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량국가’ 정권은 여전히 굳건… 일반국민들만 고통받는 경제제재의 모순
80년대 말 소련 해체로 동서냉전이 막 내린 다음 90년대의 미국과 영국은 군사력과 금융에 바탕, 국제관계에서 주도권을 행사해왔다. 영·미에 도전하는 세력은 ‘불량국가’(rouge country)로 낙인 찍혀 이른바 제재(sanctions)를 받아왔다. 유엔 안보리의 이름을 빌린 제재도 있고, 미국에 의해 단독으로 가해지는 제재도 있다. 어떤 동기에서건 제재를 받는다는 것은 곧 영·미가 주도하는 국제사회에서의 고립을 뜻한다. 그러나 제재를 받는 당사국의 지배층이 아닌, 일반국민들이 고통받는 것은 ‘공정한 게임’이 아니라는 반론이 만만치 않다. 지배층은 영·미와의 투쟁을 빌미로 내세워 오히려 권력을 공고히 해왔다. 제재가 성공해 독재권력이 무너졌다는 소식은 어디서도 들리지 않는다. 세르비아 밀로셰비치 정권의 몰락은 13년 독재에 지친 민중의 선거혁명에 따른 정치적 변혁이지, 영·미의 제재 때문은 아니다. ‘불량국가’로 불리는 나라들이 과연 법과 정의가 통하지 않는, 말 그대로 ‘막가파 국가’인가에 대해서도 의문이 제기된다.
이란 “테러가 아니라 ‘성전’이다”
지난 4월 말 미 국무부는 ‘2000년 전세계 테러리즘 유형’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 연례보고서는 제3세계 국민들의 정서와는 달리, 미국의 시각에서 일방적으로 작성된 것이라는 비판이 일고 있다. 보고서에서 테러지원국가로 낙인찍힌 국가들은 쿠바, 이란, 이라크, 시리아, 리비아, 수단, 그리고 북한이다. 이에 대해 당사국들은 강력히 반발한다. 그 한 보기가 이란이다. 팔레스타인인들의 투쟁을 지원한다는 게 이란이 미국으로부터 ‘테러지원국가’로 낙인찍힌 이유다. 그러나 이란의 시각에선, 67년 6일전쟁을 통해 당시 요르단 영토였던 팔레스타인지역을 불법으로 점령한 이스라엘에 맞서 잃은 땅을 찾겠다는 팔레스타인사람들의 투쟁은 당사자들로선 성스러운 싸움(jihad)이지, 테러가 아니다. 이란의 시각에선, 같은 아랍형제국으로서 팔레스타인을 돕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현재 미국은 1979년에 제정된 수출행정법(Export of Admnistration Act)에 따라 ‘테러지원국가’들에 대한 수출입을 규제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의 세계지배 구도에 맞서온 나라들에 대해 미국이 유엔의 이름을 빌려, 또는 단독으로 가해온 제재는 조금씩 허물어지는 추세다.
이라크에 대해 유엔 안보리 결의로 11년 동안 가해진 제재를 대체하기 위해 영·미는 새로운 제재완화안을 제출했다. 러시아도 독자적인 제재완화안을 내놓아, 유엔 안보리 내부에서 논쟁이 예상된다. 한편 이라크는 영·미의 제재완화안이 기만이라며 전면폐지를 주장하고 있다. 주수입원인 석유수출과 기본적인 생필품들이 통제됨으로써 이라크 국민들은 그동안 엄청난 고통을 겪어왔다. 이라크 주장으론 그동안 어린이들을 포함한 200만명의 이라크 국민들이 제재 탓으로 죽어갔다고 주장한다. 사담 후세인은 여전히 건재하다. 이라크에 대한 유엔 안보리의 제재는 90년 8월 쿠웨이트 침공 직후 이뤄졌다. 그러나 이라크의 주수입원인 석유수출 규제를 주내용으로 하는 제재조치는 96년 식량을 위한 석유계획(oil for food program)이란 이름 아래 갈수록 느슨해졌다. 그렇다해도 유엔의 제재조치는 이라크 국민들의 고통과 후세인체제의 독재만을 합리화했다는 비판이 따른다. 이라크에 가해진 11년 제재가 사담 후세인 정권을 전복시킬 수 없다는 게 이미 드러난 것이다. 그렇기에 더이상 이라크 국민들을 고통 속에 몰아넣어선 안 된다는 비판이 제기돼왔다. 근년 들어 원유가가 오른 것도 후세인체제의 숨통을 트는 데 한몫했다. 후세인체제는 위기를 넘겼다. 영·미가 생각할 수 있는 제재라곤 후세인을 포함한 고위관료들과 그 가족들의 해외 나들이를 금지하고, 이라크 정부의 해외자산과 계좌를 동결하는 수준 정도다. 풍부한 석유수입으로 이라크 후세인체제는 자생력을 갖게 됐다. 그런 상황에서 이라크가 영·미의 무기사찰 요구를 받아들일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리비아 “밝힐 진상이 없다”
