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화합을 위한 최전선 주자들… ‘혈통주의’에서 비롯된 편견을 던져라
“타이 여성과 결혼하면 말로가 비참해진다.” “뼈 빠지게 번 돈을 필리핀 아내가 들고 가버려 빈털터리가 되었다더라.” “회교도와 어떻게 결혼하나.” “젊을 때나 괜찮지, 나이 들면 말 통하는 제 나라 사람이 최고다.”
아시아에 흘러다니는 이런 말들이 국제결혼에 대한 한국 사람들의 보통 시각이다. 이미 전 지구적으로 일상화된 일이건만, 우리에게만은 유독 봉건적 잔재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하기야 전라도 총각과 경상도 처녀가 결혼하는 일만 해도 벅찬 우리 현실 아닌가.
“요즘도 그런 통계를 놓고 기사를 쓰는가?” 타이 여성과 결혼해 잘살고 있는 독일기자 조지는 독일의 경우 국제결혼자 수가 얼마나 되느냐는 질문이 어이없다는 듯 대꾸했다. “서로 다른 정부에서 발급한 여행증명서를 지녔을 뿐이지 국적 같은 게 문제가 되나?” 덩치 큰 영국 아내를 둔 버마의 망명 민주운동가 윈초는 국제결혼의 어려움을 묻자 의아해했다.
“순수혈통” 주장은 강박감 또는 열등감 따져보면, 국제결혼은 현대의 별난 현상이 아니다. 고대 왕국 시절에 비록 정략적인 결혼이나마, 정복자의 전리품처럼 국제결혼이 성행했던 것이다. 알렉산더왕이 다리우스왕의 딸과 결혼한 것이 서양의 대표적인 고대 기록이라면, 우리에게는 금관가야(金官伽倻)의 시조이자 김해김씨(金海金氏)의 시조인 수로왕이 인도여성을 아내로 맞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정치적으로도 강대국에 여성을 상납했던 일들은 동·서양과 한국을 막론하고 부지기수였다. 이게 넓은 의미로는 다 국제결혼의 사례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쯤에서 국제결혼을 부정하는 논리인 ‘혈통주의’는 무색해진다. 정체성을 말할 때, 우리는 순결한 혈통을 유난히 강조한다. 인종 이동로를 따져보더라도 또 900번 이상이나 외침을 당한 역사를 꼽아보더라도 우리가 순수혈통을 주장할 만한 근거는 별로 없다. 그것은 지나친 강박감이거나 열등감이라는 못된 생각을 해본다. 논리적으로 고구려나 발해를 우리 역사로 보기 위해서는 이 혈통주의로부터 벗어나야 하지 않을까? ‘만주는 우리 땅’이라고 할 때, 뿌리박고 살아온 만주족은 어떻게 하나? 만주족을 모두 쫓아내고 경상도나 전라도 사람을 이주시켜 우리 역사라 부를 것인가. 게다가 순결한 혈통이란 대체 무슨 뜻인가. 순결하지 않은 혈통도 있다는 말인가. 우리가 개인가? 그래서 사고 팔기 위한 무슨 혈통보증서가 필요하다는 말인가. 바로 이 모호한 혈통주의에서 한국인의 부정적인 국제결혼관이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혈통주의 자부심에 따른 혈통주의 사회법에 스스로를 옭아매고 팽팽 돌아가는 세상을 등진 채 깊은 우물 속에서 살아온 셈이다. 더구나 미 군정 시절과 미군이 개입한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우리에게는 지독하게 저질스런 버릇이 생겨났다. 국제결혼한 사람들을 모조리 미군용 술집 출신쯤으로 보는 편견이다. 한국 여성이 외국인과 결혼하면 즉각 조건없이 전직 접대부 출신이 되고 마는 이 현실. 어떻게 이 고질병을 치료해야 할까. 전직 접대부였으면 어떻고 전직 마귀였으면 어떤가. 외국인의 돈을 보고 결혼했다는 비난도 많이 한다. 그런데 자본주의가 판치는 세상에서 돈 보고 결혼하면 또 어떤가. 돈이 능력을 가늠하는 세상에서 결혼조건으로 능력을 따지는 건 정숙한 처녀들에게도 모두 일반적인 현상 아니던가? 이승만이 미국인 아내를 데리고 왔지만 대통령까지 해먹을 만큼 관용적인 이 사회가 만약 유관순이 미국 남자와 결혼했더라도 민족의 영웅으로 치켜올렸을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국제결혼에서조차도 피해자는 결국 여성이라는 말이다. 이게 혈통주의의 산물이고 이게 미국과 접붙은 한국 현대사의 비극이다. 왜 ‘소냐’는 안 되는가 이런 현상은 우리보다 비교적 개방적인 아시아사회에서도 같은 꼴이다. “외국 남자와 결혼한 여성은 정치가가 될 수 없다.” 이 희한한 법은 버마 군사정부가 영국인과 결혼한 민주지도자 아웅산 수지를 옭아매기 위해 써먹은 웃지 못할 혈통주의다. 인도는 어떤가. 인도 최대 정치가문인 간디가와 결혼한 이탈리아 출신 소냐 간디가 지닌 대중적 인기를 두려워한 힌두 민족주의자들의 훼방은 도를 넘었다. 소냐 간디를 아내로 맞이했던 라지브 간디나 그의 어머니 인드라 간디도 총리를 지냈는데, 유독 소냐는 안 된다는 말이다. ‘국제결혼’으로 들어온 ‘여성’이라서. 국제결혼, 이 흔해빠진 화제를 놓고 아시아 네트워크는 아시아의 현실이 어디에 와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국제결혼을 아직도 ‘인권’의 문제로 다루어야 한다는 게 우리의 서글픔이다. 아시아 네트워크는 “국제결혼을 하자”는 선동을 할 마음이 없다. 개인의 일이라 믿기 때문이다. 다만 사회적 편견에 시달려온 국제결혼자 모두에게 행복을 빈다. 누가 뭐래도 이들이 바로 인류의 화합과 인간의 동질성 확보를 위해 최전선에서 뛰고 있다는 믿음 탓이다. 정문태/ 국제분쟁 전문기자·아시아 네트워크 팀장 asianetwork@news.hani.co.kr

