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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공장점거는 ‘벼랑 끝’ 노동자들의 외통수

금융위기 여파로 영·미서도 생존권 차원 공장 농성 잇따라…
프랑스에서는 경영진 낚아챈 뒤 ‘밀린 협상’ 진행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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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08-04 16:55 수정 : 2009-08-07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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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들의 공장 점거는 불법이다. 끔찍하다. 틀린 말이 아니다. 하지만 “끔찍한 선택을 하는 건 더 끔찍한 대안밖에 없기 때문”이라는 영화 속 잠언을 외지 않는 한, 해법을 찾기 어렵다. 오랜 역사 동안 서구에서도, 우리나라에서도 거리로 뛰쳐나오고, 무기를 들고, 공장을 점거한 노동자들의 지난한 몸부림은 화석처럼 선명하다. 쌍용차 사태가 최대 고빗사위를 맞고 있다. 노사 협상이 긴박히 진행되지만, 여전히 정부는 그 전선 어디께도 보이지 않는다. 노동자들의 무기는 오직 제 목숨뿐이다. 목숨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지뢰 삼아 제 터전을 침범받지 않으려 전 세계 노동자들이 저항하고 있다. 편집자

‘베스타스, 우리의 투쟁.’ 덴마크계 다국적 에너지 기업 베스타스가 ‘시장 사정 악화’를 이유로 공장 폐쇄를 결정하자, 벼랑 끝으로 내몰린 노동자들은 마지막 저항 수단인 공장 점거에 들어갔다. 영국 남부 와이트섬의 베스타스 공장 바깥에서 지지 시위를 벌이는 이들이 점거농성 중인 노동자들의 모습이 보이자 박수를 치며 응원하고 있다.

“경제위기 속에 지난 12개월 동안 실업이 지속적으로 늘면서 공장 폐쇄와 정리해고에 맞선 노동자들의 새로운 투쟁이 만들어지고 있다. 해고 통보를 받은 노동자들과 잠시나마 고용이 유지되는 노동자들 사이에서 갈등도 생겨난다. 공장이 문을 닫게 생겼단다. 그러니 무슨 파업인가? …사람들은 말한다. ‘경제가 어렵다. 생산성을 높이지 않으면 너도 죽고 나도 죽는다. 그러니 자르자.’ 잘못된 경영에 대한 책임을 말하는 이들은 아무도 없다. ‘대마 살리기’에 나선 노동조합조차 단체협약을 통해 정리해고를 받아들이는 판국이 아닌가?”

금융위기로 실업자 3천만~6천만 명 증가 예상

2009년 7월의 한국을 말하려는 건 아니다. 영국 계간 <인터내셔널 소셜리즘>이 1972년 봄호(통권 50호)에서 전한 내용이다. 끝없이 달러화를 찍어내던 미국 정부가 1971년 8월 마침내 달러화의 금태환 포기를 선언한 ‘닉슨 쇼크’가 촉발한 미국발 금융위기로 세계경제가 휘청이던 때다. 위기를 기회로 여기는 게 자본의 속성이다. ‘불필요한 인력’을 잘라내려는 시도가 도처에서 이어졌다. 날벼락처럼 일자리를 빼앗기게 된 노동자들은 극한 투쟁으로 내몰렸다. 공장 점거는 위기에 처한 그 시절 노동자들의 마지막 무기였다.


역사는 되풀이된다. 지난해 미국발 금융위기로 세계경제가 곤두박질치면서 고용시장도 꽁꽁 얼어붙었다. 국제노동기구(ILO)가 지난 5월 펴낸 <지구촌 고용동향 보고서> 최신판을 보면, 경제위기가 시작되기 전인 2007년에 비해 올해 최소 2900만 명에서 최대 5900만 명가량의 실업자가 추가로 늘어날 전망이다. ILO는 “올해 지구촌 고용 상황은 (경제위기가 시작된) 지난해보다 더욱 악화할 것으로 보인다”며 “지구촌 전체로 볼 때, 일자리가 없는 인구는 2억1천만~2억3900만 명에 이를 것”이라고 내다봤다. 지구촌 노동자의 절반에 해당하는 14억 명가량이 올해 고용불안에 시달릴 것이란 게 ILO의 분석이다. 후안 소마비아 ILO 사무총장이 올 초 〈AFP통신〉 등과 한 인터뷰에서 “경기침체가 사회적 침체로 이어지도록 방치해선 안 된다”며, 광범위한 사회적 대화가 절실하다는 점을 강조한 것도 이 때문이다.

부질없다. 이번 위기도 자본에는 기회로 보인 모양이다. 또다시 ‘해고’의 광풍이 때를 만난 듯 지구촌 전역에서 휘몰아치고 있다. 이에 맞서, 각국의 노동자들도 다시 ‘마지막 무기’를 꺼내들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7월25일치에서 “경기침체로 촉발된 대량 정리해고에 직면한 노동자들이 무릎 꿇고 운명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한 채 공장 점거농성에 들어가고 있다”며 “이런 흐름은 이미 지구촌 전역으로 확산되고 있다”고 전했다.

