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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다시는 실패하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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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05-02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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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의 희생을 밟고 섰던 종군기자의 욕망… 두 번째 국제결혼에서 어리석음을 깨닫다

메이지유신 때부터 일본은 서양을 받아들이려고 애써왔다. 국제결혼도 그 가운데 한 주제가 되어왔지만, 현실 속에서는 별로 경우를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다가 2차대전중에는 오히려 서양인을 공포의 대상이나 증오의 대상 같은 마귀로 여기도록 교육시켰다. 이건 아시아나 아프리카 사람들을 천하게 보도록 편견을 주입시킨 것과 같은 논리였다. 이런 썩어빠진 아이디어는 패전을 통해 부서지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전쟁과 비이성적인 의식을 살포했던 히로히토왕은 건재했다. 일본을 지배한 미국이 공산주의의 확장을 두려워해 특특급 전쟁범죄 수괴인 그를 처형시키지 않았던 탓이다.

한국 여학생과의 좌절된 첫사랑


사진/ 91년, 필자의 두 번째 결혼식. 타이-캄보디아계 신부의 손에 반지를 끼워주고 있다.
대신 미국의 문화와 상업주의는 일본인들을 몸살나게 하며 사고의 변화를 촉진시켰다. 나의 경우는 미국 텔레비전이 주범이었다. 거대한 규모로 뭐든 속시원히 깨부수는 미국 방송은 어린 시절 내게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런 미국 방송을 통해 히피문화와 학생운동 같은 국제사회의 경향성을 깨달았으니 한편으로는 기구한 인연이기도 하다.

어쨌든 나에게는 늘 열린 세상을 향한 우연한 기회들이 찾아왔다. 이 기회들은 내게 반보수적인 입장에 서도록 나를 자극해왔다. 나의 첫사랑은 1966년 첫 해외여행지였던 한국의 여학생이었다. 당시 나는 학보사 기자로 한국과 일본을 휩쓸었던 학생운동을 취재하기 위해 관광객으로 신분을 속여 서울로 들어갔다. 6개월이나 기다려 얻은 한국 비자로 단 2주 동안 머물렀던 한국이었지만, 한국 여학생과 나눈 순결한 정신적인 사랑은 해를 넘길 만큼 깊어져갔다. 그 무렵 나는 어머니께 그 한국 여학생과 결혼하고 싶다고 말했다.

어머니는 별로 충격을 받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몹시 황당해 하셨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장난을 좋아했던 기숙사 친구가 거짓으로 쓴 가짜 편지- 매우 불결한- 때문에 결국 그 여학생과는 편지 교환마저 단절되었다.

이 한심한 사건은 35년이 지난 아직까지도 비통하고 부끄러운 나의 개인사로 남아 있다. 첫사랑의 애절함에 사무쳐 있던 나는, 1972년부터 3년 동안 취재했던 캄보디아 전쟁터에서 만난 중국계 캄보디아 여성과 결혼했다. 당시 우리는 결혼 계획도 준비도 없었는데, 캄보디아 해방군(크메르루주)의 프놈펜 입성으로 선택의 여지가 없어졌다. 어떻게 해서든 그 여성을 안전한 곳으로 데리고 나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고, 나는 해방군이 프놈펜에 입성하기 5일 전 그 여성을 데리고 부랴부랴 한 목사를 찾아가 결혼서약을 하고 가짜 혼인증명서를 만들었다.

이 급조된 결혼에서 나는 어쨌든 매우 사랑스런 딸을 얻었지만 가족들을 돌볼 수가 없었다. 종군기자로 성공하겠다는 개인적인 욕망과 가치를 일상적인 가족의 행복보다 더 중요한 전제로만 여겼기 때문이었다. 결국 아내와 마찰이 계속되었지만, 대개의 아시아 남편들처럼 나는 아무런 설명도 변명도 하지 않았다. 이런 나의 태도는 더 깊은 화근이 되고 말았다.

우리의 결혼생활이 파국으로 치닫는 동안, 나는 우연히 타이-캄보디아계 여성을 만나게 되었다. 나는 이 여성과 눈이 마주친 바로 그 순간 숙명 같은 기운을 느꼈다. 이 여성과 관계를 지속하면서도 나는 사랑하는 내 딸과 함께 살 수 없을 것이라는 두려움에 빠져 우유부단하게 어떤 결정도 내리지 못했다. 그러다 나는 딸에게 이 여성을 소개시키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내 딸은 본능적으로 이 여성을 미워했다. 나는 충격을 받았고 내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깨달았지만, 이미 너무 늦은 뒤였다.

인종과 국적으로부터 자유롭게…

얼마 뒤, 첫 번째 아내는 잘생기고 젊고 유능한 일본 남자를 만나면서 내게 이혼할 것을 요구했다. 나는 받아들였다. 그로부터 나는 새롭게 만난 여성과 9년 동안 함께 살면서 딸 하나 아들 하나를 낳았다. 이 아이들이 4살과 3살이 되던 1991년 나는 다시 두 번째 결혼식을 올렸다. 내가 두번씩이나 국제결혼을 하게 된 것은 나의 의식이 인종이나 국적의 문제 같은 것들로부터 자유로웠던 탓이기도 하거니와, 한편으로는 식상한 일본사회 또는 지루한 일본인에 대한 거부감 같은 것이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여겨진다.

나는 국제결혼이라는 말 자체를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다. 같은 사람끼리 결혼하는 일인데, 뭐가 별나거나 뭐가 다르다는 말인가. 어쨌든, 나이가 들어갈수록 나는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종군기자라는 전문적인 직업보다 훨씬 더 높은 개념으로 여기게 되었고, 내가 젊음을 바쳤던 전쟁과 내 일 때문에 희생당했던 가족들을 위해 남은 삶은 바쳐야겠다는 각오를 다져간다.

나오키 마부치(Naoki Mabuchi)/ 전 카메라맨·종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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