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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탐험 낭만주의’의 허와 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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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05-15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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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의 산 상징 헤위에르달… 역사적 현실과 무관한 탐구를 긍정적으로만 볼 수 있을까

사진/ 토르 헤위에르달. ‘마지막 바이킹’이란 별명을 가진 그는, 86살의 나이에도 매년 발굴과 탐험에 열중한다.
노르웨이에 대해서는 잘 몰라도 토르 헤위에르달(Thor Heyerdahl·1914년생)이란 이름을 아는 이는 꽤 있을 것이다. 1947년에 시작되어 현재까지도 그칠 줄 모르는 헤위에르달의 항해 탐험은 세계적으로 큰 명성을 떨치고 있다. 1947년의 콘티키 뗏목 탐험에 대한 헤위에르달 자작의 영화가 1951년 미국 오스카상을 받은 뒤에, 헤위에르달은 국제적 미디어 스타가 되어 지금까지도 그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그의 책은 70개 국어 약 6천만부의 부수로 세계적 신기록을 세웠으며, 그에 대한 영화나 뉴스는 지금도 세계 주요 방송사의 ‘단골 메뉴’에 속한다. 오슬로의 주요 명승지 중 하나인 헤위에르달의 ‘항해탐험박물관’(www.kon-tiki.no)은 국내외 관광객으로 늘 붐비고 있다.

파쇼 독일 치하에서의 비극적 경험

물론 현재 자본주의 세계의 대부분의 상업적인 대중 미디어 스타에 비해 노르웨이의 산 상징인 그가 훨씬 인간적인 모습을 내비치는 게 사실이다. 국제적인 명성으로 귀결된 그의 탐험은, 1936년의 신혼여행부터 시작됐다. 아내를 갓 얻은 그는 혐오스러운 ‘서방의 기계문명’을 떠나 남태평양 지역에서 둘만의 ‘작은 낙원’을 찾고자 했다. 결과적으로, 남태평양의 ‘낙원’에 대한 그의 관심은, 이스터섬 원주민 기원문제의 연구와 1947년의 첫 뗏목 탐험으로 이어졌다. 저명한 노르웨이 탐험가인 그의 대선배인 난센과 달리, 헤위에르달의 정치·외교 불참여 원칙도 상당히 이상적이다.


사실 국가와 조직 사회에 대한 헤위에르달의 혐오증은, 역사 체험의 비극적인 경험에서 비롯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파쇼 독일이 노르웨이를 침략·점령했을 때 파시즘을 체질적으로 거부한 헤위에르달은 아내와 아이를 데리고 곧장 영국으로 망명했다. 그러나 영국에서 그는 취직을 하지 못하여 궁핍과 배고픔을 맛보게 된다. 국민의 생계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는 자유시장 체계에 대한 그의 거부반응과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호감은 그때부터 비롯됐다. 굶어죽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독일로부터의 조국 해방에 도움을 주기 위해서, 헤위에르달은 반(反)독일전쟁에 나아갈 노르웨이 계통 망명객으로 구성된 ‘자유 노르웨이’ 특무 부대에 지원하여 공작원의 훈련을 받았다. 적국 보초병 살해방법, 폭탄 투척법…. 서양 기계문명 중에서 전쟁과 살해라는 측면을 가장 거부했던 평화주의자인 그는 본의 아니게 살인교육을 받아 결국 살인의 현장에 투신돼야만 했다.

그러나 웬 행운일까? 상병 헤위에르달이 소속된 ‘자유 노르웨이’ 공작대가 소련군에 합류해서 독일군 점령하의 노르웨이로 잠입하기 바로 직전에, 작전을 지휘했던 소련 군관이 헤위에르달을 불러 “이름이 병적(兵籍)에 잘못 기입돼 있다”는 이유로 그를 영국에 귀환시킨다. 결국 헤위에르달은 런던으로 돌아갔고, 그 공작대는 적군과의 격전에서 전몰돼버렸다. 관료주의적 소련 군관이 그의 인생을 구해준 셈이 되었다. 그리하여 그를 살해와 폭력적인 최후로부터 구해준 ‘신(神)의 섭리’에 대한 고마움, 그리고 전쟁과 살해를 합법화하는 국가제도에 대한 본능적 혐오증을 헤위에르달은 평생토록 간직해왔던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러시아나 한국 같으면 ‘조국해방전쟁’에서의 적극적 참전과 많은 성과(살해된 적군의 숫자인 전과)가 자타가 인정하는 명예로운 애국이 되는 반면 노르웨이에서는 전우에 대한 애착과 살인에 대한 혐오증이 묘하게 엇갈리는 헤위에르달의 인간적 심정이, 그를 대중의 사랑을 받는 영웅으로 만드는 측면도 있다. 지성이면 감천으로, 살해의 죄를 피하게 해달라는 그의 간절한 기도를 신(神)이 들어주었다는 시각도 이곳에서 상당히 강하다. 그러나 20세기 항해 탐험의 대명사가 되어버린 헤위에르달의 활동과 그 활동을 뒷받침해주는 이론의 적지 않은 문제점들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전파론’이 비서구사회에 끼치는 해악

사진/ 파피루스배 라(RA)호를 타고 가는 1969년의 헤위에르달의 탐험대.
사진/ 그가 탐험했던 남태평양 이스터섬에서 발굴된 유골들. 원래 약 5천∼6천명이었던 이곳의 인구는 19세기 동안 유럽인에 의한 학살·납치·노예화·알코올 판매·성병 전염 등으로 100명으로까지 감소됐다고 한다.


