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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톨레도, 기뻐할 시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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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06-13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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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루 대선서 가르시아 간신히 물리쳐… 실업난, 빈부격차, 민주개혁 등 숙제는 산더미

사진/ 당선이 확정되자 기뻐하고 있는 톨레도. 그러나 그의 앞엔 해결해야 할 수많은 난제가 놓여 있다.(AP연합)
“페루 최초로 선거를 통해 대통령에 오른 토착민”이라 일컬어지는 알레한드로 톨레도(55). 그는 당선의 기쁨에 겨워 할 시간이 별로 없다. 풀어야 할 숙제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무엇보다 경제를 살려야 하고 실업을 줄여야 한다. 54%에 이르는 빈곤층에 대한 대책도 간단치 않다. 후지모리 10년 권력을 떠받쳐왔던 군부 상층부를 숙정하는 등 부정부패 척결과 민주화를 추진하는 일도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에게 다행스런 일은 이번 대선에서 48%의 득표율을 보인 좌파후보 가르시아 전 대통령(85∼90년)이 협력을 약속했다는 점이다. 미국과 외국 투자가들도 톨레도 당선에 만족하는 모습이다. 이로써 지난해 가을 블라디미로 몬테시노스의 비밀녹취 테이프(속칭 몰래카메라) 파문으로 비롯된 페루 정권교체의 회오리는 일단 가라앉은 셈이다.

톨레도는 후지모리주의자?

52%의 득표율로 좌파인 가르시아 후보(52, 아메리카 민중혁명동맹 APRA당)를 힘겹게나마 제치고 알레한드로 톨레도(55, 페루의 가능성당)가 마침내 대권을 잡았다. 지난해 5월 알베르토 후지모리의 3선을 막으려다 실패했던 톨레도였다. 페루는 민중혁명-민주선거의 2단계 과정을 단시일 안에 거치면서 민주화의 길에 접어들었다. 인구의 80%가 토착민인 인디오(45%) 또는 혼혈인 메스티조(37%)인 페루의 정치경제 권력은 소수인 백인(15%) 몫이었다. 알레르토 후지모리? 그는 ‘동양인의 얼굴을 한 백인’이었을 뿐이다. 후지모리는 집권 10년 동안 전기 전화 광산 등 주요 기간산업을 개방이란 이름으로 미국 등의 다국적기업에 팔아넘기고 부익부 빈익빈을 부채질했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그러나 당선의 기쁨은 잠시, 톨레도는 풀어야 할 숙제들로 진땀을 흘려야 할 것이다. 톨레도가 지난 5월 축출된 필리핀의 에스트라다 대통령처럼 술과 도박을 즐기며 나랏일을 게을리할 사람이 아니라는 전제 아래서다.


일반적으로 대통령당선자에게는 취임 초기 두세달 동안 이른바 허니문(밀월)이란 이름으로 호흡을 가다듬을 시간이 주어진다. 페루의 최대 일간지 <엘 꼬메르시오>는 “톨레도, 지금 일을 시작해야 한다!”는 큰 제목으로 후지모리 퇴진 이후 페루의 혼란을 하루빨리 수습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페루의 어려운 사정을 감안하면 그럴 여유가 없다는 것이다. 민주화투쟁으로 집권한 톨레도인 만큼 각 부문의 민주개혁은 잘해나갈 것이다. 그러나 경제안정과 민주발전은 다른 얘기다. 페루 2700만 인구 가운데 54%가 빈곤선(5인 가족 기준 월소득 300달러) 아래다. 1인당 GDP는 2100달러로 한국의 4분의 1에 지나지 않는 가난한 나라다. 톨레도는 유세기간중 침체된 경제를 살리고, 250만명의 일자리를 만들어내고, 세금을 줄이고, 공무원의 임금을 올려주겠다는 등 여러 장밋빛 약속을 내걸었다. 그런 약속들을 지키려면 재원이 마련돼야 한다. 톨레도는 결국 세계은행과 미국쪽에 손을 벌릴 수밖에 없다. 현재 페루는 192억달러의 외채를 지고 있다. 페루 경제규모로 봐선 큰돈이다. 중도파 톨레도의 당선으로 뉴욕을 비롯한 국제 금융시장에서 페루 채권값이 7.2%나 가파르게 오른 것으로 미뤄, 일단 외국 투자자들은 톨레도의 당선을 반기는 모습이다.

