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수로 찾은 ‘중재자 노릇’… 왜 남한에 경도돼 참전했는지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아
비동맹노선을 주도했던 인도는 냉전 최초의 무장충돌이었던 한국전쟁에서 어떤 역할을 했던가. 서방과 동구권 사이의 분단을 거부한다던 네루 총리의 선언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이며, 인도는 한국전쟁을 통해 어떤 영향을 받았던가. 인도의 이런 의문들은 한국전쟁 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대답없는 역사로 남겨져 있다. 분명한 건, 한국전쟁에서 인도도 미국과 함께 북한을 ‘침략자’로 규정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남한에 의료지원단을 파견했다. 그러면서 인도는 한국전쟁과 휴전기를 통틀어 남북한 사이의 중재자 노릇을 했다.
돌이켜보면 정치적 의식을 지닌 인도 시민들은 2차세계대전의 종전이 주축국을 격파했다는 사실로서보다는, 탈식민주의의 가능성을 제공했다는 데 더 큰 의미를 부여해왔다. 그래서 독립 인도의 지도자들은 식민주의자들을 몰아내는 일뿐만 아니라 독립과 자유를 위해 투쟁해온 세력들을 모아 민족국가를 건설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서방을 인정하며, 서방과 대비되는…
그 무렵 인도의 ‘비동맹노선’은 새로운 독립국가들에게 국제정치의 활로를 제공했고, 동시에 네루 총리가 주창했던 이른바 ‘혼합경제’는 서방 자본주의와 동구 사회주의진영의 상이한 경제논리를 하나로 묶는 경제모델로 시험대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이 비동맹노선과 혼합경제를 서방이 날카로운 ‘대립각’으로 이해하면서 국제사회에 냉랭한 긴장이 흐르기 시작했다. 물론 제3세계 많은 국가들과 시민들 사이에는 비동맹노선의 주도국으로써 인도가 강하게 인식되는 시절이기도 했고.
당시 시도와 실패를 통해 불안정하게 시험되던 인도의 비동맹정책은 한국전쟁으로부터 최초의 가혹한 시련을 맞이하게 되었다. 인도는 한국전쟁에서 서방의 논리를 인정하면서 동시에 서방과 대비되는 모습을 취하고자 애를 썼고, 결국 그 ‘묘수’로 찾은 것이 ‘중재자’ 노릇이었던 셈이다. 남한 지원 부분에서도 인도는 전투병 대신 적십자형태의 의료지원단을 파견함으로써 군사·정치적 동기가 아님을 분명히 하면서 서방과 대비해 큰 신경을 썼다. 이런 모순된 시간 속에서 인도의 제한된 비동맹운동은 한국전쟁에서 현저하게 공간을 상실해갔다. 당시 인도의 이해는 미국이 주도하는 서방의 입장과 일치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그렇다고 확실하게 서방의 입장을 옹호할 수도 또는 반동구 입장을 취할 수도 없는 매우 모호한 상태로 한국전쟁에 접근했다.
일찌감치 인도는 공식·비공식적으로 독립 초기부터 네루 총리의 정치철학에 따라 식민통치에서 벗어난 한국을 완전한 자격을 갖춘 하나의 독립국가로 인정했다. 인도의 정치지도자들은 흉폭한 일본식민주의자들에게 고초를 겪어온 한국의 식민전체주의를 부정하며 토지소유권을 포함한 모든 해방 요소를 독립군에게 넘겨주기를 바랐다. 인도의 이런 입장은 자유주의로 상징되던 루스벨트 행정부가 선호했던 신탁통치라는 제도보다 훨씬 완전한 형태의 권력이양을 의미했다.
“당시 식민주의자들은 피식민지배자들이 자치정부의 운영술을 배워야 한다고 믿었다.” 인도의 저명한 한국전문가이자 네루대학 교수인 크리슈난의 지적이다. “당시 식민주의자들은 ‘일본의 손에 의한 한국의 노예화’를 인정했던 1943년 테헤란선언을 내세워 한국에 대한 완전하고 즉각적인 자치를 선호하지 않았다. 처칠이 자치의 약속을 내세워 그 정당성을 권유하던 가운데….” 이런 인식의 차이가 연합군 내부에서 해소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2차대전이 끝나고 인도는 미국과 소련이라는 두 승리자가 한국에 새롭게 배치되는 ‘행복한’ 위장 현실을 인정하도록 압박당했던 셈이다. 인도 당국자들은 1940년대 후반 모스크바-워싱턴협정으로 한국 사안의 모양새가 갖추어진 것으로 믿으며, 한국의 재건을 위한 국제연합임시한국위원회에 참여했고, 남한 단독선거 실시를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머리’보다 ‘심장’이 더 큰 영향 끼쳤다
크리슈난에 따르면 당시 인도 정부의 입장은 완전한 토지개혁과 즉각적인 정부이양을 요구하는 북한 인민위원회의 요청보다는 남한에 일방적으로 경도되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초대 국제연합임시한국위원회 의장을 지낸 메논의 회고는 당시의 한국 상황을 읽는 좋은 밑감이 되고 있다. “한국과 관련된 당시의 모든 정황은 ‘머리’보다 ‘심장’이 더 큰 영향을 끼쳤다.”