지난 7월20일 오후, 영국 남부 햄프셔의 뉴포트에서 바닷길로 약 5km 떨어진 와이트섬. 베스타스풍력시스템(이하 베스타스) 공장 관리동으로 25명의 노동자들이 들어섰다. 해가 지기 시작했지만, 그들은 건물을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날 저녁 7시30분, 노동자들은 회사 국유화를 통해 일자리를 살려줄 것을 정부에 요구하며 점거농성에 공식 돌입했다. 베스타스 쪽이 7월28일 내놓은 보도자료를 보면, 사연은 대충 이렇다.

덴마크에 본사를 둔 베스타스는 세계적인 풍력발전기 생산업체다. 와이트섬 공장에선 이 회사 ‘V82 터빈’에 장착하는 40m짜리 블레이드(풍력발전기 날개)를 생산해 전량 미국 시장에 수출해왔다. 하지만 베스타스 쪽이 미 현지 생산량을 늘리기 시작하면서 ‘변화’의 필요성이 대두됐다. 이에 따라 2008년 8월 회사 쪽은 와이트섬 공장의 설비를 주로 영국에서 사용하는 ‘V90 터빈’에 장착하는 44m짜리 블레이드용으로 전환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이 무렵 영국 정부는 유럽연합 차원에서 2020년까지 재생 가능 에너지 사용 비율을 전체의 20%까지 끌어올리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풍력발전기 수요가 높아질 것이란 전망이 쉽게 가능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시장 상황은 쉽게 ‘성숙’되지 않았다. 영국 정부는 올 들어서도 재생 가능 에너지 비중을 높이겠다고 거듭 발표했지만, 당장 수요가 생겨나지는 않았다. 와이트섬 공장에서 생산설비를 안정적으로 돌리기 어렵다는 판단을 내린 회사 쪽은 지난 4월 말 설비전환 계획을 취소하기로 하고 노사협상에 들어갔다. 회사 쪽이 협상장에서 내놓은 ‘안’은 무엇이었을까? <가디언>의 7월21일치 보도를 보자.

“지난 4월 베스타스는 525명의 노동자가 일하고 있는 와이트섬 공장과 100명의 노동자가 일하고 있는 사우샘프턴 공장을 폐쇄하겠다고 발표했다. 파운드화 폭락과 (풍력발전 확대에 대한) 정치적 의지 부족 등으로 수요가 줄고 있기 때문이라는 게다. …하지만 세계 최대 풍력발전 업체인 베스타스가 최근 내놓은 매출 실적을 보면, 올 1분기에만 매출이 59%나 늘었다.”

회사가 반입해준 피자 조각 아래엔 해고통지서가

지난해 12월10일 미 일리노이주 시카고에 자리한 리퍼블릭위도스앤드도어스 노동자들이 회사 쪽의 공장 폐쇄에 맞서 점거농성과 함께 손팻말 시위를 벌이고 있다. 노동운동이 사그라진 미국에서 노조가 공장 점거농성을 벌이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사진 REUTERS/ FRANK POLICH

사업장 폐쇄를 전제로 한 협상이 제대로 굴러갈 리 없었다. 벼랑 끝으로 내몰린 노동자들은 결국 공장 점거를 선택했다. 공장 점거 9일째인 7월28일 베스타스 쪽은 공장 점거농성에 참여한 노동자 가운데 신원을 밝혀낸 11명을 해고했다. 회사 쪽은 이날 보도자료에서 “공장 점거로 제대로 된 협상을 수행하기 어렵게 됐다”며 “점거농성을 풀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였지만 수포로 돌아가 유감스러운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게 됐다”고 주장했다.

농성장 음식물 반입을 가로막던 베스타스 쪽은 이날 돌연 태도를 바꿔 음식물 꾸러미를 농성장에 전달했다. 영국 주간 <뉴스테이츠먼>은 7월29일 인터넷판에서 “베스타스 쪽이 전달한 음식물 꾸러미에 해고통지서가 끼어 있었다”며 “이로써 농성 노동자 11명은 정리해고에 따른 위로금조차 받지 못하게 됐다”고 전했다. 행여 노동자들이 통지서를 발견하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을까? 회사 쪽은 피자 한 조각 한 조각 밑에 해고통지서를 넣어두는 ‘배려’를 아끼지 않았단다. 이튿날 베스타스 쪽은 뉴포트카운티 법원에 농성 노동자들에 대한 강제퇴거 명령을 내려달라고 공식 요청했다. 법원이 이를 받아들인다면, 와이트섬의 이국적인 풍광을 배경으로 낯익은 장면이 연출될 터다.

