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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온두라스에 내전의 그림자

대통령 국외 추방 뒤 지지·반대 시위 갈려… 무장한 시민과 군인들 충돌 땐 최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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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07-30 14:51 수정 : 2009-07-30 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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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데타. 명사. 무력으로 정권을 빼앗는 일. 소수가 폭력을 동원해 기존 정권을 무너뜨리거나, 정권 지도부를 바꾸는 행위.’

쫓겨난 쪽은 쿠데타가 벌어졌다고 주장한다. 권좌를 차지한 쪽은 쿠데타가 아니라고 일축한다. 쫓겨난 쪽은 쿠데타의 부당성을 들어 원상복귀를 강조하지만, 새로 권력을 쥔 쪽은 합법 절차에 따른 권력 교체라고 대거리를 하고 있다. 협상은, 애초부터 글러먹었다. 두 진영의 극한 대립은 내부 갈등만 끝없이 증폭시키고 있다. 온두라스에 내전의 음습한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7월22일 온두라스 수도 테구시갈파 중심가에서 열린 쿠데타 규탄 집회에 참석한 셀라야 대통령 지지자들이 주변에 배치된 경찰을 향해 항의 구호를 외치고 있다. 사진 REUTERS/ EDGARD FARRIDO

미주기구, 온두라스 회원국 지위 정지

벌써 한 달이 다 돼간다. 지난 6월28일 새벽 5시께 온두라스 군부가 마누엘 셀라야 대통령의 침실로 난입해 총구를 들이댔다. 파자마 바람으로 체포된 셀라야 대통령은 군인들이 이끄는 대로 공항으로 이동해 서둘러 코스타리카행 비행기에 올랐다. 추방, 아니 강제 망명이었다. 전세계가 한목소리로 중남미에서 군사 쿠데타의 망령이 되살아난 것을 비난했다. 셀라야 대통령은 코스타리카를 거쳐, 과테말라·니카라과로 이동해가며 지지 여론을 모으고 있다. 반면 셀라야 대통령 축출 직후 로베르토 미첼레티 의회 의장을 임시 대통령으로 임명한 의회와 군부는 “셀라야 대통령은 위헌적 행태를 보였기 때문에 현직에서 물러나게 됐으며, 이후 정국은 법이 정한 절차에 따라 수습됐다”고 반박하고 있다.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오스카르 아리아스 코스타리카 대통령 중재로 진행 중인 협상이 타협점을 찾지 못하는 이유다.

세밀히 따져보자. 6월28일 온두라스에서 벌어진 일을 쿠데타로 규정하는 이들은 “현직 대통령이 무장한 군인들에게 체포됐고, 강제로 국외로 떠나야 했다”는 점에 주목한다. 미주기구(OAS)가 만장일치로 온두라스의 회원국 지위를 정지시킨 것도 이 때문이다. 미주기구 헌장 제21조는 “회원국에서 헌법에 반해 민주적 질서를 중단시키는 사태가 벌어지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외교적 노력이 실패하면, 특별회의를 통해 해당 국가의 회원국 지위를 정지시켜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미주기구뿐 아니다. 프랑스·스페인·콜롬비아 등 상당수 국가가 온두라스 주재 자국 대사를 본국으로 불러들이거나, 무역거래와 원조를 중단한 상태다. 버락 오바마 미 행정부도 온두라스 사태를 “불법적”이라고 비판했다. 미 민간 싱크탱크 카터재단의 제니퍼 매코이 라틴아메리카 국장은 7월22일 〈BBC방송〉과 한 인터뷰에서 “국제사회가 이번 사태를 쿠데타로 규정하는 것은 군부가 적법 절차를 거치지 않고 대통령을 체포해 국외로 추방했기 때문”이라고 잘라 말했다.

쿠데타가 아니라는 주장의 논리는 뭘까? 온두라스 임시정부 쪽은 △군부는 법원의 결정에 따라 움직였고 △셀라야 대통령 추방 이후 군부가 권력을 장악하지도 않았다는 점을 근거로 든다. 온두라스 우파 정권에서 문화장관을 지낸 헌법 전문가 옥타비오 산체스는 7월2일 <크리스천사이언스모니터>에 기고한 글에서 “온두라스에서 쿠데타가 벌어졌다는 주장은 난센스에 불과하다”며 이렇게 강조했다.

