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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아로요, 당신이 준 것은 절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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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05-08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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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랍 지지 시위의 원인은 빈곤한 빈민 정책… 시위를 계기로 의회선거 겨냥한 아로요의 ‘잇속 챙기기’도

사진/ 에스트라다를 지지하는 시위 군중들. 이날 충돌로 민간인 4명, 경찰 2명이 사망했다.(AP연합)
지난 4월25일, TV화면에는 과거 영화배우 출신인 에스트라다 전직 대통령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팻말 앞에서 상반신 좌우 사진촬영을 하는 모습이 클로즈업됐다. 그리고 그가 장기 수감될 특별 감옥의 내부를 언론은 앞다투어 소개하고 있었다. 전직 대통령의 예우차원에서 특별 감옥은 바깥출입을 하지 못할 뿐 침대, 에어컨, 냉장고 등 각종 편의 시설이 돼 있는 ‘자그마한 저택’이었다. 그동안 줄기차게 에스트라다의 구속 수감을 요구한 시민사회단체는 당연히 환영의 성명과 함께 아로요의 개혁을 지지한다고 발표했다. 특히 지난 1월20일, 에스트라다를 추방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시민사회단체연합 공동기구인 시민사회단체공동의회(KOMPIL II) 성명에는 한국의 예를 들면서 부패한 대통령에게는 준엄한 심판이 언제든 있어야 함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같은 날 에스트라다를 축출했던 바로 그 장소인 에드사 성당에서는 수많은 빈민들이 에스트라다쪽에 의해 동원되어 에스트라다 석방, 아로요 퇴진을 외치기 시작했다. 이미 충분히 예견된 항의 시위였기에 애써 무관심한 태도를 보였던 아로요 정부와 시민사회단체들은 5월1일 노동절행사를 통해 에스트라다 구속 환영집회 열고 사태를 무마시키려 했다. 그러나 이런 느긋한 계획에 한발 앞서 에스트라다쪽은 4월29일 밤, 대통령 집무실인 말라카냥으로 시위 행진을 시작했고 민간인 4명, 경찰 2명이 사망하는 소요사태로 발전하게 되었다. 최근 외신을 통해 필리핀 소요사태를 접한 사람들은 부패혐의로 구속 수감된 에스트라다와 그를 지지하는 빈민들 그리고 피플파워를 통해 대통령이 된 아로요를 어떻게 봐야 할지 궁금해한다.

“에랍은 들어주는 척이라도 했다”


사진/ 아로요는 이번 사태를 계기로 군과 경찰의 충성심을 확실히 다지는 소득을 얻었다.(AP연합)
13명의 상원의원과 200여명의 하원의원 그리고 자치단체장 및 의원을 선출하는 5월14일 총선을 앞두고 발생한 이번 소요사태는 필리핀 사회의 누적된 각종 문제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중요한 시사점을 제시한다.

우선, 아로요쪽은 이번 시위를 통해 외견상으로는 잃은 것보다 얻은 것이 많은 것으로 보인다. 먼저 취임 이후 불안했던 군과 경찰의 충성심을 이번 기회를 통해 확실히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에스트라다쪽의 쿠데타설 유포(쿠데타 시도는 아직도 구체적으로 확인된 바 없고, 실제 군대의 움직임도 없었다)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아로요에 대한 이들의 충성심을 강화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또한 이번 소요사태를 빌미로 소요사태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했던 에스트라다쪽의 상당수 선거 출마자들의 발목을 잡은 것도 아로요의 소득이다.

필리핀은 상원의원 재적 25명 중에 절반을 3년마다 번갈아가면서 선출하도록 돼 있다. 이번에 13명의 상원의원을 선출하게 돼 있는데, 아로요쪽은 ‘민중의 힘 연합’(PPC) 이름으로 13명의 출마자들이 나섰다. 에스트라다쪽도 에스트라다의 부인인 로이 에스트라다를 포함한 13명이 출마했다. 이번 선거는 지난 1월20일 민중혁명 이후 3400만 유권자들이 현 정부의 신임을 묻는 중요한 정치 무대인 것이다. 그러나 최근 각종 여론조사에 의하면 아로요쪽이 7 대 6으로 불안한 우세를 보이고 있었다. 야당이면서 상원의 다수를 점하고 있는 에스트라다의 ‘필리핀평민연합당’(LAMP)에 비해, 이런 박빙의 승리는 집권당이면서 소수를 점하고 있는 ‘국민의 힘당’(NUCD)으로서는 결코 안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 소요사태를 계기로 해서 에스트라다쪽 상원의원 출마자 4명을 포함한 11명에 대해 체포명령을 내림으로써, 선거결과에 상관없이 소요사태 주동 책임을 물어 구속수감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든 것이다.

