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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어느 흑인의 어이없는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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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05-08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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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차별 총격 가한 경찰에 무죄 선고 내려져… 제국은 ‘자기 안 게토의 저주’를 들어보라

▣ 김창진 성공회대 교수·사회과학부

지난 4월25일, 미 뉴욕주 퀸스 지방법원은 비무장 흑인 청년들에게 무차별 사격을 가해 그중 한 명을 숨지게 한 혐의로 재판정에 선 뉴욕주 경찰 3명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숨진 피해자가 총기를 소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명백히 드러났음에도 재판장은 피해자 쪽보다 경찰 쪽의 소명에 더 신뢰가 간다고 했다. 사건 현장에 함께 있다가 역시 총상을 입은 피해자의 친구는 판결을 보고 “무죄, 무죄…. 이것이 현실이다”라고 되뇌며 비틀거렸다. 결혼식을 며칠 앞둔 23살 흑인 청년 숀 벨은 그렇게 ‘두 번’ 죽었다. 한 번은 경찰의 ‘정당한’ 총에 맞아, 또 한 번은 미국의 민주적 사법제도가 내린 ‘공정한’ 판결에 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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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갓 뎀 아메리카!’ 버락 오바마 민주당 대선 예비후보가 다녔던 시카고 트리니티 교회의 제레미아 라이트 목사가 4월27일 미시간주 디트로이트 코보홀에서 전미소수인종지위향상협회(NAACP)가 마련한 연례 자유기금 만찬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 라이트 목사는 흑인 사회가 여전히 핍박과 차별에 시달리고 있다고 질타한다. (사진 연합/EPA/ JEFF KOWALSKY)


극적인 변화가 일어난 40년

숀 벨의 허무한 죽음은 까만 피부색을 가진 인간이, 노예 수입이 공식적으로 금지된 지 2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미국이라는 ‘인권국가’에서 어떤 존재인가를 보여주는 작은 사례에 불과하다. 고향 아프리카에서 짐승처럼 붙잡혀 1619년 동부 해안 버지니아에 노예 신분으로 처음 도착한 흑인은 당시 영국 식민지였던 북아메리카의 ‘내부 식민지’로 자리잡았다. 그로부터 4세기가 지나는 동안, 우월한 문명과 기독교의 이름으로 노예를 사냥하고 그들에 대한 착취를 제도화한 백인들은 세계를 지배하는 제국을 세웠으나 ‘열등한’ 흑인들은 그 제국에서 또다시 유배당한 채 살고 있다.

‘민주주의의 전시장’인 미국 사회에서 그간 흑인들의 처지가 달라진 것이 없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흑인 아이들은 이제 학교에서 백인 아이들과 똑같은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물을 마실 수 있다. 시내 외출을 하는 흑인 아주머니는 버스에서 백인 아저씨와 한자리에 앉아도 누가 뭐라는 사람이 없다. 성인이 된 흑인은 백인과 함께 투표장에 들어갈 수 있다. 그리고 마이클 조든, 타이거 우즈, 덴절 워싱턴, 오프라 윈프리를 보라. 그들은 참을 수 없이 부박한 정신성의 대체물인 스포츠와 오락에 열광하는 미국인들에게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영웅이자 우상들이다. 그뿐인가? 제국의 외교정책을 총괄하는 국무장관 자리를 콜린 파월과 콘돌리사 라이스라는 두 흑인 남녀가 연달아 차지했다. 급기야 버락 오바마라는 정치 신인이 혜성처럼 등장해 미국의 대통령직을 향해 성큼 다가가고 있다.

흑인들 삶의 커다란 변화는 주로 지난 40년 동안 극적으로 일어났다. 1960년대 중반 이후 ‘부당한 전쟁’의 대명사가 돼버린 베트남전 반대운동이 미국 사회 전반의 개혁을 요구한 민권운동으로 발전한 덕분이었다. 그 와중에 흑인의 분노와 해방의 열정을 대변한 맬컴X(1965년 사망), 그리고 비폭력 저항을 전략적으로 밀고 나간 마틴 루서 킹(1968년 사망) 목사가 백인과 동등한 인간임을 선언한 흑인들의 제단에 희생양으로 바쳐졌다. 일상적인 인종차별을 더 이상 허용하지 않고, 정치적으로 흑인에게 동등한 권리를 부여하며, 심지어 직장의 고용과 승진에서 흑인들에게 일종의 ‘우대제도’까지 만드는 등 존슨과 닉슨 정부에서 취해진 일련의 조처는 매우 진보적인 것이었다. 힐러리 클린턴의 말마따나 백인 정부의 ‘민권법’ 통과야말로 350년 만에 흑인에게 주어진 ‘미국 시민권’이라는 축복의 꽃다발이었다. 제국의 너그러움이 자기 안의 게토까지 껴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흑인들의 피 어린 절규와 투쟁이 없었어도 미국 정부는 그들이 백인과 동등하게 ‘생명과 자유와 행복’을 추구할 ‘양도할 수 없는 권리’(미국 독립선언서)를 가진 사회 구성원임을 자연스럽게 인정했을까? 우리는 지난 역사에서 그에 대한 답변의 단서 하나를 발견할 수 있다. 감동적인 연설가요, 노예 해방자요, 남북으로 갈라진 미국을 하나로 통합한 위대한 정치가로 알려진 링컨 대통령은 남북전쟁 시기에 뉴욕 <트리뷴>의 주필에게 이렇게 썼다.

