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로 심판받은 학살의 주역들은 몇이나 될까… 국제법적 상설기구 국제형사재판소 설립 시급
지난 50년 동안 숱한 반인류적 전쟁범죄가 저질러졌어도 처벌은 거의 없었다. 아시아의 베트남과 캄보디아, 아프리카의 시에라리온, 모잠비크, 라이베리아, 중미의 엘살바도르 같은 곳에서 부녀자들을 포함한 수많은 민간인(비전투원)들이 죽임을 당했지만, 그에 대한 단죄는 이뤄지지 않았다. 제2, 제3의 또다른 전범자들이 나타나는 걸 막기 위해서라도 그들을 확실하게 사법처리할 필요가 있다. 그러러면 한시적인 특별법정이 아닌, 국제법적 상설기구로 국제형사재판소(The International Criminal Court·ICC)가 출범해야 한다.
당사국 국내법으론 손도 못 대
전범재판 하면 2차세계대전 마무리로 나치전범과 일제전범들을 사법처리한 뉘른베르크법정과 도쿄법정을 떠올린다. 그러나 그때뿐이었다. 집단학살과 조직적 강간, 인종청소 등을 가리키는 전쟁범죄는 그것들이 일어난 당사국 국내법으로는 제대로 처벌되지 않았다. 캄보디아가 그 한 보기다. 영화 <킬링 필드>로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1975년부터 79년까지 캄보디아에서는 크메르루주군을 이끌었던 폴 포트 정권의 손에 200만명 가까운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지금 캄보디아 실력자 훈센 총리는 유고, 르완다 같은 특별법정 설치를 반대하면서 전범들을 국내법으로 다스리겠다는 고집을 부리고 있다. 훈센 자신도 한때 크메르루주군의 지역사령관 출신이다.
인도네시아도 전쟁범죄자들에 대한 처리를 제대로 하지 않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1999년 동티모르에서는 인도네시아로부터의 분리독립을 반대하는 일단의 친인도네시아 민병대원들이 동티모르 독립을 결정한 국민투표 직후 살육과 방화를 저질렀다. 그때 1천명가량의 민간인들이 죽임을 당한 것으로 알려진다. 동티모르 난민들을 돕던 유엔 난민고등판무관(UNHCR) 소속 실무자 3명도 무참히 죽었다. 당시 유엔 실무자들은 칼에 찔리고 돌에 맞아 죽은 뒤 거리로 끌려나가 불에 태워졌다. 국제적 구호기관 요원들이 이처럼 엽기적으로 살해된 일은 아프리카에서조차 일어나지 않았다. 동티모르의 정신적 지도자인 카를로스 벨로 주교는 “학살 주범을 다스리기 위해 르완다, 유고와 같은 전범재판소를 설치해야 한다”고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에 호소한 바 있다.
동티모르에서 저질러진 잔학행위에 관련돼 기소돼야 할 용의자는 400명쯤이고 이 가운데는 배후지원 혐의가 따르는 인도네시아 장군들도 여러 명 손꼽힌다. 이들 전쟁범죄자들을 처벌하라는 국제적인 압력에 견디다 못한 인도네시아 와히드 정권은 지난 4월 특별법을 만들어 이들에 대한 재판을 시작한 바 있다. 그러나 5월 초에 열린 인도네시아 특별법정은 3명의 친인도네시아 민병대 간부들에게 고작 16개월에서 20개월 징역형을 선고했을 뿐이다. 이들 피고인들에 대한 기소내용도 ‘학살’이 아닌 ‘집단난동’이었다.
전쟁범죄에 대해 오늘날 국제사회가 제재를 가하고 있는 제도는 국제전범재판소다. 현재 르완다내전, 보스니아를 비롯한 발칸내전에서 저질러진 범죄행위에 대한 특별재판이 진행되고 있다. 보스니아내전(1992∼95년)에서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정권의 지원을 받았던 세르비아계가 저지른 전쟁범죄 행위는 인류사에서 수치로 기록된다. 세르비아계에 맞섰던 회교도(통칭 보스니악)들과 크로아티아인들은 집단수용소에 가둬진 채 고문과 학살을 당했고, 많은 부녀자들이 조직적 강간에 희생됐다. 1995년 6월 회교도들이 집단학살당한 스레브레니차의 비극은 발칸내전에서 저질러진 전쟁범죄 가운데 으뜸이다.
한없이 허약한 국제전범재판소
문제는 보스니아내전에서 전쟁범죄를 저지른 자들 가운데 상당수를 지금껏 붙잡지 못했다는 점이다. 현재 헤이그 유고전범재판소(ICTY)에 수배돼 있는 도망자는 모두 38명. 이들 가운데 주범격인 라도반 카라지치(전 보스니아 세르비아계 지도자), 군 사령관 라트코 믈라디치도 들어 있다. 보스니아의 세르비아계 공화국인 스르프스카지역에 숨어 있는 카라지치는 추종자들의 보호 아래 때로는 보스니아 수도 사라예보에까지 나다닌 것으로 알려진다. 미국은 밀로셰비치에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카라지치와 그의 군사령관 믈라디치 체포에 500만달러의 현상금을 걸어놓은 상태다. 카라지치 체포는 발칸전범 재판의 핵심이다.