당선자가 좌파 성향의 가르시아였다면 결과는 반대로 나왔을 것이다. 외국 투자가들은 가르시아가 85∼90년 집권시절 은행을 국유화하고 페루의 외채를 제대로 갚지 않으려 했던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 미국은 가르시아 정권을 3천∼7천%의 천문학적 인플레이션의 경제적 파탄을 경험한, 이른바 실패한 정권으로 평가한다. 그러나 그러한 실패가 미국을 비롯한 세계의 금융자본을 주무르는 나라들이 가르시아 정권을 망하도록 의식적으로 내버려둔 데서 비롯됐다는 것은 말하지 않는다. 톨레도는 가르시아의 실패, 그리고 후지모리의 실패를 거울삼을 것이다. 가르시아는 후지모리가 지난 10년간 페루 국영회사들을 ‘개방’이란 이름으로 미국 등 다국적 기업들에 팔아넘긴 것을 원상회복시키거나 그에 준하는 조치를 취할 만한 인물이다. 그러나 톨레도는 이른바 ‘중도파’다. 과감한 개혁적 성향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다. 가르시아는 선거운동 기간중 내내 톨레도 후보를 ‘후지모리주의자’라고 비판했다. 그의 중도노선 정책의 애매한 부분에 대한 비판이었다. 의회와의 관계도 톨레도로선 풀어야 할 과제다. 톨레도가 이끄는 ‘페루의 가능성’은 지난 4월 총선에서 120석 가운데 45석을 얻었을 뿐이다. 가르시아는 그의 좌파정당 APRA 소속 28명 의원들에게 일단 톨레도 정권을 지지하도록 요청했다. 가르시아는 톨레도 정권을 반대하기보다 협력할 것임을 다짐했다.

박정희와 후지모리

사진/ 톨레도 당선을 축하하는 페루 국민들. 이들은 ‘촐로’출신 대통령에게 박수를 보냈다.(AP연합)
지난해 8월 후지모리의 석연찮은 3선연임 시비로 비롯된 페루의 정치위기를 취재하러 갔을 때 만난 톨레도의 개인적인 인상은 그리 감명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는 활달한 나머지 진지함이 부족해 보이는 듯한 생각이 들었다. 대외경제에 관한 한 톨레도는 개방론자다. 그때 톨레도는 필자에게 이런 말을 했었다. “한국은 70, 80년대에 무역장벽을 쌓아놓고 그동안 국가경쟁력을 키울 수 있는 시간을 벌었지만, 페루는 그런 기회를 놓쳤다. 지금은 이른바 글로벌경제 시대를 살고 있어 국내산업 보호를 위해 외국에 빗장을 걸기가 어렵다.” 톨레도는 후지모리의 공기업 민영화 정책을 계속해나갈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페루경제에 외자 비율은 더 높아질 전망이다. 가르시아는 90년대 미국의 입김으로 남미에서 행해진 공기업 민영화가 곧 대량 실업을 낳고 가진 자들의 배만 불렸다고 비판해왔다. 사실이 그러했다.

