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표지이야기

강경보수는 힘세고 오래간다

355
등록 : 2001-04-17 00:00 수정 :

크게 작게

중국에 보여준 유화적 태도는 아주 잠시… 생존을 위해 ‘적’을 만드는 부시의 태생적 한계

사진/부시 대통령은 아버지와 달리 강경보수 노선을 고수하며 재선을 노린다. 그의 행정부는 온통 냉전의 전사들로 가득 차 있다.(SYGMA)
“국가적 수치!”

미국 공화당 계열의 보수주의자들이 가장 많이 읽는 주간지인 〈더 위클리 스탠더드>의 4월16일치 사설 제목이다. 이 사설은 최근 벌어진 미국-중국 군용기 충돌사건을 둘러싸고 부시 행정부가 보여준 저자세 외교를 통렬하게 비꼬았다. “부시 대통령이 미국에 끼친 깊은 국가적 수치는 중국에 억류된 승무원들이 돌아오면 일시적으로 잊혀질지 모르나, 이들에 대한 환영식이 끝나면 부시 행정부가 취한 행동으로 인해 초래된 (국가위신의) 손상과 위험을 냉정히 평가해야 할 때가 올 것이다.” 이 사설은 아무것도 잘못한 것이 없는 미국이 ‘유감’이라는 표현을 쓴 것조차도 부시가 중국의 압력에 두려워하고 굴복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으며, 이 사태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는 다른 불량국가들의 오판을 부추길 게 뻔하다고 지적했다.

온건 노선으로는 재선 어렵다


사진/그나마 온건노선을 견지하고 있는 콜린 파월 국무장관.(SYGMA)
이 지적은 미국 내 몇몇 보수주의자의 나홀로 목소리가 아니다. 이 주간지는 공화당계 보수진영의 상당수 목소리를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95년 창간된 이 주간지는 부시 공화당 정권이 8년 만에 워싱턴을 재탈환하면서 그 위상이 날로 커지고 있다. 워싱턴의 다른 유력 언론인이나 정치·경제, 외교·안보 관련 전문가들은 공화당 진영의 여론을 살피고, 각종 정책들을 좀더 정확히 읽기 위해 한주도 놓치지 않고 이 주간지를 찾고 있다. 따라서 공화당 보수층의 지지를 기반으로 선거에 당선된 부시 대통령으로서는 이런 여론에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을 수 없다는 게 워싱턴 공화당쪽 소식통들의 귀띔이다.

앞의 사설은 이 주간지의 편집인 겸 발행인인 윌리엄 크리스톨과 레이건 정권 시절 국무부 출신으로 카네기재단에서 선임연구원으로 있는 로버트 케건이 함께 썼다. 월리엄 크리스톨은 부시 전 대통령 때 부통령이었던 댄 퀘일 부통령의 비서실장 출신으로 ‘공화당의 미래를 위한 프로젝트팀’을 이끌면서 1994년 미 의회 의원선거 때 공화당을 승리로 이끄는 데 상당한 기여를 한 이다. 둘 다 공화당계열의 내로라하는 보수논객인 셈이다.

부시가 이들을 실망시킬 리가 없다. 아니나 다를까. 부시 대통령의 태도는 돌변했다. 그는 4월12일 억류 승무원들이 미국 땅인 하와이에 무사히 도착했다는 소식을 접한 지 몇 시간 안 돼 기자회견에서 승무원들의 귀환을 11일간이나 막은 중국당국의 결정을 비난한 뒤 ‘국제 영해에서 합법적으로 활동하는 미군기들에 대한 중국의 도전을 강력히 추궁할 것’이라며 중국과의 일전불사 태세를 보여줬다.

사실 미군 승무원 억류사건이 장기 인질사태로 변할 경우의 폭발력을 깨달은 부시 대통령은 중국쪽 실종 조종사에 대한 유감을 밝히고, 조종사 부인에게도 답신을 보내는 등 한풀 꺾인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워싱턴포스트>는 사건 초기 때와 달리 부시 대통령이 유감 표명 등 갑자기 중국에 대해 유화 제스처를 보낸 것은 지난 79년 이란 인질사건의 장기화로 재선에 맥없이 실패한 카터 전 대통령의 선례를 누구보다 잘 아는 아버지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의 훈수가 결정적이었다고 분석했다.