리비아도 80년대 레이건 정권 시절부터 미국과 맞서면서 10년 가까이 ‘불량국가’ 대접을 받아왔다. 요점은 270명을 희생시킨 팬암 103기 폭파사건(1988년)을 리비아 카다피 정권이 계획하고 실행에 옮겼다는 것이다. 그러나 증거는 없다. 심증뿐이다. 그런데 테러지원국이다. 미 연방수사국(FBI)은 항공기 폭파 같은 엄청나고 예민한 사안에는 리비아의 실권자 무아마르 카다피 대통령, 아니면 적어도 고위관리가 개입했을 걸로 믿는다. 미국의 주도 아래 나온 유엔 안보리의 결의는 “진상을 밝히고 책임을 지라”는 수준이다. 그러나 밝힐 진상이 없다는 게 카다피의 일관된 주장이다. 정말 끝나지 않을 신경전이다. 리비아에 대한 유엔 제재는 여객기 취항금지, 무기와 석유 관련장비 수출금지, 해외자산 동결이 주내용이다. 1992년부터 이뤄진 리비아에 대한 유엔 제재는 지난 99년 4월, 리비아가 용의자 두 사람을 네덜란드에서 열린 국제재판에 넘김으로써 일시중지된 상태다. 그러나 미국은 유엔 안보리에서 제재가 공식철회되려면, 책임인정과 보상이란 선결조건을 이행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미국은 비록 유엔에서 제재를 철회하더라도 미국 단독으로 리비아에 대한 제재를 계속한다는 방침이다. 여기에는 미국시민의 리비아 여행금지, 무기관련 수출금지, 대리비아 원조금지 등이 포함돼 있다.
중동지역의 정서는 “제재는 이제 그만”이다. 지역언론들은 “유엔 안보리가 미국·영국의 입김에서 벗어나 제재를 풀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이집트 주재 미국대사를 지낸 로버트 폴리트로 전 국무부 근동담당차관보는 리비아가 지닌 정치적 비중을 무시해선 안 된다는 주장을 편다. 카다피는 아프리카를 하나로 묶는 아프리카연합(African Union)을 주창하고 이를 거의 성사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등 제3세계 국가들에서 쿠바의 카스트로만큼이나 영향력을 지닌 인물이다. “폭파사건이 일어났던 80년대의 리비아와 지금의 리비아는 다르다”는 폴리트로의 주장은 현실정치적인 측면에서 설득력을 지닌다.
아프가니스탄 국토의 95%를 점령하고 있는 탈리반 정권도 미국의 주도 아래 유엔의 제재를 받고 있다. 1998년 250명의 사망자를 낳은 아프리카 케냐와 탄자니아의 미 대사관 폭탄테러 주모자란 혐의를 받고 있는 빈 라덴과 관련된 제재다. 이슬람원리주의에 바탕, 세속적인 중동 이슬람 정권과 이들을 지원하고 있는 미국을 향해 성전(jihad)을 선언한 빈 라덴을 탈리반 정권은 보호중이다. 탈리반 정권은 빈 라덴이 테러리즘에 연루돼 있다는 증거를 찾지 못했다고 주장해왔다. 따라서 그를 비이슬람국가(다시 말해서 미국)에 넘기지 못하겠다는 입장이다. 현재 탈리반 정권에 맞서 북부 일부를 차지하고 있는 세력은 전 국방상 아메드 샤 마수드가 이끌어왔다. 아프가니스탄의 유엔 의석은 탈리반에게 축출된 부르하누딘 라바니 정권이 갖고 있다. 탈리반 정권은 국제사회의 인정을 받지 못하는 처지다. 미 국무성이 테러리스트 관련 보고서를 내면서 아프가니스탄을 ‘테러지원국가’ 명단에 뺀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대치국면이 해결될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 군사적인 관점에서 탈리반 정권이 저항세력에 패해 무너질 가능성이 현재로선 없어 보인다.
