌을 일으켰다. 사회적 분위기도 그리 녹록하지 않았다. 69년까지 동성애는 미풍양속을 해치는 죄로 처벌의 대상이었다. 84년에는 독일군 장성이 동성애자라는 비난 속에 군복을 벗어야 했다. 녹색당 국회의원 벡(Beck)은 87년 커밍아웃 이후에도 콜 정부 내내 “벡씨 부부 내외” 앞으로 보내진 공식만찬 초청장을 받아야 했다. 이는 천주교 신부에게 부부동반으로 참석해달라는 초청장을 보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개인의 삶의 양식을 완전히 무시하는 처사였다고 벡 의원은 회상한다.

커밍아웃으로 정적들을 놀라게 해

사진/ 맨 왼쪽이 벡 의원, 가운데 레즈비언으로 커밍아웃한 칼스 의원, 맨 오른쪽이 크나스트 연방 농무장관.
그러나 이 기념일 행사를 매개로 동성애 조직들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었고, 이들의 정치적 영향력도 점차 증대하고 있다. 현재 동성애자들에 의해 발간되는 주간지도 전국적으로 20여종에 이르고 있다. 특히 올해 행사는, 동성애자들이 외국인에 이어 극우 신나치 폭력의 희생자가 되고 있는 현실을 반영한 듯, “베를린 동성애자들이 극우파에 맞선다”라는 슬로건으로 진행되었다. 슈뢰더 총리도 이에 대한 공감을 표명하며 축전을 보냈고, 연방국회의장은 직접 폐막행사에 참석했다. 그는 “아직도 일부 지역에서는 동성애자들이 손가락질을 받고 있습니다, 바로 지금이 동성애에 대한 선입관을 깰 수 있는 가장 좋은 때입니다”라며 오는 8월부터 발효되는 ‘동성애 결혼 합법화’ 법안의 의미를 강조했다.

이날의 행사는 보베라이트의 등장으로 절정을 이루었다. 스피커에서 그의 이름이 흘러나오자 50만명의 인파가 열광하기 시작했고, ‘스타’를 맞이하는 환호는 쉽게 그칠 줄 몰랐다. 보베라이트(45)는 지난 6월16일 선출된 임시 베를린 시장이다. 그는 재정파탄으로 불신임을 받아 물러난 보수 기민당 출신 시장의 뒤를 이어 ‘과도 정부’를 이끌고 있으며, 올 가을 예정된 재선거에 사민당 후보로 출마하게 된다. 무엇보다도 2주 전 사민당 후보 수락 연설에서의 극적인 커밍아웃은 그를 이날의 ‘영웅’으로 만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나는 동성연애자입니다. 누가 뭐라 해도 떳떳합니다!”라는 선언에 1천여명의 사민당 당원들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그의 ‘용기’에 갈채를 보냈다. 그의 커밍아웃은 다음날 독일 신문 1면을 장식하였다. 그가 공식석상에서 커밍아웃을 한 자체는 물론이고 그가 ‘슈불’(schwul)이라는 단어를 선택한 것은 모든 이들의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것이었다. 남성 동성애자를 지칭하며 공식적으로 사용되는 ‘호모’라는 단어와 달리, 그가 선택한 ‘슈불’라는 표현은 ‘싸구려 창녀’라는 어원을 가진 다소 동성애자를 비하하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그의 발언은 곧 유행어가 되어 젊은 층을 중심으로 빠르게 퍼져나갔고, “나는 슈불이다. 그것은 좋은 것이다!”(Ich Bin Schwul, Das Ist Gut So!)라는 문구가 적힌 티셔츠가 날개돋친 듯이 팔려나갔다. 폐막식 행사장에서도 이 티셔츠를 입은 사람들의 물결이 새로운 베를린 시장의 커밍아웃에 화답했다.