조지 W. 부시는 아버지와는 달리 공화당 내에서도 보수강경파에 속한다. 그의 핵심 지지층도 대개는 미 국익과 세계 최강대국으로서의 자존심을 최우선으로 삼는 백인 상류층과 군산복합체 최고경영자(CEO)들이 자리잡고 있다. 그는 아버지 부시 전 대통령이 미국의 화합을 외치며 온건파 노선을 걷다가 공화당 보수강경파들이 등을 돌리는 바람에 결국 재선에서 진 쓰라린 경험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워싱턴의 전문가들은 취임 초기부터 그가 선거기간중에는 ‘온건 보수주의’를 내세우고, 민주당과의 공조를 다짐했으나 결국 강경 보수정책의 깃발을 높이 치들 것이라고 일찌감치 예상했었다. 이들의 예상은 갈수록 정확하게 들어맞고 있다. 부시를 오랫동안 죽 지켜봐온 한 정치전문가는 “미 대통령에 당선된 사람이 제일 먼저 생각하는 것은 어떻게 하면 다음 선거에서 재선이 되느냐를 고민하는 것”이라면서 “부시도 예외가 아닐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특히 부시는 고어와의 경쟁에서 전국 득표에 진 소수파 대통령이라는 데 자존심이 무척 상해 있다”면서 “다음 재선에서는 압도적인 표차로 이겨 치욕을 씻기 위해 벼르고 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런데 문제는 과거 레이건 대통령이 극명하게 보여주었듯이 보수온건 노선으로는 재선을 하기가 힘들다는 점이다. 따라서 부시 대통령의 길은 운명적으로 강경 보수의 노선을 걸을 수밖에 없다고 적지 않은 워싱턴 정치 관측통들은 지적하고 있다.

대만 무기판매 곧 승인

사진/부시 행정부를 이끄는 보수 강경 3인방. 왼쪽부터 딕 체니 부통령. 도널드 럼스펠드 국방장관. 콘돌리자 라이스 백악관 국가안보 보좌관.(SYGMA)
이런 분석을 뒷받침해주듯 취임 초기 부시 대통령이 쏟아놓는 정책들에는 보수색채와 냄새가 뚜렷하다. 특히 외교정책들에는 하나같이 ‘미 국익 최우선’ 기조와 ‘힘의 과시’가 적나라하게 묻어나고 있다. 지난 2월 중순 이라크에 대한 대규모 공습을 시작으로 근육질을 과시하기 시작하더니 내내 국가미사일방어(NMD)를 둘러싼 국가간 갈등을 유발하는가 하면, 러시아와의 대규모 외교관 추방 사태, 중국과는 대만에 대한 이지스급 구축함 판매, 인권문제 등으로 긴장의 수위를 높여가고 있다. 심지어는 선진국의 온실가스 감축 의무를 규정한 97년 교토의정서를 이행할 수 없다고 나섰다. 부시의 이런 외교 노선에 러시아와 중국 등이 반발하는 것은 물론 유럽연합 등 동맹국들조차도 불안과 우려의 시선을 보내고 있다. 이제 미 언론에서도 부시 행정부의 ‘신냉전으로의 회귀’를 심심치 않게 거론하고 있을 정도다.

영국에서 나오는 주간 <이코노미스트>는 최근 미국의 기후변화협약 교토의정서 거부, 러시아와의 탄도탄요격미사일(ABM)제한협정 파기 의사, 북한과의 제네바협정 파기 언급 등을 사례로 들면서 이를 ‘대칭적 일방주의’(parallel unilateralism)로 묘사했다. 여러 나라가 관계된 국제적 협정을 준수할 용의는 있지만, 이는 단지 미국의 이해나 이익에 맞을 때만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초강대국으로서의 미국의 오만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또 외교전문가인 팻 홀트는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에 기고한 글에서 부시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미국 외교정책 논쟁의 초점이 이전의 ‘고립주의-국제주의(혹은 개입주의)’에서 ‘일방적 자국주의-다국주의’로 바뀌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자국주의는 대체로 공화당쪽이, 다국주의는 민주당이 대표하고 있다면서, 전자는 독단적으로 일을 하려 하고, 후자는 우방을 도움과 힘의 원천으로 본다고 분석했다. 또 전자는 국방을 강조하고 언행이 거친 반면 후자는 우방과의 관계를 중시하며, 전자는 세계를 선과 악의 각축장으로 보는 반면 후자는 세계를 흑백이 아니라 회색으로 본다는 것이다.

따라서 워싱턴의 전문가들은 미-중 정찰기 충돌사건을 두고 부시가 이례적으로 중국에 유화자세를 취했던 것은 중국과의 마찰을 두려워하거나 진정한 화해를 원해서가 아니라, 사건이 장기화될 경우의 정치적 타격을 가장 우려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지난 1월 미국 대통령 취임 직후 ‘힘의 외교’를 천명해온 부시 대통령의 패기가 정찰기 충돌사건으로 꺾였으며 부시 대통령은 이 사건을 계기로 더욱 신중하고 현실적인 대외관계를 펼칠 것이라는 일부 관측들을 보기좋게 비켜가고 있는 셈이다.

부시의 이 발언 이후 승무원 억류기간중 중국당국을 자극하면 협상에 도움이 안 된다는 부시 행정부쪽의 강력한 요청을 받아들여 목소리를 죽이고 있던 강경 보수 진영에서의 중국에 대한 성토 분위기도 갈수록 거세지고 있다. 미 의회 내 반중세력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면서 대만에 이지스함과 미사일 방공시스템을 당장 판매하라는 요구가 공공연히 터져나오고 있다. 헨리 하이드 미 하원 외교관계위원장은 “이번 사건으로 중국 정부의 본성이 여지없이 드러났다”며 부시 행정부에 강력한 대처를 요구했다. <워싱턴포스트>는 4월12일치에서 “오는 25일까지 결정하기로 돼 있는 대만 무기판매를 미 행정부가 승인하게 될 것 같다”면서 “그 규모는 놀랄 만한 양이 될 것”이라고 미 국방부 고위관료의 말을 인용해 보도했다.