탄자니아 아루샤에 자리한 르완다전범재판소(ICTR)는 94년 투치족을 상대로 인종청소범죄를 저지른 자들을 법정에 세워왔다. 법정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 두터운 방탄유리로 방청석과 피고석을 갈라놓고 있다. 피고인들은 방탄복을 입은 채 법정에 선다. 그들의 입을 막기 위한 살인범죄에 대비해서다. 방탄유리로 된 증인석은 두터운 커튼이 둘러쳐져 있다. 보복을 막기 위해 신원을 비밀로 한다. 르완다내전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는지는 아직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은 상태다. 그저 80만명으로 미루어 짐작하는 정도다. 학살은 조직적으로 방대하게 이뤄져 불과 석달 만에 그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고 알려진다. 가해자는 후투족이고 희생자의 대부분은 투치족이지만, 학살에 비판적인 후투족 온건파들도 일부 희생됐다.
ICTR에 쏟아지고 있는 비판은 “ICTR이 비효율적으로 움직여왔다”는 것이다. 94년 11월 출범한 뒤 지금껏 7년이 다 지나도록 겨우 8명을 사법처리했을 뿐이다. 영향력 있는 연구기관인 국제위기그룹(International Crisis Group·ICG)은 최근 ‘늑장부리는 정의’란 이름의 한 보고서를 통해 이를 비판하면서, 단지 8명을 판결한 것은 “통탄할 만한 기록”이라고 꼬집었다. ICG의 이 보고서는 “르완다재판소는 9명의 판사가 연 예산 9천만달러를 소비하면서 무능과 관료적 내분으로 수렁에 빠져 허우적댄다”고 지적했다. 9명의 판사 가운데 5명은 지난 1년 반 동안 재판을 열지 않았고, 다른 1명의 판사는 28개월 동안 법정에 얼굴을 내민 적이 없다는 것이다. 재판이 끝난 8명 가운데는 94년 인종학살 당시 후투족 출신으로 총리를 지냈던 장 캄반다도 포함된다. 캄반다 총리는 인종학살로 국제법의 단죄를 받은 최초의 총리로 기록된다. 현재 ICTR 법정에서는 35명 피고인에 대한 재판이 진행중이고, 또다른 20명이 인종학살 용의자로 기소된 상태다. 피고인들 가운데는 후투족 출신의 정치인, 관리, 언론인, 의사 심지어 목사도 있다.
베트남 참전 미군부터 심판대에 올려라
전쟁범죄와 관련한 국제법 이론에선 “전쟁범죄를 포함한 인권침해사건에 대해서는 법적 시효에 관계없이 진실을 밝히고 책임자를 처벌해야 한다”는 것이 정설이다. 지구촌 곳곳의 여러 전쟁에서 학살에 책임있는 자들을 가려내 처벌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그래서 힘이 실린다. 베트남전도 그 한 보기다. 1975년 사이공 함락과 더불어 막을 내렸지만, 지금까지도 전쟁범죄 논의가 그치지 않는다. 미국 뉴욕에 본부를 둔 국제적인 인권감시단체 HRW(Human Rights Watch)는 지난 5월 도널드 럼스펠드 미 국방장관에게 “베트남전에서 미 군사정책이 전쟁범죄를 저지르도록 부추겼는지를 조사해야 마땅하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전 상원의원 밥 케레이가 69년 베트남전 참전 당시 메콩 삼각주에서 민간인들을 학살했다는 뒤늦은 양심선언을 하고 난 한달 뒤다. 케레이는 당시 총격전이 벌어졌다고 밝혔지만, 현지의 생존자들은 아무런 총격전도 없이 미군들이 민간인을 학살했다고 주장한다. HRW는 만일 이 경우에 전쟁범죄가 증명된다면, 당사자들이 기소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케레이 전 상원의원의 양심선언은 양심선언이고 그것이 곧 면죄부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시각에서다.
프랑스도 알제리 독립전쟁 당시 프랑스군이 저지른 잔혹행위 때문에 전쟁범죄 논의에 관한 한 자유롭지 못하다. 지난 5월 프랑스 검찰은 알제리 정치범들을 고문하고 죽였다는 사실을 털어놓은 한 퇴역장성 폴 오사르세의 처리를 놓고 고심한 적이 있다. 알제리 독립전쟁과 관련한 모든 범죄행위는 이미 일괄 사면되었기 때문이다. 담당검사는 비록 그가 전쟁범죄를 저질렀다고 인정하더라도 기소되지는 않을 것이라 밝혔다. 오사르세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알제리 독립전쟁 당시 프랑스군이 고문행위와 살육을 저지른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치안 유지를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말썽을 빚자 프랑스 국방성은 그에 대한 징계절차를 밟고 있는 중이다.
