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표지이야기

다른 문화로 가는 가시밭길

361
등록 : 2001-05-29 00:00 수정 :

크게 작게

노르웨이 남성과 국제결혼한 한국여인 S씨의 ‘근대성 터득’과 그 아픈 대가

사진/ 하루하루 이질적인 공간과의 싸움에서 이기지 못해 고국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는 국제결혼자도 많다(사진은 기자내용과 직접적 관련이 없음).(GAMMA)
최초로 영어를 완벽하게 구사한 한국인이자 대표적 친일파 윤치호, 민영언론의 개척자 서재필, 친미 반공체제의 상징적 인물인 이승만, 미국에서 망명생활을 하면서 한국 독재정권을 비판했던 전직 서울대 총장 유기천…. 각양각색으로 한국 근·현대사의 흐름을 좌우했던 위의 몇 인물들의 한 가지 공통점은 국제결혼을 했다는 것이다. 조선시대에 생각하기 어려웠던 외국인과의 결혼이라는 것은, 근대가 한국인에게 주었던 ‘자유’라는 한 가지 중요한 측면이라고 여겨봄직하다. 국제결혼을 통해서 얻어지는 세계성이 한국적인 근대성 형성에 크게 기여했다는 점은 두말할 것도 없다.

노르웨이 한국인 대다수는 국제결혼 여성들

그러나 위에서 열거한 한국 근·현대 ‘인물’들의 ‘국제결혼 생활’이, 과연 쉽기만 했을까? 한국문화를 등한시했던 서재필의 미국인 부인이 서울에 살았을 때도 남편에게 단호하게 양옥과 서양음식의 제공만을 요구했다는 ‘윤치호 일기’의 기록이나, 한국인에 대한 불신과 이질감을 극복하지 못한 이승만의 부인이 미국인 가톨릭 신부를 통해서 한국 국가정보를 미국 대사에게 정기적으로 제공했다는 1950년대 주한 미 대사관의 기록을 읽노라면, 인종주의·배타성·국가주의로 얼룩진 근·현대적 세계에서의 국제결혼이 얼마나 복잡하고 어려운지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근대성 자체도 인간의 고통·고뇌의 증가를 의미하는 만큼 근대성으로의 국제결혼도 그야말로 가시밭길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 근대화의 하나의 작은 열매랄까, 200여명밖에 되지 않은 노르웨이 한국인사회의 대다수는, 노르웨이 남성에게 시집온 한국 여성들이 차지한다. 사실 최근까지는 국제결혼 이외에 노르웨이로의 이민 방법도 별로 없었다. 이민 여성 각자가 경우가 다른 만큼 전체적으로 이야기하기란 불가능에 가깝지만 1960∼70년대 국제결혼의 주요 사회적 동기는, 경제·사회적 어려움과 가정에 대한 책임감이었다. 노르웨이 이민법이 지금처럼 까다롭지 않았던 그때에, 한 여성의 국제결혼과 이민은 장차 전 직계 가족이 ‘선진국으로’ 갈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었다.

국가주의적·민족주의적 입장에서는 ‘애국의 부족'이라고 매도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소중한 아들과 딸들을 인격이 파괴될 수 있는 군대와 청계천의 공장으로 보내고 싶지 않았던 개발독재시대 서민들의 고민과 바람들을 인간적으로 이해해 줄 수 있지 않을까? 복종·산재·착취로부터 사랑하는 가족들을 구출하고자 한 그 시대의 국제결혼 여성들에게는, 노르웨이 생활의 장단점을 논할 여유조차 별로 없었다. 간혹 각종 차별을 당할 때에도, “그래도 한국에서 고생하는 것보다야 낫지”라고 자위하곤 했던 1960∼1970년대 이민자보다, 1990년대에 국제결혼을 통해 노르웨이에 온 젊은 한국 여성들은 문화·생활 양식의 차이점에 훨씬 민감하다. 그전 세대를 ‘사회·경제적 이민의 세대’로 볼 수 있다면, 1990년대 한국인 여성 이민자를 ‘문화 이민의 세대’로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개인적인 사연을 제외한 그들의 국제결혼 선택의 동기를 묻는다면, ‘한국 남성의 우월주의, 한국사회의 권위주의와 보수성에 대한 불만’이라는 대답이 거의 지배적이다.

다시 생각하게 된 ‘세계화’

사진/ 국제결혼을 통해 얻어지는 세계성은 한국인들의 근대성 형성에 크게 기여하는 게 사실이다.(GAMMA)
그렇다면 근대성과 ‘세계성’을 찾아 과감하게 지구의 반대쪽으로 건너오는 그들은 과연 만족감을 느끼는가? 그들이 ‘몸’으로 체험하는 노르웨이사회의 국제성과 관용은 과연 어느 수준인가? 필자가 최근에 만난 한 한국 여성의 생생한 이야기를 간단히 적어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아보도록 하겠다.

