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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길 잃은 팬암기 폭파범 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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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0-08-16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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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비아 용의자들에 대한 영·미 수사당국 증거는 억측인가

(사진/“재판에서 모든 것이 밝혀져 리비아에 대한 제재도치가 철회돼야 한다.”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됐던 알메그라히(오른쪽)와 피마(왼쪽)는 현재 무죄를 주장하고 있다.)

“깡패국가 사람들은 모두 테러리스트 개연성이 있다.” “증거도 없이 편견에 의해 예단하는 것이 테러 아닌가?”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에서 남쪽으로 40㎞ 떨어진 옛 미군기지 캠프 자이스트. 이곳에서는 지난 5월 이후 살인, 살인 공모, 항공안전법 위반 등 혐의로 기소된 압델바세트 알리 모함메드 알메그라히(48)와 알아민 칼리파 피마(44) 등 2명의 리비아인에 대한 재판이 진행중이다. 88년 12월21일 영국 스코틀랜드 상공에서 일어난 팬암 항공기 폭파 사건과 관련된 재판이다. 이 사건은 모두 270명이 사망한 최악의 항공기 테러사건이었다.

논란의 정점, 폭탄의 시한장치

영국과 미국의 수사당국은 오랜 조사를 통해 1만5천여명을 만났고 이 과정에서 18만여건의 증거를 확보했다고 주장한다. 리비아, 독일, 몰타, 스웨덴, 미국, 스코틀랜드 등 1천명 이상의 증언을 수집해 증거로 제출했다.


그러나 사건의 진실은 오히려 미궁 속에 빠져들고 있다. 이들 2명의 용의자가 유죄판결을 받을지 조차 확실치 않다. 심지어 이번 사건을 진두지휘해온 주임검사도 재판에서 패배할 가능성이 크다며 지난 2월 사퇴했다. 제출된 증거들의 객관성 논란은 물론, 사건 동기와 배후에 대해서도 단서를 잡지 못하면서 오히려 미국과 영국에 의한 증거 조작설이 제기되고 있다. 만약 용의자들이 무죄판결을 받는다면 미국과 영국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검찰쪽이 제출한 증거를 둘러싼 논란의 한가운데에 놓인 것은 유죄를 단정할 만한 유일한 물적 증거로 꼽히는 폭탄의 시한장치이다. 문제는 이 증거물이 사고발생 한참 뒤 현장에서 25㎞나 떨어진 곳에서 발견됐다는 점이다. 일각에서는 리비아에 죄를 뒤집어씌우기 위해 시한장치를 그곳에 갖다 놓은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또 용의자 2명이 리비아 정보요원이라는 증언도 신빙성에 무리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미국에 망명한 리비아 전직 테러리스트의 증언이 유일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용의자들도 완강히 자신들의 무죄를 주장하고 있다. “재판에서 모든 것이 밝혀져 7년간 리비아에 330억달러에 달하는 대가를 치르게 한 제재조치가 완전히 해제되기를 기대한다”고 이들은 말하고 있다.

미국은 사건 발생 뒤 처음에는 이란을 용의국가로 지목했다가, 얼마 뒤에는 팔레스타인을, 나중에는 리비아를 지목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구체적인 증거는 없었다. 그럴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었다. 이들 국가는 미국이 인정하는 테러지원국(조직)이고, 게다가 미국에 앙심을 품을 만한 사건의 피해자들이라는 점이 부각되었다. 로커비 사건이 일어나기 전인 그해 7월3일 미 해군함 빈센스호는 이란 민항기를 전투기로 오인, 미사일을 발사해 격추시킴으로써 290명의 사망자를 냈다. 미국은 이란이 그 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직접 테러를 저질렀거나 최소한 팔레스타인 테러조직에 팬암기 폭파를 청부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다가 얼마 뒤 사건 현장에서 25km 떨어진 한 지점에서 폭탄의 시한장치 하나가 발견되었다. 이것이 리비아 테러리스트들이 사용하는 것과 같다는 점을 들어 배후 혐의는 리비아로 돌아섰다. 그 뒤 폭탄이 들어 있던 가방이 처음 실린 몰타 공항에 근무하던 용의자 두명이 범인으로 지목됐다. 이들의 범행 동기는 86년 미국의 리비아 트리폴리와 벵가지 공습에 대한 보복이었다. 하지만 피고쪽 변호인들은 팔레스타인 해방을 위한 인민전선총사령부(PELP-GC)가 이 사건의 진범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최근에는 이란이 사건의 배후라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지난 6월4일 한 이란인 망명자는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로커비 사건의 배후는 리비아가 아닌 이란”이라고 주장했다. .

아랍과 미국의 ‘기싸움’은 어디로

최근 검찰과 변호인쪽이 신속한 재판 진행에 합의했지만 증인만도 1천여명에 이르는 등 재판의 규모와 사실 관계의 복잡성 등을 감안할 때 결론에 이르기까지는 최소한 1년 이상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희생자 유가족들은 재판을 통해 팬암기 폭파사건의 모든 진상이 밝혀지기를 기대하고 있지만 이들의 기대가 충족될지는 미지수이다. “나는 진실과 정의가 구현되길 바란다. 그러나 솔직히 2개 중 하나라도 이뤄질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외신과 회견한 한 유가족의 심정이다. 사건의 진실 규명과정에서 아랍과 미국간의 해묵은 감정이 풀릴지, 아니면 더욱 심해질지, 재판 결과에 전세계의 눈이 쏠리고 있다.

암만=김동문 통신원 yahiya@hani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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