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처럼 어떤 형태로든 5월 주범들을 손보지 않는 한, 아직은 5월을 미화할 수 없다
수습기자로 맞았던 1992년 5월 방콕민주항쟁. 30만명 웃도는 시민들이 모여든 민주광장 사남루앙에서 나는 기가 질려 이리저리 정신없이 헤매고만 다녔을 뿐, 내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5월17일 밤, 나는 두눈으로 똑똑히 현장을 바라보았다.
‘세계화’와 ‘쿠데타 중단’의 함수관계
미친 군인들의 총질이 무서워 나는 번개같이 몸을 숨겼고, 그런 내 앞에서 시민들은 하나둘씩 피를 흘리며 죽어갔다. 나는 공포에 질려 거의 이성을 잃으면서도 영원히, 영원히 이 군인들의 만행을 기억하겠노라고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두려움으로 떨리는 손가락 위에 눈물을 흘리며 상황을 기록했다.
5월, 민주화의 계절로 부르는 이 5월이 적어도 내게는 그렇게 고상하고 성스러운 계절이 아니다. 다시는 되풀이되지 말아야 한다는 간절한 기도로 늘 5월을 맞고 있을 뿐이다. 그날로부터 나는 어떤 경우에도 군인들을 믿지 않게 되었고, 어떤 까닭으로든 시민들의 말을 무시하고 무력으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정치집단을 결코 인정해 본 적이 없다.
세월은 흘러, 그날의 ‘저격수’ 수친다 장군은 이제 ‘전설’ 속으로 묻혀가고 있지만, 타이 현대사를 얼룩지게 했던 24번의 크고 작은 군사쿠데타의 역사는 아직도 현실 속에 살아 있다. 학살자 수친다가 아직도 제한없는 풍요로운 삶을 만끽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9년 동안 총리가 몇번이나 바뀌었지만 5월 학살의 원흉들을 손끝 하나 건드려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현장을 뛰는 기자로서, 1992년 5월 그렇게 시민들의 피를 빨아먹었던 그 1991년의 군사쿠데타를 가장 최근의 쿠데타로서가 아니라 마지막 쿠데타로 기록하고 싶다는 깊은 열망을 간직해 왔다. 다행히 1991년 이후 10년 동안 군사쿠데타는 없었다. 이게 아마도 타이 현대정치사에서 가장 ‘심심한’ 기간이 아니었던가 싶다. 그러면서 나는 ‘세계화’의 장점을 하나 발견했다. 그 천박한 세계화의 논리가 적어도 타이 군인들의 행동양식에는 일정한 영향을 끼쳐왔다는 뜻인데, 군인들이 지나치게 투자에 열을 올린 탓으로 쿠데타 엄두를 내지 못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쿠데타, 이것도 이제는 국제시장과 연동- 사실은 지배당해 있는- 되어 있는 탓으로, 발생 즉시 주가가 폭락할 것이고, 즉각 군인 투자가들이 신세를 망치게 된다는 사실을 스스로 잘 깨닫고 있으니, 이 얼마나 고마운 세계화인가! 이 얼마나 감동적인 세계화인가!
이쯤에서 침착하게 5월을 다시 되돌아보자. 그 5월, 그 피의 대가로 적어도 타이에서 중산층이라 자부하는 시민들과 교육 잘 받은 시민들은 제법 진보적으로 바뀐 신헌법을 즐기고 있다. 정부가 지닌 정보를 열람할 수 있고, 남성과 여성 사이의 평등권을 말할 수 있고, 언론의 자유를 만끽할 수 있고… 외형상으로 분명 자유다. 정부 기구들은 개선의 길로 들어섰고, 시민들은 정부의 정책 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기쁨도 일정부분 누리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 어디에도 5월 정신은 없다
그러나 한 움큼만 파들어가 보면 타이사회가 아직 민주적 문화와는 멀리 떨어져 있음을 쉽사리 발견하게 된다. 노동현장을 보자. 거기에는 5월의 숭고한 정신도 민주주의도 없다. 노동자의 현실, 세상이 대개 비슷한 수준이라고 윽박지른다면 할말이 없지만, 타이노동조합은 자본가들의 횡포뿐만 아니라 사회의 문화 행태 탓으로도 신음하고 있다. ‘선임자’ ‘고참’ ‘어른’… 이런 조건들 아래 노동권이나 인간성마저 침탈당하고 있다. 쉽게 말하자면 “사장이 나이 많은 어른이니까” 이 말 한마디에 노동운동이 묵사발되고 마는 실정이다.