공화당 보수세력 ‘최상의 단결력’

사진/정찰기 충돌사건에 대해 유화적 태도를 보이던 미국은 승무원이 송환되자 갑자기 돌변했다. 충돌사건 직후 반미 시위를 벌이고 있는 중국인들.(AP연합)
안보전문가들은 미-중 사이의 정면 충돌을 두고 마침내 올 것이 왔으나, 너무 일찍 그 위기가 찾아왔다고 지적한다. 이들은 “미국의 공화당 보수세력은 적이 눈에 보일 때 최상의 단결력과 추진력을 발휘해왔다”면서 “부시 행정부의 핵심 인사들은 하나같이 레이건 정부가 옛 소련을 악의 제국으로 표적삼았듯이 현재 미국이 맞고 있는 적을 찾아내 선명히 부각함으로써 정권은 성공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고 지적한다.

사실 부시 행정부는 출범하자마자 중국을 가상의 적으로 본다는 시그널을 계속 흘렸다. 최근에는 강경 보수파의 대표주자격인 도널드 럼스펠드 국방장관이 21세기 군사전력의 중심을 태평양으로 옮기고 제1의 주적(主敵)을 중국으로 삼아야 한다는 보고서를 부시 대통령에게 제출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이번 미-중국 군용기 충돌사건은 미국 매파에는 내심 환호성을 칠 만한 호재로 다가온 셈이다. 사실 미 외교안보팀에서는 아시아 정책이 완전히 수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중국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나름대로 애를 써왔다. 그래서 대만이 간청하고 있는 이지스함 판매문제에 대해서도 선뜻 결정을 내리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와중에 미국과 중국의 군용기 충돌사건이 발생했다. 안보전문가들은 겉보기에는 부시 행정부가 구석으로 몰리는 것 같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번 사태는 부시 행정부가 내심 바라던 절호의 기회를 안겨준 셈이 됐다고 분석한다. 이번 사건은 호전적인 중국 공산당 정권의 정체를 폭로해 강경 보수적인 대외정책의 정당성을 확보하게끔 만들어줬다는 것이다.

카네기재단의 대표적인 보수논객인 로버트 케건 선임연구원은 <워싱턴포스트> 4월12일치에 기고한 글에서 “천안문 사태에 대한 기억이 점차 사라져가고, 파륜궁을 모르는 등 국제문제에 주목하지 않던 미 국민들이 이번 정찰기 충돌사건으로 갑자기 중국문제에 관심을 맞추게 됐다. 이들은 케이마트 등 중국제품을 내다파는 회사들에 항의의 이메일을 보냈다”면서 중국 지도부는 졌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냉전의 전사들 백악관에 모이다

부시 대통령의 핵심 참모들뿐만 아니라 그 하위직까지 냉전의 전사들로 가득 채워지고 있다는 점도 부시의 강경노선의 방향을 더욱 확고하게 보여주고 있다. 오히려 레이건보다 더한 강성기조를 띨 것이라는 지적까지 나오고 있다. <워싱턴포스트>는 지난 3월25일치에서 부시 대통령 행정부는 냉전시기를 이끌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시절보다 더 강성의 보수주의자들 일색이라면서 콘돌리자 라이스 국가안보보좌관, 콜린 파월 국무장관 등 핵심 포스트에 이어 준고위직까지 모두 우파로 가득하다고 보도했다. 헤리티지재단과 미 기업연구소 등 보수 색채의 싱크탱크, 언론계 및 법률회사 등에서 내로라하는 보수주의자들이 잇따라 미 행정부에 입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파월 국무장관-리처드 아미티지 부장관 라인 등을 두고 그나마 온건 노선을 견지하면서 강경 보수세력의 입김에 제동을 걸고 있다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워싱턴의 안보전문가들은 이미 대세는 강경 보수쪽으로 굳혀졌다고 입을 모은다.

물론 부시의 강경노선에 대한 국내 비판도 간간이 나오고 있다. <뉴욕타임스>의 유명 칼럼니스트인 모린 다우드는 “부시가 취임하면서 경제난에 캘리포니아주 경제위기, 그리고 외교문제에 이르기까지 잘 풀려나가는 것이 하나도 없다”면서 특히 외교문제에서는 체니, 러미(럼스펠드), 콘디(콘돌리자 라이스), 콜린 등 모두 합하면 수백년 경력의 참모들이 도대체 어떤 조언을 하고 있기에 사태가 이 지경까지 이르렀느냐고 강하게 비꼬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미 여론은 부시 행정부가 출범한 지 몇달이 안 되는 만큼 좀더 지켜보자는 쪽이 우세하다. 일각의 비판 목소리도 강경 입장 그 자체를 나무라기보다는 정책을 좀더 세련되고 기술적으로 다루지 못하는 부시 행정부의 서툰 솜씨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다.

워싱턴=임을출 기자 eulclim@hanimail.net


좋은 언론을 향한 동행,
한겨레를 후원해 주세요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보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