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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이민자의 나라’에 울리는 조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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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05-22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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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나·용선·유시프의 부서진 아메리칸 드림… ‘테러와의 전쟁’이 가난한 이주노동자에 대한 전면전으로

▣ 김창진 성공회대 교수·사회과학부

이국 땅 시애틀에서 마흔한 살 생일을 맞던 날 이른 아침, 미국 이민세관단속국(ICE) 관리들의 기습 체포로 애나 레예스(41)의 아메리칸드림은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그와 함께 두 딸과 두 아들도 즉각 멕시코로 추방됐다. 만약 그의 수중에 밀수업자에게 건네줄 약간의 돈푼이라도 남아 있었더라면, 같은 처지에 놓인 다른 추방자들처럼 국경도시 티후아나에서 버텨보다가 미국으로 다시 들어갈 기회를 노려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17년간 농장 일꾼과 호텔 청소부로 일하며 근근이 네 자식을 건사하다 졸지에 내쫓긴 그에게는 그럴 만한 여유가 없었다. 그리하여 애나는, 지긋지긋한 가난을 벗어나고자 고등학교도 채 마치지 못하고 탈출했던 시골 마을로 죽기보다 싫은 발걸음을 옮기지 않으면 안 됐다. 지난 한 해 87만 명이 넘는 ‘동포들’의 행렬에 끼여 추방되는 것으로 그의 ‘불법 체류자’ 생활은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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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피린만 처방했어도…

용선 하빌(52)씨는 조국이 아직 가난에 허덕이던 지난 1975년 주한미군과 결혼해 ‘꿈의 나라, 풍요의 땅’ 미국의 플로리다에 합법적으로 정착했다. 하지만 33년이 흐른 지금, 그는 한국으로 추방될 신세로 전락해 애리조나의 감옥에서 세상과 거의 절연돼 있다. 암투병 경력이 있는 용선씨는 처음 감옥에 도착했을 때 이미 다리가 퉁퉁 붓는 심한 육종에 C형 간염, 조울증, 고혈압, 공황장애 등을 앓고 있었고 복통 증세에다 코피가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지난 1년 동안 직계가족의 면회도, 변호사의 접견도, 심지어 의사의 진료마저도 봉쇄되고 있다. 미국 영주권자인 그는 바로 미국 땅 한켠에서 ‘우리에 갇힌 동물’ 대접을 받으며 사경을 헤매고 있는 것이다.

승용차 안에서 마리화나가 발견돼 마약 소지 혐의로 13개월을 복역하고 지난해 3월 출소 예정이던 용선씨에게 닥친 불행은 어이없게도 ‘장물 취득’ 혐의였다. 이미 10년 전 일로서, 장물인지 모르고 귀금속을 구입했다는 진술이 참작돼 집행유예로 마무리 된 사건이었다. 그런데 뒤늦게 당국은 이 사소한 지난 일을 들추어 그를 추방대기자로 분류해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제 다른 수많은 구금자들처럼 다시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감옥 안에 방치된 채 비극적인 생을 마감하게 될지도 모른다.

아프리카 가나 출신 미국 이민자였던 유시프 오스만은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5년간 합법적인 신분으로 로스앤젤레스에서 생활하던 그가 어느 날 갑자기 ICE에 체포돼 샌디에이고 외곽에 위치한 추방자용 구금자 감옥에서 싸늘한 주검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동료가 위조 신분증을 소지하고 있다가 체포된 뒤에 당국은 그에게 밀수 혐의를 씌웠으나 그는 부인했다. 그럼에도 힘없는 한 아프리카계 이민자가 ‘국가안보’라는 무시무시한 명분으로 ‘제국의 법’을 집행하는 관리들에 맞서 철창행을 피할 수는 없었다.