아로요의 또다른 소득이라고 한다면 에스트라다 하야 시위에 적극적인 참여를 하면서도 동시에 아로요에 대해서도 정책 비판을 함께 했던 시민사회단체로부터 적극적인 지지를 받게 된 것이다. 에스트라다쪽이 주도한 이번 소요사태로 시민사회내에서는 최악을 막기 위한 차선의 선택으로서 아로요의 지지를 표명하는 움직임이 서서히 일고 있다.

그렇다고 아로요가 모든 것을 모든 것을 다 얻은 것은 아니다. 갈수록 빈부격차가 심각해지는 필리핀에서 국민의 39%를 차지하는 절대 빈곤층은 언제든 사회적 불만을 다양한 형태로 폭발시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시위에 참가한 빈민들은 에스트라다쪽에 의해 일당을 받고 참여한 사람(1인당 약 500페소에서 1천페소까지 받았다고 한다), 진심으로 에스트라다를 지지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에스트라다를 지지해서라기보다 아로요의 빈민문제에 대한 정책 빈곤을 꼬집는다.

에스트라다지지시위에 참가했던 조안(38)은 “우리는 일자리도 먹을 것도 없다. 그렇다고 아로요가 우리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모습도 볼 수 없다. 에랍(에스트라다의 애칭)은 부패했지만 가끔 와서 들어주는 척이라도 한다.” 사실, 아로요 대통령은 지난 1월 도시빈민과의 대화에서 “현재 진행되고 있는 모든 국공기관에서 진행하고 있는 철거계획을 중단하고 주민들의 의견을 수렴하겠다”고 약속했지만 한달도 못 되어서 약속은 깨지고 말았다.

전직 대통령의 딸로서 부자와 지식인을 대변하는 듯한 아로요 대통령보다 의적 역할을 도맡았던 영화배우 출신의 에스트라다에게 빈민들은 그나마 정서적인 공감대를 갖고 있다. 에스트라다의 수많은 부정, 부패 그리고 본처 이외에 확인된 것만 7명에 달하는 첩에게 고급 주택과 빌딩을 사준 것을 잘 아는 빈민들이지만 이렇듯 에스트라다 지지 시위에 자연스럽게 참가하는 것은 실질적인 도움을 절실히 원한다는 것을 표명하기 위해서이다.

부패한 관료사회가 개혁의 장벽

소요사태가 한참인 지난 4월30일 한 성당에서는 에스트라다 지지나 반대와 상관없이 주요 빈민지역의 주민지도자들 모임이 있었다. 시민단체와 함께한 이 워크숍에서 지역의 주민지도자들은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누군가가 우리의 현실을 바로 보고 우리의 입장을 대변하고 우리에게 실제로 필요한 것을 지원해주는 것이다”라며 이번 사태와 상관없이 정책건의안을 만들어서 전달할 것을 결의했다.

이런 분위기를 반영하듯 소요사태 이후 지난 5월3일과 4일 사이에 구속수감된 에스트라다를 전격방문하여 악수를 하거나, 구치소를 방문하여 소요사태에 참가하여 구속수감된 100여명의 빈민들 나누는 등 아로요는 대담하고 적극적인 행동을 통해 빈민들에게 정서적 위안을 주기 위한 노력을 시작했다.

라모스 대통령 재임기간중에 법령으로 제정했던 ‘탈빈곤 정책법령’은 제정 당시에만 해도 획기적인 안이었다고 할 수 있다. 대통령을 위원장으로 하여 관련정부기관과 노동자, 농민, 빈민 관련 시민사회단체를 반반으로 구성한 300인위원회(NAPC)는 탈빈곤 정책을 주도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관이다. 지난 5월3∼4일에 말라카냥궁에서 열린 이 위원회에서는 감소추세에 있었던 빈곤층이 IMF지원 이후 오히려 실업자와 절대 빈곤층이 늘어나는 추세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를 논의하였다. 그러나 갈수록 드세지는 세계화의 압력 속에서 소외된 계층을 위한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기에는 이미 부패한 관료사회가 너무도 크게 버티고 있다. 이날 제시된 자료에 의하면 빈곤계층을 위한 예산이 실제로 빈곤계층에 전달되는 것은 30%에 미치지 못하고 있었으며 노동자를 위한 주택보급자금은 단 한건도 실행되지 않았다. 움직이지 않는 관료사회는 빈곤층의 불만을 더 누적시키고 있었다.

부패한 보수 정치세력과의 힘겨운 싸움을 하면서 동시에 갈수록 심해지고 있는 빈부격차를 해결해야 하는 필리핀. 지금 아로요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아야 하는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는 중이다.

마닐라=나효우 통신원 nahyowoo@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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