앞서 지난 4월엔 자동차부품 생산업체 비스티온의 노동자들도 공장 폐쇄에 맞서 점거농성을 벌인 바 있다. 지난 2000년 6월 영국에 진출한 비스티온은 미 자동차업체 포드가 지분의 60%를 소유한 회사로, 영국 진출 9년여 만에 6억6900만파운드(약 61조3600억원)에 이르는 적자를 기록하며 지난 3월 말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회사 쪽은 이런 상황을 철저히 숨겨오다, 지난 3월31일 3개 공장을 폐쇄하고 600여 노동자를 정리해고하겠다고 전격 발표했다. 서부 벨파스트 지역 공장 노동자들은 이날 저녁 곧바로 공장 점거에 들어갔고, 이튿날 소식을 전해들은 에식스의 바질던 공장과 런던 북부의 인필드 공장 노동자들도 공장 점거농성을 시작했다. 온갖 압박을 버텨내던 비스티온 노동자들은 미국 본사 경영진과의 직접 협상에 나서기로 하면서 4월9일 일단 농성을 풀었다.

오바마, 공장 점거 지지

어디 영국 노동자들뿐이랴. 노동운동이 사실상 몰락한 미국에서도 벼랑 끝에 선 노동자들이 공장 점거농성을 어김없이 부활시켰다. 지난해 12월 시카고의 리퍼블릭윈도스앤드도어스 노동자 260여 명이 정든 일터를 스스로 ‘접수’했다. 창틀과 회전문 등을 주력상품으로 하는 이 업체는 주택경기 침체로 매출이 급감한데다, 주거래은행인 뱅크오브아메리카가 대출 중단을 통보하면서 공장 폐쇄를 결정했다. 하지만 회사 쪽은 사업장 폐쇄 60일 이전에 이를 노동조합에 통보해야 한다는 법 규정을 어기고, 폐쇄 발표 단 사흘 전에야 노동자들에게 이를 알렸다. 퇴직수당을 포함한 어떤 구제책도 제시하지 않았다. 노동자들로선 달리 방도가 없었던 게다.

이 업체 노동자들의 ‘불법’ 공장 점거는 버락 오바마 당시 대통령 당선자의 ‘지지 선언’을 이끌어내며, 삽시간에 벼랑 끝으로 내몰린 미국 노동자들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결국 회사 쪽을 협상장으로 끌어낸 노동자들은 175만달러의 퇴직수당을 약속받고 점거 엿새 만에 농성을 풀었다. 지난 5월 역시 시카고에 자리한 양복 제조업체 하트막스의 500여 노동자들이 사업장 폐쇄 위협에 맞서 조합원 투표를 통해 공장 점거를 결정한 것도 리퍼블릭윈도스앤드도어스 노동자들이 만들어낸 ‘선례’가 있었기에 가능했을 터다.

강력한 노동운동의 전통이 여전한 프랑스에선 좀더 ‘창의적’인 투쟁 방식도 등장했다. 최근 꼬리를 물고 있는 이른바 ‘사장 낚아채기’가 그것이다. 지난 7월24일엔 영국계 화물운송업체 ‘서비세어 카고’의 경영진 2명이 성난 노동자들에게 붙들려 회사 내에서 만 24시간 동안 억류됐다. 지난 3월 말 법정관리에 들어간 이 업체는 고용된 노동자 350여 명 가운데 220~300명을 정리해고할 것이라고 밝히면서도, 노동조합과의 대화는 철저히 외면해왔다. 노조 관계자는 당시 〈AFP통신〉과 한 인터뷰에서 “일부에선 ‘납치’라고 비난하기도 하지만, 오랜 기간 미뤄져온 노사 대화를 집중적으로 했을 뿐”이라고 강조했다. 올 들어서만 프랑스에서 ‘사장 낚아채기’가 벌어진 것은 모두 8차례에 이른단다.

베스타스 노동자들의 투쟁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전날 해고통지서를 담은 피자 상자를 배달했던 회사 쪽은 7월29일부터 다시 농성 노동자들에게 전달할 음식물 반입을 가로막았다. 베스타스 노동자들의 투쟁을 지지하는 노동단체와 환경단체들은 “영국의 유일한 풍력발전 설비 생산 공장을 폐쇄시키는 대신 국유화하는 게 해법”이라며 정부를 압박하고 있다. 뉴포트카운티 법원은 이날 회사 쪽의 강제퇴거 명령 요청에 대한 결정을 일단 미뤘다.

지지자들, 경계 뚫고 들어가 음식 전달

7월30일 공장 바깥에서 애타게 지지 시위를 벌이던 이들이 ‘행동’에 나섰다. 경계를 뚫고 공장 안으로 들어가 농성 노동자들에게 음식물을 전달한 게다. 8만여 조합원을 거느린 영국 철도·해양·교통노련(RMT)의 밥 크로 위원장은 <가디언>과 한 인터뷰에서 “회사 쪽이 농성 중인 노동자들의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 음식물 반입을 가로막는 것은 인권유린”이라며 “법적 대응책을 마련 중”이라고 말했다. 2009년 7월의 한국, 혼자가 아닌 게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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