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표지이야기

카스트로를 위해 울지 말아요

699
등록 : 2008-02-28 00:00 수정 : 2008-12-15 18:17

크게 작게

1959년 아바나에 입성한 뒤 49년, 숱한 미국의 압력 속을 견딘 권좌는 이제 ‘실용파’ 동생에게로

▣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경고한다. 나 한 사람은 그저 시작일 뿐이다. 당신들의 심장에 조국에 대한 사랑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인간과 정의에 대한 애정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귀담아들어라. …바티스타 정권이 모든 수단을 동원해 진실을 억압할 것임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나를 망각 속에 묻어버리려 할 것이란 점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내 목소리는 쉽게 사그라지지 않을 것이다. …나를 저주하라. 전혀 개의치 않는다. 역사가 나를 무죄라 하리라.”(1953년 ‘몬카다 병영 습격사건’ 최후진술 중에서)

미 백악관 주인은 10번 바뀌는 동안

[%%IMAGE4%%]


반세기다. 강산이 다섯 차례 바뀌었다. 혈기 방장하던 30대 젊은이는 팔순의 노인이 돼 병석에 누웠다. 카밀로 시엔푸에고스, 체 게바라…. 목숨을 같이했던 동지들은 어느새 간 곳이 없고, 선명하게 나부끼던 깃발도 이미 옛 모습은 아니다. ‘혁명’이 ‘화석’이 돼버렸단들 그 누구를 탓할 것인가?

“참으로 오랜 세월 국가평의회 의장이란 영예로운 직분을 맡아왔습니다. 마지막 숨을 다하는 날까지 제 의무를 다하고 싶었습니다. …친애하는 동지 여러분, 저는 더 이상 국가평의회 의장직과 군 최고사령관직을 맡지 않을 생각입니다.” 지난 2월19일 피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이 ‘은퇴’를 선언했다. 쿠바 공산당이 발행하는 일간 <그란마>에 쓰는 ‘카스트로 동지의 숙고’ 란 고정 칼럼을 통해서 이렇게 밝혔다. ‘카스트로의 세기’가 막을 내리는 게다.

1959년 1월8일 혁명군을 이끌고 아바나에 입성했으니, 49년을 훌쩍 넘긴 세월이다. 그사이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에서 조지 부시까지 모두 10차례 미국 백악관의 주인이 바뀌었다. 그는 고별사에서 “쿠바 인민들이 제 심리적·정치적 부재에 대비할 수 있도록 하는 것 또한 제게 부여된 중요한 과제”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동지들께 작별을 고하는 건 아닙니다. 사상의 투사로서 싸움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피델 알레한드로 카스트로 루스는 1926년 8월13일 쿠바 동부 니페산 자락의 비란이란 소도시에서 태어났다. 이민자 출신인 그의 아버지는 사탕수수 농장을 운영해 상당한 부를 축적한 재력가였고, 그의 어머니는 가정부였다. 카스트로가 태어났을 때 그의 아버지는 앞선 결혼을 정리하지 않은 상태였고, 그가 15살이 되던 해에야 그의 어머니와 결혼했다.

전통 가톨릭 교육을 받으며 성장한 카스트로는 1945년 쿠바 명문 아바나대학 법대에 진학했다. 법대 재학 시절 그는 학생운동에 적극 가담했다. 1950년 대학 졸업과 함께 결혼한 카스트로는 빈민 지역에서 변호사로 활약하기 시작한다. 이런 지역활동을 바탕으로 2년 뒤인 1952년엔 쿠바 하원의원 선거에 출마한다. 하지만 그해 풀헨시오 바티스타가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카를로스 프리오 소카라스 정권을 무너뜨리는 사건이 벌어진다. 선거는 무산됐고, 카스트로는 반독재 투쟁에 뛰어든다.

그리고 1953년 7월26일, 청년 카스트로는 160여 명의 동지들과 함께 ‘몬카다 병영 습격사건’을 감행한다. 무모한 싸움이었다. 중무장한 대규모 병력에 맞서기엔 젊은 그들이 너무 약했다. 현장에서 61명의 동지를 잃은 카스트로는 몸을 피하는 데 성공했지만, 이윽고 붙잡혀 모진 고문 끝에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투옥됐다.

