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교육받은 군부 엘리트들의 참전 결정…그뒤 타이군 병력 3년 새 두배나 증강
50년 전 왜 타이군이 한국전쟁에 참전했던가.
이런 의문을 품는 타이 시민은 거의 없다. 기껏 몇몇 역사학자나 참전군인을 빼고는. 한국전쟁과 관련된 책이나 자료들도 시민들이 손쉽게 만질 만한 거리에는 없다. 사회가 총체적으로 망각한 일을 50년이 지난 지금 대답을 구한다는 일이 무모하게까지 여겨지는 게 정직한 느낌이다.
용맹스러운 군대 ‘작은 호랑이’
우선 군부독재가 기승을 부리고 냉전이 휘몰아치던 1950년대 타이사회를 살펴보자. 당시 타이군의 남한 파견을 결정했던 극소수 군인 엘리트들은 공산주의 북한의 침략 저지를 결의한 국제연합에 기여한다는 정당성을 내세웠던 것으로 보인다. “국제연합의 어떤 결정이든 우리는 자유민주주의국가임을 과시하기 위해 국제연합에 협조해야 하고, 특히 주변 공산주의국가가 우리를 침략했을 때를 대비해 한국에 군대를 파견한다.” 당시 정치와 경제를 쥐고 흔들던 사라신 총리의 이 기록은 한국전쟁을 읽는 타이 군부의 시각과 타이군의 파견목적을 암시하는 거의 유일한 자료다.
타이의 한국전쟁은 실질적으로, 21개국으로 구성되었던 국제연합군에 타이가 지상군과 공군, 해군을 파견했던 1950년 10월부터 시작되었다. 타이군은 북한군에게 큰 타격을 입혀 미국과 국제연합으로부터 ‘작은 호랑이’란 별명을 얻으며 용맹스러운 군대로 이름을 떨쳤다. 의료지원단도 나름대로 명예를 얻었다. 이들은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자유메달을 받은 것을 비롯해 국제연합의 각종 상들도 받았다.
타이군은 전투뿐만 아니라 4만t의 쌀을 다른 연합군에게 지원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나는 전투기 조종사였으나 실제 주임무는 C47 다코타로 쌀을 비롯한 물자를 남한 전역에 보급하는 것이었다.” 프라못 베룻타마사니 전 공군 총장의 회상은 이어졌다. “나는 국제연합이 주도하는 공산주의 척결에 참여했다. 그건 동시에 한국전쟁의 불길이 타이로 흘러넘치는 것을 방지하게 위한 일이기도 했다.” 이게 바로 그동안 수백만명의 타이학생들이 교실에서 배워온 그 유명하고 간단한 한국전쟁의 원리기도 했다.
그리고 50년이 지난 오늘날, 프라못과 한국전쟁 참전자들은 1년에 한번씩 모임을 갖고 있다. 프라못은 몇몇 동료 조종사를 한국전쟁에서 잃었지만, 그 자신은 살아남아 국제연합과 타이 정부의 명예훈장을 받은 뒤, 타이 왕자의 조종 교관이 되기도 했다고 지난 시절을 자랑스럽게 말하고 있다.
사라신과 프라못 같은 엘리트 군인들의 한결같은 대답이었던 “만약 공산주의국가가 우리 타이를 공격한다면 누가 우리의 방위를 도와줄 것인가”에 대해 극소수의 역사학자들만이 의문을 제기해왔던 것이 타이의 한국전쟁이었다. 폰피몬 치엥쿨 같은 역사학자들이 그들인데, 그는 전투병의 한국전쟁 파견을 미국의 대아시아전략에 따른 타이사회 내부의 정치구조에서 찾고자 했던 대표적인 인물이다.
폰피몬은 당시 냉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미국의 지원을 받으며 기꺼이 미국의 하부구조 노릇을 자처했던 극우보수 타이 정부의 성격에 초점을 맞춰왔다. “타이가 군인사회로 변신하는 데는 합동미군지원사령부(JUSMAC)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미국은 무기와 물자를 지원하며 타이군의 성장을 도모했고, 그 결과 1951년 4만5천명이던 타이군이 3년 만인 1954년에는 두배 가까운 8만여명으로 폭증했다.” 말하자면 한국전쟁에 군대를 파견한 피의 대가로 얻은 타이 군부의 이익인 셈이다. 미국 입장에서는 사회민주주의 색채를 띠었던 ‘퉁명스런’ 정부들보다 자유민주주의를 내건 타이가 훨씬 장사하기 편한 상대였음에 주목했다는 뜻이다.
폰피몬이 해석한 미국식 제3세계 통제방식과 전투병 파견의 연관성은 미국의 교육정책에 집중되어왔다. “학비 대주며 똑똑한 아이들 데려가서 미국식 이데올로기를 주입시킨 뒤 다시 타이로 돌려보내 이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타이를 통제하는 수법인데, 이게 바로 당시 군인 엘리트들이 한국전쟁에 전투병 파견을 결정하는 데 중대한 작용을 했다.”
그냥 스쳐가버린 바람, 바람
그러나 타이사회에서 한국전쟁을 뒤집어보는 이런 비주류의 소리에 귀기울이는 시민들은 거의 없다. 전쟁을 겪은 한국의 통일은 아직도 요원한데 타이의 한국전쟁은 아무런 저항감 없이 일찌감치 통일된 상태다. 그저 자유민주주의 남한의 완전한 승리를 제공하지 못한 아쉬움 정도만 남아 있을 뿐. “한국은 한 나라 한 민족이다. 만약 맥아더 장군의 말을 들었더라면 결코 두 나라로 나눠지는 일은 없었을 것인데… 트루먼 태통령의 단견 탓으로.” 참전군인 프라못 전 공군 총장의 한국전쟁 읽기 정도가 타이의 수준이라는 말이다.
수많은 타이 젊은이들을 전장에 집어넣고 목숨을 앗아갔던 그 50년 전의 한국전쟁, 아무도 돌보는 이 없는 가운데 타이의 한국전쟁은 처음부터 어둠 속에서 시작해서 이미 오래 전에 역사의 저편으로 넘어갔다. 마치 소설 같은 고대사처럼. 증인도, 역사책도, 논쟁도, 한국전쟁과 관련된 그 무엇도 현재 타이사회에 남은 것은 없다. 한국 탓인지 타이 탓인지도 우리는 알 수가 없다.
한국전쟁, 그냥 스쳐가버린 바람이었다.
프라윗 로자나프룩(Pravit Rojanapruk)/ <더 네이션> 기자

사진/ ‘작은 호랑이’타이군. 50년11월7일 부산항에 도착한 타이군은 4천여명의 육·해·공 혼성부대로 의정부·금화·철원에서 전투를 치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