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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한국인으로서의 자각,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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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05-02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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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구의 입양인 ‘야르네 뷰레’가 스칸디나비아적 성격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

사진/ 태릉경찰서 앞에서 버려진 뒤 세살 나이로 노르웨이에 입양된 야르네 뷰레. 체질적으로 합숙생활이나 명령 체제를 받아들일 수 없게 됐지만, 한국이 이 측면에서 너무나 다르다는 것도 알게 됐다.
만약 일반 노르웨이 사람에게 “코리아(Korea), 하면 무엇이 연상되느냐”고 물어보면 무슨 대답이 나올까? 필자의 경험으로 봐서는 보통 남북한 대립, 북한의 기아, 현 정부의 햇볕정책, 문선명의 종교단체와 사이비종교 문제, 그리고 한국계 입양인에 관한 대답들이 가장 보편적이다. 특히 정치·사회 문제에 무관심한 일반인이라면, 한국을 주로 ‘입양인’과 연관시키는 사람들이 꽤 많다. 노르웨이를 포함한 서구 여러 나라에 약 2만5천명 정도의 한국계 입양인들이 살고 있고 한국계 입양아에 대한 북구인들의 선호도가 매우 높다는 사실은, 그 주된 이유가 될 것이다. 선호도가 높다는 것은 “한국 아이들이 성실하고 공부를 잘하며 효심이 출중하다”는 북구의 보편적인 의식에 기인된다. 그 의식을 실제로 뒷받침해주는 것은, 대부분의 한국계 입양인들의 높은 교육열과 성실한 사회생활, 그리고 토박이들이 선망하는 ‘가정에 대한 충실성’이다.

국제적 입양에 대한 진보세력의 비판

그러나 이와 같은 긍정 일변도의 일반 의식과는 대조적으로, 스칸디나비아의 많은 좌파 이론가들과 일부의 입양인들은 국제입양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를 제시하기도 한다. 그들에 따르면 ‘유색인종’(준주변부)의 영아들이 ‘백인종’(핵심부)으로 수입되는 것은, 결국 지구의 ‘부유한 서양’과 ‘가난한 동양’의 불평등한 교류 중 한 종류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 불평등하다는 것은, 교류의 주요 동기가 수입자쪽의 사정인 매우 낮은 출생률과 욕구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과, 입양인이 ‘유럽적’인 것들이 몸에 배어 ‘완벽한 유럽인’이 되는 반면 입양가정은 ‘한국적’이거나 ‘동양적’인 것들에 대한 관심을 보통 가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라는 주장이다. ‘동양적인 얼굴에 서양적인 마음’을 가진 입양인이 간헐적인 인종차별에 노출된다는 우려도 있고, 유럽 일변도의 입양인의 성장 분위기를 동양인으로서의 성장 가능성의 박탈이나 문화적 인권의 박탈로 보는 시각도 있다. 결국, 많은 진보파 이론가의 거시적인 시각으로는, 동양적 얼굴을 가지면서도 유럽 일색의 성장과정으로 말미암아 동양의 언어·문화에 대해서 관심조차 가질 기회도 없었던 입양인들은, ‘넓은 의미의 서양 침략’에 의해서 철저하게 파괴된 비(非)서구권의 정체성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국제적 입양에 대한 이와 같은 진보파의 비판이 상당한 타당성을 가진다는 것은 자명하다. 15만∼20만명 정도의 한국계 입양인들이 서양세계에 흩어져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한국인들이 알게 모르게 느끼는 수치심·자괴심(自愧心)도, 이와 같은 비판의 당위성을 입증한다. 그러나 거시적 입장에서의 비판 못지않게, 입양과 입양인에 대한 미시적인 연구도 필요하다. 즉, 입양인들의 문화적인 체험에서 ‘서양적 환경’과 ‘한국적 혈통’이 어떻게 상호간 작용했는가 등도 자세히 알아야 입양문제 전체에 대한 좀 더 정당하고 정확한 의식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대부분의 입양인들은 ‘한국적 혈통’과 전혀 무관한 일반 노르웨이 사람의 생활을 하며 살고 있다. 그런데, 필자가 만나보고 인터뷰한 야르네 뷰레(Jarne Byhre: 한국 이름-최경수(崔敬洙)·29살)는 매우 예외적인 경우에 속했다. 일찍이 한국인으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인식하여 스웨덴 스톡홀름대학 한국어학과를 졸업한 그는, 연세·고려대학교에서 한국어를 실습한 뒤 현재, 오슬로대학교 한국어 강사로 재직하면서 대체복무를 하고 있는 중이다. 아래에서는 자신의 생애와 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뷰레의 이야기 주요내용을 줄여서 실어보겠다.