가혹한 제재는 탈리반 정권만 자극할 뿐
2000년 12월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유엔의 추가제재는 무기금수, 여객기 취항금지, 해외자산 동결,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의 주요수입원인) 헤로인을 만드는 데 쓰이는 화학제품 판매제한 등이었다. 그러나 아프가니스탄 주재 유엔사무소, 그리고 ‘국경없는 의사회’(MSF, 1999년 노벨평화상 수상) 등 현지에서 구호활동을 펴고 있는 비정부기구들(NGOs)은 “비현실적이고 가혹한 조치”라며 이같은 제재를 주도한 미국을 비판한 바 있다. 외부세계와 담을 쌓고 지내는 탈리반 정권에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탈리반 정권을 자극할 뿐이며, 그 결과는 아프가니스탄 국민들의 고통만 더할 뿐이라는 논리에서였다. 실제로 탈리반 정권은 카불 주재 유엔사무소 폐쇄와 아울러 외국 구호기관요원들에게도 철수를 요구해왔다. 미국과 탈리반 정권의 신경전으로 아프가니스탄 국민들만 괴로운 상황이다.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 총리. 40년 넘게 미국의 제재를 견디면서 미국의 세계지배 구도를 거부해온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다. 그는 5월 초 이란 테헤란대학에서의 연설에서 “제국주의적인 미국은 전세계에 군사기지를 갖고 있고, 핵탄두는 모든 방향을 겨냥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석유수출에 의존하는 이슬람체제와 설탕수출국으로 사회주의체제라는 차이에도 불구, 두 나라는 미국의 경제제재와 정치적 압력에 시달려왔다. 그런 카스트로에게 다수 쿠바 국민들이 애정어린 눈길을 보내는 배경을 우리는 곰곰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김재명/ 분쟁지역 전문기자 kimsphoto@yahoo.com

사진/ 의약품 부족으로 제대로 된 치료를 못 받고 있는 이라크 어린이. 경제제재로 민중의 삶은 점점 피폐해져 간다.(GAMMA)

사진/ 구호물자를 받고 있는 아프가니스탄 국민들. 현지에서 구호활동을 펴고 있는 비정부기구들은 “비현실적이고 가혹한 조치”라며 제재를 주도한 미국을 비판했다.(GAMMA)
이라크에 대해 유엔 안보리 결의로 11년 동안 가해진 제재를 대체하기 위해 영·미는 새로운 제재완화안을 제출했다. 러시아도 독자적인 제재완화안을 내놓아, 유엔 안보리 내부에서 논쟁이 예상된다. 한편 이라크는 영·미의 제재완화안이 기만이라며 전면폐지를 주장하고 있다. 주수입원인 석유수출과 기본적인 생필품들이 통제됨으로써 이라크 국민들은 그동안 엄청난 고통을 겪어왔다. 이라크 주장으론 그동안 어린이들을 포함한 200만명의 이라크 국민들이 제재 탓으로 죽어갔다고 주장한다. 사담 후세인은 여전히 건재하다. 이라크에 대한 유엔 안보리의 제재는 90년 8월 쿠웨이트 침공 직후 이뤄졌다. 그러나 이라크의 주수입원인 석유수출 규제를 주내용으로 하는 제재조치는 96년 식량을 위한 석유계획(oil for food program)이란 이름 아래 갈수록 느슨해졌다. 그렇다해도 유엔의 제재조치는 이라크 국민들의 고통과 후세인체제의 독재만을 합리화했다는 비판이 따른다. 이라크에 가해진 11년 제재가 사담 후세인 정권을 전복시킬 수 없다는 게 이미 드러난 것이다. 그렇기에 더이상 이라크 국민들을 고통 속에 몰아넣어선 안 된다는 비판이 제기돼왔다. 근년 들어 원유가가 오른 것도 후세인체제의 숨통을 트는 데 한몫했다. 후세인체제는 위기를 넘겼다. 영·미가 생각할 수 있는 제재라곤 후세인을 포함한 고위관료들과 그 가족들의 해외 나들이를 금지하고, 이라크 정부의 해외자산과 계좌를 동결하는 수준 정도다. 풍부한 석유수입으로 이라크 후세인체제는 자생력을 갖게 됐다. 그런 상황에서 이라크가 영·미의 무기사찰 요구를 받아들일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리비아 “밝힐 진상이 없다”

사진/ 가혹한 경제제재에도 불구하고 이른바 ‘불량국가’들의 지도자들은 건재하다. 리비아의 카다피와 쿠바의 카스트로.(GAMM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