자신보다 나이가 2배나 많은 노르웨이 이혼남과 결혼한 이유로 결혼 소식을 부모에게 알리지도 못하고 있는 국내 한 명문대 영문과 출신 S씨(29살)는, 노르웨이에서 이미 1년 넘게 살았다. 그가, 자신에게는 노르웨이가 놀라운 발견과 각성을 준 땅이라고 한다. 그 발견들 중에 마음을 가장 울렸던 것은,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던 ‘북한’의 발견이었다. 한국에 있을 때 북한을 단순히 ‘같은 민족, 적대적인 후진국가’라고 생각하고 별로 관심도 없었던 그녀는, 노르웨이에서 기록영화를 통해서 북한 대기근의 규모와 실상, 재중 탈북자의 눈물과 희망 등을 본의 아니게 깊이 접할 수 있었다. “우리 민족이니 잘 지내고 통일해야 한다”는 한국에서의 당위적인 ‘민족’이야기에는 별다른 반응을 갖지 않았지만, 스웨덴 영화감독이 보여준 북한사람 개개인의 고통과 절규, 순수한 웃음은 그의 심금을 크게 울렸다. 추상적인 ‘동포’가 아닌 고통을 받는 하나의 개인을, 노르웨이 텔레비전을 통해서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북한과의 개인적인 만남’이 있은 뒤에, 그는 한국에서의 통일교육을 그지없이 한심하게 평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프리카·아시아·동구 각지에서 온 이민자들을 접해 보는 과정에서, 나는 왜 이 모든 다양한 문화에 대해서 한국에서 배우지도 듣지도 못했느냐는 물음이 머릿속을 떠난 날이 없었다. 한국의 역대의 ‘문민’, ‘국민’정부들이 부르짖는 ‘세계화’는 결국 “한심하고 집단적인 미국 따라하기에 불과했다”는 것이, 그의 분노에 찬 결론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가장 ‘한심한’ 것으로 여기기 시작한 것은, 한국교육 현실 전체다. 4살 유아서부터 “무얼 먹고 싶니?”, “무엇을 하고 싶니?”라는 식으로 아이의 의견을 끝없이 물어 대화를 이끌어내는 노르웨이식 교육과 “엄마 말 들어야지”를 반복하는 한국 어머니의 교육 방식의 차이가 결국 선생님을 자신과 동등한 인격적 상대로 보고 주장을 자제하지 않는 노르웨이 학생과 권위 앞에서 움츠리는 한국 학생의 행동 양식의 차이를 결정지어버린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었다.

요즘 그가 마음 아파하는 것은, 복종을 강요하지 않고 개인적 창의력을 키울 수 있는 환경에서 자란 서구 젊은이와 어릴 적부터 인격과 사고가 이미 만들어진 틀에 맞춰져 자란 한국의 젊은이가 장차 함께 경쟁하기란 어려울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서야 연령과 빈부귀천, 성적과 무관하게 자녀나 제자를 동등한 인간, 인격적 동료로 대하는 것, 부모와 자녀, 학생과 선생의 동등한 ‘만남’만이 진정한 양육·교육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말은 S씨의 또 하나의 결론이었다.

사적인 공간을 열지 않는 노르웨이인들

결국, 노르웨이에서의 시집살이를 통해서 ‘북한’, ‘학생’, ‘자식’이라는 전체적인 카테고리보다 개개인 각자의 마음과 희망과 창의력이 흘러넘치는 자유로운 반란이 훨씬 중요하다는 진리를 터득한 S씨가, 근대성·세계성의 이상에 나름대로 가까워졌다고 볼 수 있다. 근대가 주는 국제결혼의 자유를 통해서 그녀는 생각지도 못했던 방식으로 자신을 실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근대적 자유의 대가 역시 상상을 훨씬 초월한다는 것은 S씨의 쓰라린 경험이라고 한다. 친절하고 정중한 현지인들은 공적인 공간에서 자신을 차별하거나 잘못 대해준 적은 없지만 가정과 가까운 사적인 공간으로는 타인을 절대 잘 들여주지 않는다는 것은, S씨의 마음 아픈 지적이었다. 철저한 노르웨이식 사생활 본위주의도 큰 몫을 하겠지만 “역시 외국이 외국이구나”라고 한숨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한다. 척결이 가능하고 상대적으로 많이 사라진 공적인 차별과 달리, 이민자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는 이와 같은 사적인 차별은 쉽게 사라질 수는 없을 것이다.

남편의 친척이 있다면 다행히 어느 정도 고립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지만 지인도 없이 노르웨이로 홀로 이민을 온다는 것이 사회의 미시적 문화 차원에서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이 S씨의 생각이다. 그러나 뒷바라지를 아끼지 않는 남편이 있다 해도,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여기에서 우울증을 경험한 것처럼 이질적인 공간과의 하루하루 고투를 이기지 못해 한국에 돌아가버릴 생각을 자주 했다는 것이 S씨의 고백이다. 모든 것이 낯설고 거의 매일 같이 혼자 우는 현실, 그것은 S씨의 ‘근대성 터득’의 결코 적지 않은 대가인 것이다.

한국의 근·현대 형성에 크게 기여했고 지금도 기여하고 있는 국제결혼. 그 가능성이 엄청난 만큼 그 아픔도 역시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이 문제로 현재에도 고민하는 많은 한국인- 특히 ‘국제결혼’과 ‘이민’에 연계되는 여성- 에게 충고하고 싶은 것은, 그 변화와 아픔을 버텨낼 만한 내면적 능력이 과연 본인에게 있는지 먼저 잘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박노자/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좋은 언론을 향한 동행,
한겨레를 후원해 주세요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보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