태릉에서 태어나 태릉경찰서 앞에서 버려진 뷰레는, 국내 몇 군데의 고아원들을 전전한 뒤에 세살 나이로 노르웨이에 입양됐다. 한국어는 몇 마디밖에 기억하지 못한 그는, 자신을 ‘보통 노르웨이 사람’으로 인식하면서 좋은 환경 속에서 행복하게 자랐다.

“폭력 근처에도 가지 않겠다”며 대체복무

사진/ 현대 미술조각품으로 장식된 오슬로시청 모습. ‘별종의 한국인’들이 외국에서 터득한 바를 한국인들에게 전수하는 교류는 한국사회의 선진화에 기여할 것이다.
작은 지방도시의 한 학교를 다녔던 그는, 완벽한 토박이식 노르웨이어와 몸에 밴 노르웨이적인 습관 덕분인지 노르웨이 아이들에게 추호의 소외도 느끼지 않았다. 그러나, 이와 같이 별 문제없이 자라 ‘노르웨이화’된 그는, 중학교 시절부터 왠지 별다른 명확한 이유도 없이 ‘한국’이라는 기억에 잘 남지도 않은 곳에 대한 무한한 관심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가 살았던 지방도시에서 한국에 대해서 구할 수 있는 서적이란, 유신 시절의 박정희 정권이 찍어낸 홍보용 영문책자 수준이었다. 영문을 아직 빨리 읽지 못하는 노르웨이 중학생 뷰레는 주로 그 책의 사진에 빠졌다. 깔깔 웃으면서 떼를 지어다니는 귀여운 시골 여자아이들, 스칸디나비아에서 보기 힘든 제복을 입고 단체적으로 일하는 노동자들, 아직은 소달구지를 타고 다니는 꾸밈없는 얼굴의 농민…. 뷰레는 이 사람들과의 엄청난 문화적·지리적 거리를 느끼면서도, “나도 어쩌면 나와 똑같이 생긴 이들 중 한명이 아닐까?”라는 의식을 날로 굳혀갔던 것이다. 심리학자이자 열렬한 다(多)문화주의자인 그의 양부모들이 그의 ‘한국인으로서의 자각’을 이해해주고 반겨주었다는 것을, 그는 매우 고맙게 여긴다.

“명실상부한 한국인이 되기 위해서” 고전기타 연주자의 꿈을 접고 스칸디나비아의 그 당시 유일한 스톡홀름대학 한국어학과에 들어간 그는,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되찾겠다는 입양인들의 모임의 열성적인 멤버가 됐다. 그러나 스톡홀름대 학생 시절 연세·고려대학교로 꿈꾸었던 한국 유학(1996∼98년)을 다녀오고 나서 그가 확고히 느낀 것은, 한국인이면서도 자신의 스칸디나비아적 성격을 완전히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가 포기할 수 없는 스칸디나비아적 성격이란 무엇을 의미했는가?

첫째, 그의 최고의 즐거움은 혼자서 생각하고 미술·예술을 즐기는 일이다. 이와 같은 취향 때문에, 그는 한국에서도 신문 읽기마저도 거의 안 했다. 남의 글만 계속 읽느라 시간보내면 자기 성찰을 언제 하느냐는 것은 그의 좌우명이었다. ‘외톨박이’‘괴짜’들을 존경해주고 이해해주는 스칸디나비아사회에서 그런 성격으로 살아가는 데 별 어려움이 없지만, 부단히 ‘인연’들을 만들어서 챙겨주어야 하는 어울리기식의 ‘회식 문화’ 중심의 한국사회에서 그의 생존 능력이 약했던 것이다.