2년여의 수감생활 끝에 여론에 못 이긴 바티스타 정권의 사면으로 1955년 멕시코로 망명한 카스트로는 ‘7월26일 운동’이란 게릴라 조직을 결성한다. 필생의 동지인 에르네스토 게바라 데 라 세르나(체 게바라)를 만난 것도 멕시코에서다. 1년여에 걸친 피나는 훈련 끝에 1956년 12월 카스트로와 그의 동지들은 1만5천달러를 주고 산 요트 ‘그란마’호를 타고 쿠바 해안으로 향한다. 본격적인 게릴라 투쟁의 서막이었다.

외교 단절, 경제제재, 군사도발…

출발은 쉽지 않았다. 상륙 직후 바티스타 정권의 공세로 심각한 타격을 입은 카스트로 진영은 서부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맥으로 잠입해 조직을 정비했다. 가난한 농민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바탕으로 바티스타 정권의 대대적인 군사작전에 맞서 하나둘씩 승리를 쌓아가던 ‘혁명군’은 마침내 1959년 1월8일 아바나로 무혈 입성한다. 독재자 바티스타는 이미 도미니카공화국으로 달아난 뒤였다. ‘신화’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쿠바의 ‘혁명’은 미국의 ‘재난’이었다. 냉전 초기였다. 미 본토에서 불과 150km 남짓 떨어진 곳에 ‘공산주의의 전초기지’가 세워졌으니,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행정부가 아연실색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우려’는 이내 현실화했다. 혁명 4개월여 만인 1959년 5월 신생 혁명정부는 제1차 토지개혁을 단행했다. 개인이 소유할 수 있는 토지를 4㎢로 제한하는 한편 외국인의 토지소유를 금지시켰다. 가난한 쿠바 농민들은 환호했지만, 쿠바에 진출한 미국 기업들은 경악했다.

[%%IMAGE5%%]

애초 외국기업 소유 토지를 무상 몰수하려 했던 건 아니었다. 카스트로 정부는 20년짜리 채권(연이율 4.5%)을 발행해주겠다고 제안했지만, 미국 기업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여기에 1960년 2월 쿠바 정부가 옛 소련과 원유 공급 계약을 맺으면서 갈등은 걷잡을 수 없이 증폭됐다. 쿠바 정유시설을 장악하고 있던 미국계 기업들이 소련산 원유 정제를 거부하고 나선 탓이다. 결국 쿠바 정부는 정유시설 국유화 조처로 맞대응했다.

1960년 한 해 동안 미국과 쿠바 사이의 소리 없는 전쟁은 계속됐다. 결국 1961년 1월3일 미국은 쿠바와 외교관계를 단절했고, 이듬해 2월엔 포괄적인 경제제재 조치가 이어졌다. 아이젠하워의 뒤를 이은 존 케네디 행정부의 대응은 더욱 노골적이었다. 쿠바 망명자를 주축으로 1400여 게릴라 부대를 구성해 쿠바에 잠입시키려는 군사도발까지 감행한 게다. 1961년 4월17일 터진 ‘피그만 침공사건’이 그것이다.

위기는 이어졌다. 피그만 침공을 격퇴시킨 카스트로 정부는 “비슷한 사건의 재발을 막겠다”며 소련의 핵미사일을 쿠바에 배치하는 데 합의한다. 1962년 10월 전세계를 핵전쟁의 공포로 몰아넣었던 ‘쿠바 미사일 위기’는 이렇게 잉태됐다. 코앞에 핵미사일이 배치된 것을 알아챈 미국은 쿠바 해상 전역을 봉쇄했다. 일촉즉발의 긴장감에 지구촌이 숨을 죽였다. 미-소의 타협으로 위기는 진화됐지만, 이 사건은 두고두고 “인류가 핵전쟁에 가장 가까이 다가섰던 때”로 기억된다.