‘위인’ 링컨에게 제일 중요했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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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싸움에서 제가 견지하는 최대의 목표는 연방을 지키는 것이며 노예제를 지키거나 파괴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한 명의 노예도 해방시키지 않고 연방을 지킬 수 있다면 그렇게 할 것이고, 모든 노예를 해방시킴으로써 연방을 지킬 수 있다면 그렇게 할 것이며, 일부는 해방시키고 일부는 내버려둠으로써 연방을 지킬 수 있다면 역시 그렇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1863년 1월1일 노예해방령이 선포됐을 때, 링컨 자신이 대표하는 연방에 대해 저항을 계속하는 남부 지역, 곧 적군 지역의 노예들에 대해서는 ‘해방’이 선언됐지만, 연방 경계 내에 있던 노예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없었다. 요컨대, 북부가 주도하는 연방에 잔류하는 대가로 기회주의적인 몇몇 주들에서 노예제를 존속할 수 있도록 묵인했던 것이다. 제조업 중심지인 북부는 노예의 신분에서 해방된 자유 노동자가 필요했고, 면화와 담배농장이 주산업이었던 남부에서는 ‘말할 줄 아는 짐승’인 흑인노예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하지만 다 옛날이야기 아닌가? 그렇다면 여기, 21세기에 접어들어 작성된 통계를 보자. ‘대도시 빈민가의 흑인 남성 절반은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한다. 그 고교 중퇴자의 70%가 실업자다. 고교를 중퇴한 20~30대 흑인 남성 10명 중 6명은 감옥에 간다. 보통 흑인이 감옥에 갈 확률은 백인의 7배에 이른다. 흑인의 평균 소득은 백인의 40%선이다. 흑인 실업률이 백인의 2배가 넘는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이처럼 흑인 청년들이 직장이 아니라 철창 안에 넘쳐나는 상황에 대한 미국 정부의 대응은 대대적으로 감옥 시설을 늘리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사설 감옥 사업이 아주 번창한 비즈니스가 되고 있다. 대단히 ‘효율적인’, 지극히 미국적인 접근방식이 아닐 수 없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시카고의 제레미아 라이트 목사는 ‘해방된’ 흑인 사회가 여전히 겪고 있는 핍박과 배신감에 치를 떨며 “갓 뎀 아메리카!”를 외쳤을 것이다. 물질적 탐욕을 인정사정 없이 추구하면서도 늘 ‘신의 축복’을 입에 담고 사는 미국인들에게 이 ‘자기 안의 게토로부터 들려온 저주’는 등골이 서늘한 경험이었으리라. 그러나 <뉴욕타임스>로부터 링컨을 잇는 명연설가로 칭송받고, 킹 목사의 ‘아메리칸드림’을 선거 연설의 단골 메뉴로 삼고 있는 오바마에게 자신의 정신적 대부인 라이트 목사의 설교는 “통합이 필요할 때 분열을 초래하는 부적절한 발언”에 불과하다. 그에게 ‘미국에서 가장 근본적인 권리는 선거권’이며, 흑인의 인권신장 목표는 90%가 이미 달성되었고, 남은 문제는 각종 민권법을 잘 시행하고 불균형을 시정하면 되는 것이다. 법률가 출신 정치가에게 딱 어울리는 현실 진단이요, 처방이다. 그에게는 ‘하얀 아메리카도 검은 아메리카도 갈색 아메리카도 아닌 하나의 미국’이 필요할 뿐이다.

제국을 버려야 서로 해방될 수 있어

하지만 오바마가 잘 모르는 것은, ‘열등한’ 인종의 하층 계급화와 그에 대한 경멸적 사고의 총체를 뜻하는 인종주의가 서구 문명과 제국주의의 불가결한 구성요소라는 사실이다. 인종주의는 단순한 편견이나 비과학적인 선동이 아니라 지극히 ‘합리적인’ 계산의 결과로 발생한 경제정책이며 사회제도이다. 인도주의라는 대의는 노예제를 유지하는 비용이 이익을 초과할 때, 또는 ‘해방’의 이익이 억압의 이익보다 높다고 판단될 때야 비로소 수용된다. 1860년대와 1960년대 미국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 하지만 경제적으로 쇠퇴하고 있는 오늘의 미국은 흑인들에게 나눠줄 떡이 별로 없다. 노예뿐만 아니라 주인의 인격까지도 타락으로 이끄는 인종주의는 제국을 버려야만 궁극적으로 상호 해방될 수 있는 족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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