감옥에 도착한 직후 시간제 간호사가 평소 의례적인 업무대로 유시프의 건강 상태를 컴퓨터에 입력했다. 하지만 그녀는 유시프의 상태에 관한 검사기록이 없는데도 실수로 ‘완료’ 버튼을 누르고 말았다. 그리고 석 달 뒤, 유시프는 심한 가슴 통증을 호소하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같은 방 동료가 간수를 소리쳐 불렀으나 그는 건성으로 들여다보고 간호사를 불렀다. 간호사는 환자의 병력 기록이 없는 것을 보고 위급상태가 아니라고 판단하고, 유시프에게 진료 요구서를 작성하라고만 말했다. 아무런 조처도 취해지지 않았다. 상황이 심각한 것을 알아차린 유시프의 감방 동료가 다시 소리를 지르자 다른 간수가 왔고, 다시 간호사를 불렀다. 이번에는 그녀가 환자를 병원으로 이송하자고 했다. 그로부터 40분이 지나 간수가 휠체어를 가지고 왔으나, 너무 늦었다. 그때까지 간신히 헐떡거리던 유시프의 심장은 곧 멎어버렸다. 그리고 다음날, 검시 결과를 확인한 두 의사는 환자가 즉각 처치를 받았더라면, “아마도 아스피린 같은 기본 처방만 받았더라도 목숨을 건질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때와 장소 가리지 않고 합법 체류자까지

유시프의 어이없는 죽음도, 용선씨의 기막힌 불운도, 애나의 속수무책 추방도 오늘의 미국에서는 결코 드문 일이 아니다. 현재 미국 전역의 수용소와 감옥에 약 3만3천 명의 구금자들이 최소한의 인간적 대우도 받지 못하면서, 마치 아무 예고도 없이 어느 날 갑자기 다른 축사로 옮겨질 짐승처럼, 추방될 날짜를 기다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 와중에 지난 5년간 83명의 억류자가 야만적인 시설에서 귀중한 생명을 잃었다. 그중 대다수는 40살 미만의 젊은이였다.

문제는 이런 상황이 개선되기는커녕 앞으로 점점 더 악화될 조짐을 보인다는 데 있다. 9·11 이후 신설된 국토안보부 산하 ICE가 최근 멕시코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캘리포니아 같은 남부 주들에서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불법 체류자’ 단속 작전을 밀어붙이고 있기 때문이다. 대중교통, 공장, 학원, 가정집 등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합법 체류자들까지 마구잡이로 잡아들이고 있다. 지난 5월12일에도 ICE는 중부의 아이오와주에서 경찰과 함께 헬기까지 동원해 육류포장 공장을 급습했다. 그 결과 단번에 300명 이상을 체포하는 ‘전과’를 올렸다. 대부분 멕시코와 과테말라 출신인 그들은 곧바로 지역 감옥에 넘겨졌고 조만간 추방될 것이다. 조지 부시 정권이 추진하는 ‘테러와의 전쟁’이 완전히 빗나가, 실상은 미국의 제조업과 농업, 서비스업의 밑바닥을 받쳐주는 가난한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전면전으로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아메리칸드림의 파탄을 여실히 증거해주는 이들 수용소의 실태는, 1941년 일본군의 진주만 공습 이후 12만 명의 일본계 미국인들이 황량한 억류시설에 강제 격리됐던 상황을 떠오르게 할 정도다. 일단 구금자 수용소에 갇히게 되면 심지어 확정된 살인범보다 변호사 접견이 더 어려울 정도며, 일부는 테러범으로 지목된 알카에다 조직원들이 감금된 쿠바의 관타나모 수용소보다도 열악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들은 ‘법치국가’ 미국에서 법률·의료적 보호의 완전한 사각지대로 떨어지게 된다.

미국의 비참한 추방자 수용소 실태를 폭로한 <워싱턴포스트>는 이런 상황이 9·11 이후 부시 정권이 아무런 준비도, 결과에 대한 예측도 없이 갑작스럽게 밀어붙인 정책 집행의 결과로 보고 있다. 수용소 안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간수와 의료진의 업무태만, 행정관리의 미숙, 구금자 기록 관리의 어처구니없는 부실함, 의사·간호사·기술자의 태부족은 피할 수 없는 현상인 것이다. 그럼에도 연방 관리는 “수용자 관리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말한다.

살인범보다 변호사 접견이 더 어려워

이렇듯 아메리카 제국의 안보를 강화한다는 명분으로 추진되는 ‘테러와의 전쟁’은 ‘이민자의 나라’라는 미국의 오랜 정체성에 종말을 고하는 조종처럼 보인다. 그것은 1950년대 매카시즘 광풍 이후 반세기 만에 다시 나타난, ‘내부의 적’을 색출하는 데 골몰하다가 자기 자신이 파멸에 이르는, 국가기관의 발작 증세라고 할 수 있다. 발작이 지속되면 국가기관은 정상적인 기능을 상실하게 되고, 그 결과 국가안보는 더욱더 취약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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