전쟁범죄자로 팔레스타인쪽에서 비판받아온 인물이 아리엘 샤론 이스라엘 총리이다. 지난 6월17일 영국 는 아리엘 샤론이 전쟁범죄자로 기소될 가능성을 내비치는 다큐멘타리 화면을 내보내, 이스라엘 정부로부터 거센 항의를 받았다. 샤론 총리는 지난 82년 당시 이스라엘 국방상으로서, 레바논의 사브라와 샤틸라 두 팔레스타인 난민수용소에서 수백명의 난민들이 친이스라엘 민병대원들에게 무참히 학살당한 데 대한 책임이 있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이 사건이 일어난 뒤 이스라엘 조사팀은 샤론이 학살사건을 막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렸고, 샤론은 국방상 자리에서 물러났다. 는 국제법 전문가의 견해를 빌려, “샤론 총리가 82년의 학살사건 탓에 언젠가는 전쟁범죄자로 기소될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했다. 지난해 9월 이래 500명을 넘긴 팔레스타인 희생자들을 떠올리면, 샤론은 언젠가 1982년과 2001년 그가 개입한 행위들로 말미암아 피노체트와 비슷한 처지가 될지 모른다.
전범이 총리가 된 이스라엘?
전쟁범죄 논쟁은 미국-이라크 사이에도 신경전 수준을 넘어선 것으로 비쳐진다. 미국 상원은 지난 5월 사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을 ‘전쟁범죄자’로 규정하는 상징적인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라크는 지금껏 기회있을 때마다 미국 정치지도자들에게 91년 걸프전쟁과 그뒤를 이은 경제제재를 ‘이라크에 대한 범죄행위’라고 규탄해왔다.
세계화에 걸맞게 전범재판은 국경을 가리지 않는다. 칠레 군부독재자 아우구스토 피노체트가 스페인법정의 요청에 따라 지난 98년 영국에서 구금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칠레로 돌아온 뒤로도 피노체트는 73년 미 CIA의 지원을 받아 저지른 군사 쿠데타와 관련범죄행위 탓에 시달리고 있다. 피노체트 재판의 불똥은 헨리 키신저(전 미 국무장관)에게도 튀었다. 지난 5월 파리 리츠호텔에 머물던 키신저는 파리의 한 판사로부터 “칠레에서 일어났던 쿠데타에서 키신저와 미국 정부가 행한 역할과 관련해 조사할 것이 있으니 사무실로 와달라”는 요지의 통보를 받았다. 키신저는 선약을 핑계대고 서둘러 이탈리아로 떠났다. 이보다 앞서 아르헨티나의 한 판사는 일련의 정치적 살인사건 조사를 위해 키신저에게 증언을 요구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이같은 움직임들은 전쟁범죄를 포함한 인권침해사건에 대해선 법적 시효에 관계없이 진실을 밝히고 책임자를 처벌해야 한다는 당위적인 요구가 높아가고 있음을 말해준다. 현재 진행중인 국제형사재판소 설립도 이같은 요구에서 비롯된 것이다. 98년 이탈리아 로마에서 빛을 본 ICC는 지금껏 33개국이 비준했다. 그러나 비준국이 60개국을 넘어서야 형사법정 구성이 가능해진다. 이를 위해선 앞으로 2년을 더 기다려야 하는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현재 최강국인 미국이 반대하고 있다는 점이다. ICC가 정식 출범할 경우 미국인은 전세계 어느 곳에서든 기소될 수 있다. 한미행정협정의 독소조항이 바로 미국인 범죄자를 함부로 기소할 수 없도록 규정해놓은 것임을 감안하면, 미국이 ICC 구성을 반대하는 배경을 짐작할 수 있다. 미국은 올해 초 클린턴 당시 대통령이 서명했으나 미 공화당은 “ICC 출범으로 미국의 주권이 침해될 가능성이 있다”며 반대하는 입장이다. 상원의 비준 반대로, 클린턴이 서명한 서류는 서랍 속에서 잠자는 처지다.
ICC 체제가 출범하면 르완다나 발칸처럼 굳이 특별법정을 설치하지 않더라도 전쟁범죄 같은 반인륜적 범죄를 다스릴 수 있다. 국내정치적 이유로 전범자들을 단죄하는 걸 미루거나(캄보디아와 유고), 국가체제 붕괴로 그들을 처리할 능력이 없는 경우(르완다)를 떠올리면, ICC 설립이 바람직하다. 한편으로 국제법 전문가들은 ICC가 전쟁범죄를 막는 효과를 갖는다는 점을 강조한다. ICC라는 국제법적 기구는 어떤 무장세력 지도자도 반인류적 범죄행위에 면죄부를 받을 수 없고 언젠가는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는 논리다.
김재명/ 분쟁지역 전문기자 kimsphoto@yahoo.com

사진/ 학살당한 동티모르 주민. 당시 유엔 실무자들까지 칼에 찔리고 돌에 맞아 죽었다.(GAMMA)

사진/ 2차대전 뒤 전범처리를 위해 열린 뉘른베르크법정.(SYGMA)

사진/ 도쿄법정.(SYGMA)

사진/ 현 이스라엘 총리 아리엘 샤론도 전범의 멍에를 벗을 수 없다.(SYGMA)

사진/ 보스니아내전 학살의 주범인 라도반 카라지치. 보스니아의 세르비아계 공화국인 스르프스카지역에 숨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SYGM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