“순수혈통” 주장은 강박감 또는 열등감 따져보면, 국제결혼은 현대의 별난 현상이 아니다. 고대 왕국 시절에 비록 정략적인 결혼이나마, 정복자의 전리품처럼 국제결혼이 성행했던 것이다. 알렉산더왕이 다리우스왕의 딸과 결혼한 것이 서양의 대표적인 고대 기록이라면, 우리에게는 금관가야(金官伽倻)의 시조이자 김해김씨(金海金氏)의 시조인 수로왕이 인도여성을 아내로 맞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정치적으로도 강대국에 여성을 상납했던 일들은 동·서양과 한국을 막론하고 부지기수였다. 이게 넓은 의미로는 다 국제결혼의 사례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쯤에서 국제결혼을 부정하는 논리인 ‘혈통주의’는 무색해진다. 정체성을 말할 때, 우리는 순결한 혈통을 유난히 강조한다. 인종 이동로를 따져보더라도 또 900번 이상이나 외침을 당한 역사를 꼽아보더라도 우리가 순수혈통을 주장할 만한 근거는 별로 없다. 그것은 지나친 강박감이거나 열등감이라는 못된 생각을 해본다. 논리적으로 고구려나 발해를 우리 역사로 보기 위해서는 이 혈통주의로부터 벗어나야 하지 않을까? ‘만주는 우리 땅’이라고 할 때, 뿌리박고 살아온 만주족은 어떻게 하나? 만주족을 모두 쫓아내고 경상도나 전라도 사람을 이주시켜 우리 역사라 부를 것인가. 게다가 순결한 혈통이란 대체 무슨 뜻인가. 순결하지 않은 혈통도 있다는 말인가. 우리가 개인가? 그래서 사고 팔기 위한 무슨 혈통보증서가 필요하다는 말인가. 바로 이 모호한 혈통주의에서 한국인의 부정적인 국제결혼관이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혈통주의 자부심에 따른 혈통주의 사회법에 스스로를 옭아매고 팽팽 돌아가는 세상을 등진 채 깊은 우물 속에서 살아온 셈이다. 더구나 미 군정 시절과 미군이 개입한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우리에게는 지독하게 저질스런 버릇이 생겨났다. 국제결혼한 사람들을 모조리 미군용 술집 출신쯤으로 보는 편견이다. 한국 여성이 외국인과 결혼하면 즉각 조건없이 전직 접대부 출신이 되고 마는 이 현실. 어떻게 이 고질병을 치료해야 할까. 전직 접대부였으면 어떻고 전직 마귀였으면 어떤가. 외국인의 돈을 보고 결혼했다는 비난도 많이 한다. 그런데 자본주의가 판치는 세상에서 돈 보고 결혼하면 또 어떤가. 돈이 능력을 가늠하는 세상에서 결혼조건으로 능력을 따지는 건 정숙한 처녀들에게도 모두 일반적인 현상 아니던가? 이승만이 미국인 아내를 데리고 왔지만 대통령까지 해먹을 만큼 관용적인 이 사회가 만약 유관순이 미국 남자와 결혼했더라도 민족의 영웅으로 치켜올렸을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국제결혼에서조차도 피해자는 결국 여성이라는 말이다. 이게 혈통주의의 산물이고 이게 미국과 접붙은 한국 현대사의 비극이다. 왜 ‘소냐’는 안 되는가 이런 현상은 우리보다 비교적 개방적인 아시아사회에서도 같은 꼴이다. “외국 남자와 결혼한 여성은 정치가가 될 수 없다.” 이 희한한 법은 버마 군사정부가 영국인과 결혼한 민주지도자 아웅산 수지를 옭아매기 위해 써먹은 웃지 못할 혈통주의다. 인도는 어떤가. 인도 최대 정치가문인 간디가와 결혼한 이탈리아 출신 소냐 간디가 지닌 대중적 인기를 두려워한 힌두 민족주의자들의 훼방은 도를 넘었다. 소냐 간디를 아내로 맞이했던 라지브 간디나 그의 어머니 인드라 간디도 총리를 지냈는데, 유독 소냐는 안 된다는 말이다. ‘국제결혼’으로 들어온 ‘여성’이라서. 국제결혼, 이 흔해빠진 화제를 놓고 아시아 네트워크는 아시아의 현실이 어디에 와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국제결혼을 아직도 ‘인권’의 문제로 다루어야 한다는 게 우리의 서글픔이다. 아시아 네트워크는 “국제결혼을 하자”는 선동을 할 마음이 없다. 개인의 일이라 믿기 때문이다. 다만 사회적 편견에 시달려온 국제결혼자 모두에게 행복을 빈다. 누가 뭐래도 이들이 바로 인류의 화합과 인간의 동질성 확보를 위해 최전선에서 뛰고 있다는 믿음 탓이다. 정문태/ 국제분쟁 전문기자·아시아 네트워크 팀장 asianetwork@news.hani.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