임시정부 “내정간섭” 강력 반발

“셀라야 대통령은 법적 효력도 없는 국민투표를 통해 제헌의회 소집을 시도했다. 대법원은 이를 불법으로 규정했다. 온두라스 헌법 제239조는 현직 대통령의 재선 출마를 금하고 있으며, 누구든 이를 어기고 재선에 도전하거나 도전하려고 시도하면 즉각 현직에서 물러나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온두라스 대법원은 헌법을 지키라는 법원의 명령을 어긴 혐의로 군에 셀라야 대통령 체포를 명했다. 온두라스 헌법 제306조는 법원이 체포영장 집행을 위해 물리력을 동원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런 주장을 근거로 온두라스 임시정부 쪽은 “국제사회가 온두라스 헌정체계에 대해 아무런 지식도 없으며, 셀라야 대통령이 온두라스 민주주의에 얼마나 큰 위협이었는지도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고 볼멘소리를 하고 있다. 이들은 또 “셀라야 대통령 복귀와 관련한 어떤 주장도 내정간섭에 해당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그럼에도 수많은 나라가 온두라스 임시정부를 비판하고 있다. 임시정부 쪽 주장을 100% 받아들인다 해도 문제는 남기 때문이다. 셀라야 대통령이 실정법을 어겼다면, 체포해 재판정에 세우면 그만이다. 국외 강제 추방은 어떤 경우든 사리에 맞지 않는다. 케빈 카사스 사모라 전 코스타리카 부통령은 <로이터통신> 등 외신과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임시정부 쪽은 군부를 움직인 것을 두고 ‘법적 근거가 충분하다’고 주장한다. 솔직해지자. 설령 대법원에서 셀라야 대통령 체포령을 내렸더라도, 경찰을 보내면 그만이다. 굳이 중무장한 군인을, 그것도 새벽 5시에 보낼 이유가 없다. 정상적인 법 집행이라기보다는 예전 방식의 쿠데타로 보일 수밖에 없으며, 적법 절차 운운하는 것은 권력을 차지한 이후 이를 합법화하기 위해 내놓은 주장에 불과해 보인다. 온두라스 바깥에선 아무도 믿지 않을 게다.”

셀라야 대통령 축출 이후 보인 임시정부의 행태도 ‘쿠데타’의 옛 모습을 닮아 있다. 취재 중이던 언론인들을 구금하는가 하면, 비판적인 방송사의 송출신호를 차단하는 등의 조처를 취했고, 통행금지령을 내리더니, 급기야 의회에서 집회와 시위의 자유를 제한하는 법령까지 서둘러 통과시킨 게다.

냉전 시절 중남미 쿠데타 세력이 그랬듯 임시정부도 미 의회의 ‘승인’을 받기 위한 로비에 분주히 움직였던 정황도 포착됐다. 하지만 오바마 행정부가 일찌감치 임시정부와 선을 긋고 나서면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 과정에서 미첼레티 임시 대통령이 임명한 엔리케 오르테즈 콜린드레스 외교장관이 현지 텔레비전에 출연해 오바마 대통령에 대해 “그 깜둥이가 뭘 알겠느냐”는 망언을 했다가 사임하는 촌극을 벌이기도 했다.

지난 7월5일 셀라야 대통령은 베네수엘라 정부가 마련해준 항공기편으로 수도 테구시갈파 공항에 착륙하려다 온두라스 군이 활주로를 차단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7월24일 오후 현재, 셀라야 대통령은 두 번째 ‘귀국 투쟁’을 준비 중이다. 〈AP통신〉은 “셀라야 대통령이 니카라과 수도 마나과에서 출발해 북부 에스텔리를 거쳐, 온두라스 국경 25km 지점인 옥토칼로 이동할 것”이라며 “그곳에서 (육로로) 국경을 넘어 온두라스로 입국하는 계획을 세우게 될 것”이라고 전했다. 앞서 〈AFP통신〉은 7월20일 “셀라야 대통령이 귀국에 앞서 온두라스 내부에서 자신을 지지하는 저항세력을 조직하고 있다고 밝혔다”고 전한 바 있다. ‘내전’이란 흉흉한 낱말이 떠돌고 있는 이유다.

언론 통제 등 과거 쿠데타와 닮은꼴

“온두라스 국민 상당수가 무기를 보유하고 있다. 무장한 시민이 거리의 병사들에게, 또는 군이 시위에 나선 시민들에게 총격을 가하면 무슨 일이 벌어지겠는가?” <신화통신>은 7월19일 중재에 나선 아리아스 코스타리카 대통령의 말을 따 이렇게 전했다. 실제 테구시갈파 거리에선 셀라야 대통령의 복귀를 촉구하는 시위대와 그의 축출을 환영하는 시위대가 아슬하게 만나고 있다. 그럼에도 임시정부 쪽은 “셀라야 대통령이 귀국해 올해 말까지로 정해진 임기를 채울 수 있도록 하자”는 협상안에 대해 “차라리 미첼레티 임시 대통령이 사임할 테니, 셀라야 대통령은 귀국해 재판이나 받으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내전’을 거론하는 건 성급한지 모른다. 지금으로선 누구도 알 수 없다. 다만 한 가지, 시간이 갈수록 분명해지는 점이 있다. 온두라스에서 쿠데타 세력이 정권을 유지하게 된다면, 중남미의 다른 나라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질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점이다. 모두가 걱정해야 할 일이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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