페루는 한국과는 지구의 정반대쪽에 자리한 나라다. 대사급 수교관계를 맺고 있긴 하지만, 정치경제적으로 인연이 많지 않다. 그러나 한국의 정치체험과 페루의 그것은 여러모로 닮은 점이 많다. 박정희가 경제발전을 내세워 개발독재를 했다면, 후지모리도 마찬가지였다. 90년대 초 후지모리가 선거를 통해 권력자가 됐을 때 페루는 천문학적 인플레이션과 좌익테러 공세에 시달려왔었다. 후지모리는 이 문제들을 푼다는 구실을 내세워 독재권력을 강화했다. 집권 2년 만인 지난 92년 군부를 움직인 친위 쿠데타로 의회를 문닫고 헌법기능을 정지시켰다. 박정희의 유신 쿠데타를 빼닮은 불법행위였다. 정보정치도 두 사람이 닮은 구석이다. 박정희시대 때 이후락 김형욱으로 상징되는 이른바 ‘기관원’들이 행세했다면, 후지모리는 블라디미르 몬테시노스를 국가정보원(INS) 총책으로 앉혀놓고 온갖 불법적 방법으로 정치적 반대자들을 고문 살해했다. 박정희·후지모리 모두 정보정치로 권력을 다졌지만, 끝내는 그 때문에 망했다는 공통점도 빼놓을 수 없다. 박정희는 유신독재에 회의를 느낀 정보기관 총수의 저격에, 후지모리는 제2인자 소리를 들을 정도로 오만했던 정보 총수의 어이없는 실책 때문에 결국은 절대권력의 자리를 자신의 뜻과 달리 물러나야 했다. 몬테시노스가 정치공작용으로 간직해두었던 몰래카메라 테이프가 새나갔고, 이것이 핵폭발을 일으켜 끝내 후지모리가 일본으로 도망가는 신세가 됐다.

차기 노리는 가르시아의 깨끗한 승복

톨레도는 스스로를 ‘촐로’(페루 인디언의 후손)라 부르길 즐겨했다. 촐로는 페루 인디언의 후손이란 뜻을 담고 있지만, 시골에서의 빈곤을 견디다 못해 페루의 도시로 옮겨온 빈민을 뜻하기도 한다. 톨레도의 출신성분이 촐로이긴 하지만, 그가 과연 도시빈민을 비롯한 페루의 저소득층을 위한 정책을 펼 것인지는 의심스럽다. 안데스 산간의 가난한 인디오들과 도시빈민, 그리고 리마의 부유층을 동시에 만족시킬 묘책이란 없다. 톨레도는 선택을 해야 한다. 군부를 확실히 장악하는 것도 톨레도로선 하나의 과제다. 페루 군부는 후지모리 10년 독재의 충실한 손발 노릇을 해왔다. 후지모리 독재의 공범집단이다. 그 상층부를 도려내고 인사쇄신으로 물갈이한다는 것은 며칠 새 이뤄질 일이 아니다.

득표율 48%가 말하듯, 알란 가르시아에 대한 국민적 지지도는 만만치 않다. 거의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사회주의자 가르시아를 지지한다고 보면 틀린 말이 아니다. 그만큼 사회경제적 개혁에 대한 요구가 높다는 걸 뜻한다. 페루정치분석가들은 가르시아가 그 정도로 선전한 것은 정치적 부활을 뜻한다고 분석한다. 가르시아 집권기간 동안의 실정, 그리고 9년 전 부패혐의를 안은 채 망명길을 떠났던 점에 비추어서다. 52살이란 나이로 보아 가르시아에겐 5년 뒤 재도전의 기회가 있을 것이다. 박빙승부는 선거후유증에 대한 우려를 낳았다. 그러나 가르시아는 패배를 깨끗이 인정했다. 후지모리 퇴진이란 공은 톨레도 몫이라는 것을 인정한 셈이다. 가르시아는 그에게 또다른 기회가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특히 경제부문에서 톨레도가 실패하거나 유권자들의 다양한 요구를 만족시키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그럴 경우 톨레도에 대한 불만은 차기 대선에서 가르시아 당선에 거름이 될 것이다.

김재명/ 분쟁지역 전문기자 kimsphoto@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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