이렇게 1940년대 후반부터 혼미한 상태에 빠져들었던 한국의 상황 속에서 인도는 1950년 6월25일 전면적인 한국전쟁을 맞이했다. “한국문제를 위한 국제연합인가 아니면 국제연합을 위한 한국문제인가?” 당시 유명했던 이 말은, 국제연합이 신생독립국 한국의 분단을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이며 어떻게 개입해야 할 것인가를 놓고 깊은 고민에 빠졌던 일을 잘 대변해주었다. 이 무렵 인도에서는 과연 북한의 ‘침략’이 명백한가 논란이 일면서, 북한의 전면적인 공격이 불가능하다는 상황논리와 함께 동구권에 대한 동정심이 널리 유포되기도 했다.
특히 파니칼 굽타 같은 이들은 “남한의 침공이 오히려 그 반대의 경우보다 더 설득력이 있다”는 주장을 폈다. 이 과정에서 한국전쟁은 인도 국내 정치에도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한국전쟁은 인도 정치판에도 새로운 분단과 이분법을 제공한 것이다. 민족운동진영이 이때부터 민족주의 색채 강화로 집권한 의회당과 야당인 공산당으로 나눠지는 결정적인 계기를 맞았다. 공산주의 운동가들이 인도의 독립과정을 ‘수치’라고 부르며 남부지역 텔렝가나를 중심으로 무장투쟁에 돌입하자, 의회당은 공산주의자들이 독립과 국가건설의 여론을 파괴시키는 불법 해방논리를 퍼트린다며 무력진압에 나섰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공식문건이건 사적 통신문이건 당시의 기록들이 모두 분실되어 아직도 그 시점의 역사를 유보적으로 다루는 것이 인도 학계의 일반적인 현상이다. 심지어 네루 총리가 당시 인도 공산주의자들의 철학을 공유했는지 또는 한국전쟁을 어떻게 보았는지 같은 중대한 부분조차 확인할 길이 없다. 결국, 당시 국제연합안보리 의장국이었던 인도가 북한의 침공을 저지하기 위한 ‘경찰행위’를 인정한 국제연합결의안 투표에 왜 참여했는지조차 정확한 배경을 알 수 없는 실정이다.
그러나 어쨌든, 인도는 곧 미국이 주도하는 군사작전을 통한 남한 지원이라는 현실 앞에서 스스로의 분별력에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그 한 단계로, 대만에서 중국인민공화국쪽으로 신임장을 돌려 논쟁에 휩싸였던 당시 베이징 주재 인도 대사 파니칼은 한국전쟁 발발 한달 뒤인 7월부터 “중국의 이익보장 없이는 한국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며 중국과 한국의 연계론을 주장하고 나섰다. 그리고 즉각 인도는 중국과 서방진영 사이에서 중재자를 자처했고, 1950년 말부터 인도의 자세는 한층더 비동맹노선에 적합한 모습을 갖춰가기 시작했다. 따져보면 이보다 앞선 6월의 국제연합안보리 투표 뒤부터 인도는 이미 자세 수정을 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무엇보다 비동맹노선을 주창했던 인도로서는 7월 국제연합이 결의한 남한에 대한 군사 지원의 정당성을 스스로 확보할 수 없었던 것이 당시의 고민이었던 셈이다. 따라서 인도는 적십자와 같은 형태를 지녔던 야전구급대를 ‘한국 전체의 평화를 위해’라는 명분을 걸고 남한에 지원할 수밖에 없었다.
치명적 고민거리를 해결하다
“한국의 미래는 한국인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어떤 형태가 되든 내가 지금 할말은 없다.” 네루 총리도 선언을 통해 지나친 외세의 개입을 부정하는 인도의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인도는 한국전쟁에서 비동맹노선을 유지하기 위해 이중적인 태도를 취하며 서방과 중국 사이에서 중재자라는 ‘직함’을 스스로 개발했고, 한편으로는 서방과 동구권 그리고 제3세계 신생국가들을 모두 안심시키기 위해 ‘미국의 옷을 걸치고 비동맹 잔치판’를 벌인 셈이다. 그리고 매우 다행스럽게도 결국 인내와 인내심이 성공적으로 상봉을 해주면서 인도의 한국전쟁은 ‘괜찮은’ 모습으로 끝을 맺게 된다.
사실 1953년 7월27일 판문점의 휴전협정은 1952년 12월3일 국제연합총회에서 인준한 인도 양식의 한국전쟁 해법 초안에서부터 출발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인도는 중립국송환위원회의 중책을 맡은 뒤, 3천여명의 보호군을 파견해서 전쟁포로들의 본국 송환작전을 주도했다. 이 일로 인도는 비동맹노선의 주축임을 국제사회에 각인시키는 행운을 얻었다. 말하자면, 인도에게는 치명적인 고민거리가 되었던 한국전쟁 개입이 오히려 비동맹노선을 성숙한 운동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결정적인 디딤판으로 작용했던 셈이다.
프라풀 비드와이(Praful Bidwai)/ 전 <타임 오브 인디아> 편집장·핵 전문 칼럼니스트

사진/ 1953년10월 북한에서 송환돼온 유엔군 포로의 석방문서에 사인을 하고 있는 인도관리군 장교. 인도는 중립국송환위원회의 중책을 맡았다.

사진/ 미 항공모함 갑판에서 헬리콥터를 타고 판문점으로 향하는 인도군.

사진/ 판문점에서 열린 중립국 포로송환위원회. 가운데 서류를 든 이가 인도의 티마야 장군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