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표지이야기

19억 시간을 돌려다오

365
등록 : 2001-06-27 00:00 수정 :

크게 작게

응급실 초과노동에 제동걸고 나선 독일 의사노조… 경기침체 뒤 해고노동자들의 소송제기 봇물

사진/ ‘노동자는 괴로워.’ 지난해 말부터 독일경제가 침체기에 접어들며 노동자들의 초과근무 문제가 불거지고 있다.
응급실에 실려와 수술대 위에서 사투를 벌이는 환자 한명을 생각해보자. 그는 결코 이미 30시간 가까이 업무대기중인 의사로부터 수술을 받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선택권은 그에게 있지 않다. 다만 수술을 집도하는 의사가 막 업무교대를 마치고 일을 시작한 생생한 상태이기를 바랄 수밖에.

산산이 부서진 8시간 노동

최근 독일의 한 방송프로에 의하면 20시간 이상 대기상태에 있는 의사의 집중력은 법적으로 운전이 금지된 음주상태의 집중력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한다. 짐짓 병원의 의사들이 다시 보이는 순간이다. 통계에 의하면, 독일 의사들은 2000년 한해 동안 추가수당과 보상휴가 없는 5천만 시간의 추가근무에 시달렸다. 특히 젊은 의사들은 한번 응급실에 투입되면 대기시간을 포함 30시간의 응급실업무를 담당해야 하기 때문에 신체적, 정신적으로 한계에 다다른 상태이다. 그러나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다. 지난해 10월 유럽법정은 대기시간을 업무시간으로 규정하라는 스페인 의사노조의 손을 들어주었다. 연이어 지난 4월 독일 고타시의 응급실 전문의가 제기한 소송에서 유사한 판결이 나왔다. 의사노조도 ‘공공의 착취’에 대항하여 광범위한 법적 투쟁을 올해 과제로 설정하고 있어, 병원 당국과의 갈등이 예견되고 있다. 이미 대부분의 법률 전문가들이 의사들의 승리를 예견하고 있는 터라, 사실상 병원쪽의 업무시간조정이 현실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분위기이다. 그러나 이에 따른 비용상승과 의사수요의 급격한 증가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가 과제로 남아 있다.


사진/ ‘숨쉬는 공장’이라는 정책을 통해 해고를 줄이고 초과근무를 없앤 폴크스바겐 공장.
독일의 노동시간법에는 “노동자는 하루 8시간을 초과하여 일해서는 안 된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예외적인 경우에 한하여 하루 최대 10시간의 노동시간을 인정하고 있으나, 이 초과분은 6개월 이내 유급휴가를 통해 보상되어야 한다. 이를 위반할 경우 최고 3만마르크의 벌금이, 그리고 위반이 반복될 경우 실형까지 받을 수 있다. 물론 이를 위반하여 실형을 받는 경우는 드물다. 노동자쪽의 고발이 있을 경우에만 정부의 ‘작업장 감독위원회’가 이를 조사하여 검찰에 송부하는 절차를 밟기 때문이다. 즉 고발과 정부의 사실증명 노력이 없다면 ‘1일 8시간’조항은 무늬만 엄격할 뿐 지켜지지 않는 조항이 되고 만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추가노동문제가 커다란 사회적 문제가 되지 않았다. 경제여건이 좋았고, 이에 맞춰 급여도 후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2000년 말 독일경제에 조금씩 먹구름이 드리우면서 상황이 반전하게 된다. 해고된 노동자들은 부당한 추가노동을 강요했던 회사를 상대로 고소장을 제출했다. 노조도 90년대 들어 증가된 노동유연화정책이 노동강도를 심화시켰고, 이는 인내의 한도를 넘어섰다며 대규모 법률 자문단을 구성, 개별 사업장 노조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최근 노르트라인 베스트팔렌 주정부가 발표한 통계에 의하면 2000년 19억 시간의 불법 초과노동이 이루어졌고, 법률이 규정한 대로 하루 평균 8시간을 일한 노동자는 전체의 15%에 지나지 않는다.

해고와 초과근무가 없는 작업장

특히 독일의 최대 기업인 다임러 크라이슬러는 2000년 한해 동안 수천회 법률을 위반했다는 비난 속에 법원의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 지난해 가을 관리직 800명을 해고하면서 고발이 줄을 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현실을 의식한 듯 이사회는 지난 5월 간부들에게 “직원들을 정확한 시간에 귀가시키십시오. 초과노동으로 문제가 발생할 경우 이에 대한 모든 책임을 당신이 져야 합니다”라는 공문을 발송했다. 또한 노조와 하루 최대 10시간, 평균 8시간의 노동시간에 합의하고 이에 맞는 작업모델을 개발하고 있다. 다임러 크라이슬러와 비교되는 모범적 기업으로는 폴크스바겐을 꼽을 수 있다. 폴크스바겐은 지난 94년 기업의 위기를 맞아 주당 28.8시간 근무제를 도입해 해고 대신 모든 노동자의 일자리를 지킨 경험이 있다. 물론 경제호황이 지속되던 동안 폴크스바겐 공장에서도 초과노동은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그러나 최근 다시 자동차 경기가 나빠지자 다임러는 해고조치를 포함한 경비절감정책을 전개한 반면, 폴크스바겐은 일명 ‘숨쉬는 공장’이라는 이름의 즉각적인 초과근무 철폐정책으로 모든 노동자의 일자리를 유지하고 있다.

베를린=강정수 통신원 jskang@web.de


좋은 언론을 향한 동행,
한겨레를 후원해 주세요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보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