그의 커밍아웃은 이렇게 사회적 반감보다는 놀라움과 열광으로 이어지고 있다. 보수적인 신문들마저 가급적이면 이를 중립적으로 다루려는 모습이 역력하다. 베를린의 우익 황색 일간지 <베체트 BZ>도 “베를린은 지금 ‘똘레랑스’를 시험받고 있다”라며 이번 일에 대한 도덕적 논의를 스스로 차단했다. 즉 동성애 자체를 비판의 대상에서 제외시킨 것이다. 정치적 반대파들도 우호적인 여론을 의식한 듯, 동성애를 베를린 시장의 사적인 성생활의 문제로 제한하면서, 애써 관심 밖의 일로 치부하고 있다. 한 기민당 시의회 의원은 이번 커밍아웃은 ‘훌륭한 승부수’였다고 인정하면서, 한편으로 자신은 보베라이트가 동성애자임을 이미 알고 있었음을 넌지시 밝혔다.

사실 베를린의 정치인과 기자들 사이에서 그가 동성애자라는 것은 공공연하게 알려진 사실이었고, 기민당 시장 후보는 보베라이트가 “파트너십이 없다”고 비판함으로써 동성애문제를 선거 쟁점으로 끌고갈 것을 예고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동성애자라는 사실 그 자체가 아니라, 그가 선택한 커밍아웃의 시기와 표현 등이 정치인과 언론의 허를 찔렀던 것이다. 물론 보수적 지지자들의 이탈이 우려되나, 그의 용기와 솔직함에 감동받은 젊은 층의 지지표가 이를 충분히 상쇄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통일 이후 10년이 넘게 바닥을 헤매던 사민당 지지율이 그의 커밍아웃 직후 수직상승하고 있다. 커밍아웃 이전부터 그는 차기 독일 총리 후보군에 포함되고 있어서, 만약 그가 오는 가을 선거에서 승리한다면 독일인들은 동성애자 총리를 곧 만나게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커밍아웃 직후 몰려든 기자들에게 힘주어 말했다. “나는 동성애자를 위한 정치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한명의 동성애자로서 정치를 하는 것이다!”

레즈비언에겐 아직도 굳센 장벽

사진/ 크리스토퍼 거리 기념일 동안 베를린 시청에는 동성애를 상징하는 무지개 깃발이 게양되었다. 독일 관청에 무지개 깃발이 게양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지금까지도 협박 편지에 시달리고 있다고 고백하는 녹색당의 벡 의원은, “이제 커밍아웃을 위한 분위기가 무르익었습니다. 사회 저명인사들이 이에 앞장서야 합니다”라며 동성애문제의 사회적 관심과 논쟁의 확대를 호소했다. 또한 동성애는 더이상 감추어야 할 비밀이 아니라고 강조하며, 보베라이트 베를린 시장의 커밍아웃을 자기 자신에 대한 존중을 이뤄낸 것이라고 평가한다. “보수주의자들은 동성애를 언제나 ‘성’의 문제로 치부하죠. 그러나 이는 부차적인 문제입니다. 동성애자라는 사실은 사회적 약자에 속한다는 것이고 이 약자에게 가하는 피해와 차별이 중요한 문제입니다”라며 벡 의원은, 커밍아웃을 억압과 차별에 대한 저항의 자기표현이라고 설명한다. 사민당 중앙사무처장도 최근 기자회견을 통해, 베를린 시장을 모범삼아 정치인이 먼저 커밍아웃할 것을 호소하고 있다. “이를 통해 신뢰를 구축할 수 있으며, 더이상 쑥덕거림도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라며, 커밍아웃이 더이상 ‘연예계 화제’로 다뤄져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행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거리에서 만난 한쌍의 레즈비언은 말한다. “요즘 호모들의 커밍아웃은 뭔가 유행처럼 멋져 보이기도 하죠. 하지만 레즈비언들은 아직까지 오래된 선입관과 싸워야 합니다.” ‘너희들이 아직 제대로 된 남자(?)를 만나지 못해서 그래’라는 말은, 동성애자가 인구의 10%에 달한다는 독일에서도 레즈비언들이 만나게 되는 편견이다.

베를린=글·사진 강정수 통신원 jskang@web.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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