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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아물지 않는 르완다 학살의 상처

15년전 폭발한 종족 갈등 지금도 계속… “국제사회 공동 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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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04-16 11:53 수정 : 2009-04-16 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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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완다 학살 15주년을 맞은 지난 4월7일 수도 키갈리 외곽 응얀자 언덕에서 열린 추모제에서 참석자들이 희생자의 넋을 기리기 위해 따로 마련한 관을 안치하고 있다. REUTERS/ HEREWARD HOLLAND
지난 4월7일 르완다 수도 키갈리 외곽의 응얀자 언덕에서 ‘학살 15주년’을 기리는 추모식이 열렸다. 2만여 인파가 모인 가운데 치러진 이날 행사에서 폴 카가메 대통령은 조직적인 학살을 방치한 국제사회의 ‘비겁함’을 질타했다고 <로이터통신>은 전했다. 응얀자의 비옥한 언덕을 뒤덮고 있는 나무 십자가 한개한개가 그 증거로 버티고 섰다.

르완다 학살은 1994년 4월6일 주브날 하비아리마나 당시 대통령이 탄 비행기가 키갈리 공항을 이륙한 직후 격추되면서 촉발됐다. 당장 이튿날부터 르완다 인구의 85%를 차지하는 다수 후투족은 소수 투치족을 ‘바퀴벌레’라 부르며 닥치는 대로 ‘제거’하기 시작했다. ‘피의 살육’은 카가메 현 대통령이 이끌던 투치족 반군단체 ‘르완다애국전선’(RPF)이 그해 7월 키갈리를 장악할 때까지 100여 일 동안 쉼없이 이어졌다.

대통령 탄 비행기 격추되며 촉발

‘학살’의 뿌리는 다른 아프리카 국가와 마찬가지로 식민지배 시절로 거슬로 올라간다. 1차 대전 와중이던 1916년 벨기에가 식민지로 삼은 이래 르완다 땅에선 소수 투치족이 다수 후투족을 압도했다. 제국주의의 전형적인 ‘분할통치’였다. 1962년 독립한 이후 다수 후투족이 르완다 정국을 장악하면서, 상황은 역전됐다. 오랜 세월 ‘군림’해온 투치족은 어느새 ‘사회악의 근원’으로 전락했다. 이웃 나라 우간다로 피해간 이들은 반군단체를 결성하고 국경을 넘보기 시작했고, 후투족 집권세력은 이를 국내 정치에 철저히 활용했다.

하비아리마나 정권도 마찬가지였다. 투치 반군의 존재는 후투족의 단결을 촉구하는 한편 투치족을 탄압하는 명분이 됐다. 1993년 오랜 분쟁을 딛고 하비아리마나 정권과 RPF 사이에 평화협상이 타결됐지만, 혼란상은 쉽게 그치지 않았다. 대통령이 탄 비행기가 격추되자 후투 집권층이 기다렸다는 듯 투치족 말살에 나선 것도 이런 정황에서 기인한 게다. 르완다 투치족 인구 10명 가운데 1명꼴로 목숨을 잃었으니, ‘나치의 유대인 학살보다 참혹했다’는 평가도 무리는 아닐 게다. 학살의 마수는 투치족에 ‘미온적으로 대응’한 후투족에게도 뻗쳐갔다.

‘학살 15주년’ 추모식이 열린 응얀자 언덕은 그 미쳐 돌아간 시절의 축소판이다. 그해 4월6일 르완다 정부군은 이곳 주변에 주둔하고 있던 유엔 평화유지군의 일원인 벨기에군을 급습해 10명의 사상자를 냈다. 벨기에군은 즉각 철수했고, 줄잡아 5천 명이 그 언덕에서 삽시간에 스러져갔다. 카가메 대통령은 이날 행사에서 “보호해주겠다던 이들을 저버린 그들은 죄가 없는가”를 물었다. 학살을 용케 피한 생존자 단체인 ‘이부카’의 베노이트 카보위 사무총장은 〈AFP통신〉과 한 인터뷰에서 “응얀자 언덕이야말로 인류애가 무너져내린 상징적인 장소”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크게 틀린 말은 아닐 터다.


학살을 경험하고도 평화는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애초 후투-투치 연립정부를 구성했던 카가메 대통령은 이후 후투 세력을 몰아내고, 투치 단독정부를 이끌어오고 있다. 종족 간 분열을 국내 정치에 이용하는 옛 버릇도 여전한 채다. 눈앞에서 펼쳐지는 학살극을 사실상 방치했던 국제사회는 어떨까?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4월7일 성명을 내어 “학살을 막는 것은 인류 공동의 책임”이라고 강조했지만, 현실은 사뭇 다르게 펼쳐지고 있다.

영국서 학살 연루자 추방 안 해

〈BBC방송〉은 4월8일 인터넷판에서 “1994년 학살극에 연루된 혐의를 받고 있는 르완다 출신 영국 시민권자 4명에 대해 영국 고등법원이 추방시켜선 안 된다는 결정을 내렸다”고 전했다. 수도 키갈리에서 후투족 민병대를 이끌고 학살을 주도한 혐의를 받고 있는 의사 출신의 빈센트 바지냐(영국명 빈센트 브라운)를 비롯한 이들 4명은 지난 2006년 12월부터 영국 당국에 구금된 채 강제추방 처분을 취소해달라며 소송을 벌여왔다. 〈BBC방송〉은 “재판부가 이들의 손을 들어준 이유는 르완다로 돌아가면 공정한 재판을 받을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라며 “이는 1950년 체결된 유럽인권협약 제6조가 규정한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에 근거한 판결”이라고 덧붙였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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