첫째, 그의 탐험들의 이론적 근거를 이루는 것은 역시 극단적인 ‘전파론’이다. 그의 연구의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은, “A문화가 B문화에 어떤 루트, 어떤 이민과 기술 전수를 통해서 영향을 주었는가”라는 문제다. 미디어에 의해 세계적 명성을 얻은 그의 탐험의 주요 학술적 목적은, “고대인의 항해술로서 A지점부터 B지점까지의 항해가 실제로 가능했다”는 것을 “몸으로” 입증하기 위함이었다. 즉 1947년에 그가 최초의 탐험으로 뗏목을 타고 남미대륙에서 폴리네시아군도까지 4300마일의 거리를 101일 동안 정복했던 일은, 뗏목을 잘 만들었던 고대 페루 주민들이 폴리네시아로 이주하여 거석(巨石) 문화를 전파시켰다는 자신의 가설을 입증하기 위한 실험이었으며, 2년이나 걸렸던 파피루스배 라(RA)호의 대서양 횡단 탐험은, 파피루스배를 타고 다녔던 고대 이집트 주민들이 고대 남미문명에 영향을 주었다는 자신의 학설을 실증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한 종족이나 문명권의 사회 구조의 특징과 자생적인 발달의 연혁과 같은(재미없고 귀찮은) 사회·정치·경제사는 무시하고 일반인의 이목을 쉽게 끌 만한 ‘위대한 종족 이동·문화 전수’에만 집중적인 관심을 둔 것은, 대중의 사회과학 의식의 계발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인가? 더군다나 “궁극적으로 폴리네시아문화도, 남미문화도 고대 이집트의 영향으로 커져갔다”는 그의 결론은, 폴리네시아나 남미를 원시적인 주변부로 취급하고 지중해문명의 일부인 이집트를 매우 중시하는, 고전적인 서구 중심주의적 사관(史觀)과 위험할 정도로 일맥상통한다.

물론 “역시 이집트는 세계 문명의 원조다”와 같은 결론을 내려야 학교에서 ‘이집트 문명의 위대성’을 배웠던 유럽인·미국인 사이에 인정과 인기를 누리기가 쉽지만, 그의 단순한 ‘전파론’이 비(非)서구문화들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 과연 긍정적으로 기여하는지 의심해봐야 할 일이다. 사실 고대사회의 내재적 발전을 무시하는 기마민족 이동설이 요즘 한국의 재야 사학계를 휩쓰는 것은, 유럽·미국에서의 헤위에르달식의 전파론이 인기를 누리는 현상과 과연 무관하다고만 할 수 있을까?

둘째, 헤위에르달의 낭만적인 신혼여행이 시작된 낙원과 같은 타히티섬도, 그가 평생토록 연구해온 이스터섬도, 그리고 그의 고고학적 발굴의 주요 현장인 페루도, 다같이 유럽인에 의해서 짓밟히고 파괴된 식민지·탈식민지사회들이다. 특히 타히티섬이나 이스터섬의 경우는 그 인구가 유럽인에 의해서 옮겨져 온 병(病)과 알코올, 그리고 유럽인에 의한 학살과 착취로 급속히 축소되어 거의 멸종위기에 이르렀다. 기독교의 강압적인 선교나 유럽·미국 대중문화의 잠식에 의한 자국문화의 손실과 파괴는 이루 말할 수도 없다.

하지만 고대문명의 항해 루트 탐구에 열중하는 헤위에르달은, 그가 속하는 서구사회의 죄악에 대해서는 놀라울 만큼 침묵한다. 정치에 대한 그의 혐오증은 이해할 수도 있지만, 역사적 가해자 집단의 일원이 가해 사실을 외면하고 현실과 무관한 탐구에만 몰두하는 것은 결코 긍정적으로만 볼 수는 없다. 서구 기계 문명을 피하면서도 실은 그 문명의 미디어를 매우 능숙하게 이용하고는 그 문명이 남에게 끼친 역사적 죄악을 결코 외면하는, 세계적 탐험가 헤위에르달…. 그러나 역사적 피해국의 입장에서는 그가 극히 오만하고 무책임적이며 낭만적인 서구 귀족이며, 자신들의 역사적인 책임을 잘 기억하려고 하지 않는 대부분의 유럽인들을 대표한다는 사실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탐험의 무대에 남은 것은…

노르웨이의 시민적 영웅, 헤위에르달이 대표하는 미디어 학술은 과연 그 인기만큼 서구인들의 세계 인식에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다주었는지는 필자로서 의심하는 바이다. 그의 탐험이 부유한 노르웨이를 탐험의 종주국으로 만들기에 크게 기여했지만, 탐험의 무대가 되어준 남태평양·남미의 주민들에게 결국 남은 것은 여전한 가난과 술중독이다. 그의 책을 읽고 그의 영화를 본 노르웨이 젊은이들은 그들의 조국 노르웨이에 대한 긍지를 느끼긴 했겠지만, 제3세계의 비극과 가해국에 대한 정확한 의식은 전혀 가지지 못했을 것이다. 헤위에르달의 인본주의적·평화주의적 면들이 우리에게 좋은 교훈을 가르치기도 하겠지만 자신의 재미와 도피의식으로 시작되고 자신과 같은 서구인의 재미로 끝난 헤위에르달의 탐험은 결국, 서구인들의 귀족적인 자기 중심주의의 일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줄 뿐이다.

박노자/ 오슬로 국립대 교수·한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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