둘째, 뷰레에게 국가 조직이나 군대를 거부하고 부정하는 것은, 일종의 ‘가통’(家統)이었다. 그의 양부도 이미 1950년대에 군 복무를 거부하여 그 당시 비교적으로 흔치 않았던, 대체복무를 택했기 때문이다. 뷰레도 지금 한 학교의 학생폭력 방지 상담요원으로 대체복무를 하고 있는 중이다. 젊은이들로 하여금 폭력의 길 근처라도 가지 않게 하는 게 좋다는 것이 그의 평소 신념이라는 것이다.

한국에서 사회참여의 기회가 확대되기를

“전문적 군인 자체가 지구상에 없다면 폭력도 사라지겠다”는 그의 정치적 신념도 한몫 했지만, 그가 이미 체질적으로 합숙생활이나 명령 체제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도 이유라고 한다. “남이 시키는 대로만 하면 퇴보하여 비인간화할 것 같다”는 것은 그의 주된 생각이다. 평화주의가 강한 노르웨이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뷰레의 이러한 생각들이 별로 유별나게 보이지 않지만, 한국이 이 측면에서 너무나 다르다는 것을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셋째, 한국의 이른바 ‘명문대학교’에서 몇년 동안 공부해본 뷰레의 느낌으로는, 재미와 지적인 관심(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 회복)의 충족을 위해서 공부하는 것을 당연시하는 그로서는, 취직과 성공을 위해 인맥을 쌓아 출세하기 위해 공부해야 한다는 한국 대학교의 패턴에 자신을 ‘뜯어맞추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고 한다. 전체적으로, 돈과 사회 신분의 획득을 최종목표로, 그리고 ‘연줄 만들기’를 주요 수단으로 할 수밖에 없는 현대 한국의 일상생활이란, ‘술 실력’(?)도 전혀 없는 그로서는 견디기가 너무 힘들었던 것이다.

‘별종의 한국인.’ 뷰레와 같은 특수한 경우에는 한국계 입양인이 한국인으로서의 언어적·문화적 정체성과 자아 의식의 회복과 함께, 성장지역의 많은 문화적 특성들을 잘 간직할 수 있다. 몰랐던 한국말을 배워 대학교의 교편을 잡을 정도로 완벽하게 하고 한국 예의를 같은 나이 또래의 한국인보다 더 철저하게 지키는 반면, 어느 스칸디나비아 사람 못지않게 국가의 폭력성과 자유시장의 잔인함은 거부·부정하고 낭만적인 고독을 소중히 여기고 지향하는 뷰레는, 어쩌면 양쪽의 장점을 취하는 ‘이중의 득’을 본다고 여길 수도 있다. 그런 측면에서, 동서양의 불평등한 교류로서의 국제입양의 성격을 직시하면서도, ‘좀더 넓은 가치의 교류’라는 그 긍정적인 가능성들도 아울러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그러나, 문제는 뷰레처럼 자신의 ‘한국적인 자아’를 재발견, 노력하여 회복한 ‘자각한 입양인’들이 아직은 극소수라는 사실에 있다. 한국 문화도 서양지역에 많이 알려지고 수출되는, ‘동등한’ 세계화가 이루어져야 이와 같은 한국인으로서의 자각이 서양의 한국계 입양인들에게 좀더 쉽지 않을까? 그리고, 결코 적지 않은 그들 ‘별종의 한국인들’에게 한국에서도 법적으로, 그리고 사회 통념상으로 좀더 많은 사회 참여의 기회가 이루어진다면 한국사회의 바람직한 세계화, 선진화에도 기여하지 않을까? 그들의 국내 체류와 취직의 법적 절차가 간소화하는 등, 그들에 대한 사회적 의식과 함께 긍정적이고 협력적인 면이 강해지는 것을 기대해본다. 그럴 경우 그들이 외국에서 터득한 바를 한국인들에게 전수하는 등 교류를 통하여, 불평등한 교류에 의한 그동안의 ‘화’(禍)들을 한국사회의 선진화 그리고 실질적이고 적극적인 세계화 촉진의 ‘복’(福)으로 전(轉)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박노자/ 오슬로 국립대 교수·한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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