상아탑이라 했던가? 대학도 마찬가지다. 선배들이 강요하는 희한한 신입생 어루기 문화는 도도한 전통을 이어가며, 추후 향유할 사회적 지배권을 향해 일찌감치 세습체제를 다져가고 있는 꼴이다.
시민들이 총에 맞아 쓰러져 가던 그날의 잔상이 아직도 눈앞에 어른거리는 내겐 정녕 5월이 보이지 않는다. 타이사회 어디에도 5월의 정신은 없다. 어떤 논자들은 5월의 정신과 열매를 만족스럽게 노래하고 있는 모양이다. “보라 이 얼마나 장엄한 민주적인 자세인가! 벽지의 주민들이 200년 동안 정부가 독점해 왔던 주조권(酒造權)에 대항해 전통소주를 만들겠다고 나설 정도니….” “학생과 교수들이 대학의 시 외곽 이전을 반대하면서 시위를 벌이지 않는가.” “여성들도 승려가 될 자격을 요구하는 이 현실은 또 어떤가.” 이들이 바로, 5월항쟁을 말할 때마다 ‘무선전화기 혁명’이라는 수사를 즐겨쓰며 중산층들의 시위 참여에 큰 비중을 실어온 자들이다. 여긴 불길한 의도가 숨어 있다. 사실은 노동자들과 도시 빈민들이 그 5월항쟁의 주역들이었음을 감추겠다는 불쾌한 시도다.
노동자, 빈민, 농민, 어민, 이런 유로 분류된 시민 구성원들은 그 찬란한 5월항쟁의 열매도 정신도 안아보지 못했다. “5월항쟁의 영웅들, 그 노동자들 그 도시 빈민들은 당시의 경험담을 한마디 재기발랄하게 늘어놓지도 못하는 가운데, 모든 열매는 말과 글을 소유한 이들이 모조리 앗아가버린 실정이다.” 나는 일찌감치 이렇게 말해야 옳다는 걸 느꼈고, 이렇게라도 말해야만 내가 진 5월의 부끄러움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니, 이 또한 얼마나 영악한 현실인지.
이런 가운데 올해도 어김없이 5월은 찾아왔다. 지난 8년간 그래왔던 것처럼 시민들은 화환을 바치고 신문들은 희생당한 영웅들을 추도할 것이다. 또 각종 사회단체는 5월의 참뜻을 세우겠다고 시끌벅적 회의를 열 것이다. 그러나 해마다 5월이면 벌어지는 이런 모든 일들이 의례적인 행위인지 어떤지에 대해서는 마땅히 할말이 없다.
5월, 그 정의와 민주에 대한 정신을 일년에 한두번 기념식장에서 속삭이면 되는 것이라고 믿어본 적도 없거니와, 마치 살인사건에 대해 수사 착수도 해보지 않은 채 사건을 종결해버린 것과 같은 현실을 아무도 나무라지도 않는 그 5월을 나는 정상적인 5월로 받아들일 수가 없다.
피를 더 요구할 것이라는 망측한 예감
5월에 대한 나의 생각이 너무 진부하다고 비난해도 좋다. 나는 <한겨레21>의 원고 청탁을 받아놓고 수도 없이 생각하면서 결론을 내렸다. 적어도 한국에서처럼 5월 주범들에 대해 어떤 형태로든 손을 보기 전에는 절대로 성스럽다거나 아름답다거나 하는 말로 5월을 미화시키지 않겠다는 다짐 같은 것으로.
5월, 타이의 5월 속에서 아직은 불길한 기운을 완전히 지울 수가 없다. 민주화가 정치와 사회 속에서 완전한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는 그리고 민주화가 말과 행동 속에서 안정적으로 정착하기 위해서는 아직도 많은 피를 부를 것이라는, 그런 망측한 예감이 내겐 여전히 살아 있다. 타이사회의 민주화 노정에는 앞으로도 수많은 ‘5월’이 필요하고, 그 5월을 향한 노력들의 첫걸음은 누가 뭐라 해도 학살의 주범들을 밝혀내고 처단해야 한다는 게 나의 슬픈 5월 노래다.
프라윗 로자나프룩(Pravit Rojanapruk)/ <더 네이션> 기자

사진/ 92년 5월 방콕민주항쟁에 가담했던 젊은이들이 결박당한 채 끌려가고 있다. 이 사태 이후 필자는 그 어떤 경우에도 군부집단을 믿지 않게 되었다.(GAMMA)

사진/ 격렬한 항쟁의 자취.(GAMMA)

사진/ 시위대는 진압경찰들에 꽃을 나눠주었다.(GAMM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