케네디 행정부는 1963년 2월 미국인의 쿠바 여행을 금지시켰고, 같은 해 7월엔 미국 내 쿠바 자산을 동결시켰다. 이듬해엔 미주기구(OAS)를 통한 다국적 제재안이 발동됐다. 제재는 계속 이어졌고, 미 의회는 지난 1992년 “쿠바 국민에게 민주주의를 가져다주겠다”는 명분을 내걸고 쿠바 봉쇄정책을 아예 입법화하기에 이른다. 또 1996년 의회를 통과한 ‘헬름스-버튼법’에 따라 미국민이 쿠바 쪽과 사업을 하는 걸 금지시켰고, 1999년엔 미국 기업의 해외지사도 한 해 7억달러를 초과하는 거래를 쿠바 쪽과 할 수 없도록 했다. 쿠바 여행과 송금 통로마저 막아놨으니, 말 그대로 ‘목 죄기’였다.

‘암살 위협에서 살아남기’ 올림픽 금메달감

‘시가처럼 생긴 폭탄, 독극물이 든 음식, 감염된 다이빙복….’ 카스트로를 겨냥한 암살 시도도 냉전 기간 내내 끝없이 이어졌다. 지난 2006년 11월28일 영국 <채널4> 방송을 통해 방영돼 화제를 불렀던 캐넬 감독의 75분짜리 다큐멘터리 <카스트로를 죽이는 638가지 방법>은 카스트로에 대한 미국 정부의 집착을 여실히 보여준다. 당시 카스트로는 “만약 암살 위협에서 살아남기란 올림픽 종목이 있었다면 단연 내가 금메달을 땄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돌파구는 하나뿐이었다. 미국의 대응 수위가 높아질수록 쿠바와 소련의 관계는 더욱 돈독해졌다. 미국의 봉쇄에 맞서 소련은 쿠바산 설탕을 국제 시세보다 비싸게 사가는 한편, 자국산 원유를 시세보다 훨씬 싼값에 공급했다. 냉전 시절 내내 이런 관행은 이어졌고, 소련은 원유와 함께 식량과 비료는 물론 각종 공산품도 부지런히 실어날랐다. 반미의 성지로 떠오른 쿠바의 교육·의료 수준은 세계인의 부러움을 샀다. 호시절이었다.

냉전이 끝나고 소련이 무너지면서 쿠바에도 위기가 닥쳤다. 값싼 원유를 실은 유조선은 더 이상 아바나항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소련산 화학비료에 길들여진 쿠바의 집단농장 체제는 지속이 불가능해졌다. 1990년대 초반 아바나를 비롯한 대도시 주민들이 굶주림에 허덕인 이유다. 카스트로 정권이 선택한 해결책은 ‘도시 유기농 혁명’이었다. “농촌을 도시로 가져올 수 없다면, 도시에서 농사를 짓자”는 구호가 땀으로 연결됐다. 골목마다 빈 땅에 씨앗이 뿌려졌다. 극한의 봉쇄를 뚫고, 당장의 배고픔은 면할 수 있게 된 게다.

“권좌를 떠나는 카스트로 동지를 위해 눈물을 보이지 마시라, 제발. 그가 물러나는 건 분명 좋은 일이다. 오히려 작별이 너무 늦었다.” 카스트로의 ‘고별사’가 나오던 날, 미국의 진보적 격월간지 <머더존스>는 인터넷판에서 이렇게 썼다. 혁명 반세기, 쿠바의 오늘은 분명 ‘천국’이 아닌 탓이다. 아바나 거리의 헐벗은 건물과 가난한 민중들 사이에서도 ‘언론 탄압’과 ‘양심수’란 낱말은 낯설지 않다.

여든한 살 피델 카스트로의 뒤를 이어 쿠바의 미래를 책임질 인물은 일흔여섯의 동생 라울 카스트로다. 형이 사회주의에 대한 ‘신심’을 강조할 때, 동생은 군대를 동원해서라도 식량증산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한 것으로 전해진다. 미국에서도 지난 2006년 7월부터 사실상 쿠바를 이끌어온 라울 카스트로는 피델 카스트로에 비해 ‘온건파’로 분류된다. 카스트로의 퇴장과 함께 미국의 쿠바 봉쇄정책에도 변화가 올 것인가?

매년 가을 벌어지는 웃지 못할 코미디

지난 1990년대 초반부터 매년 가을이면 미 뉴욕의 유엔총회장에선 미국의 쿠바 봉쇄정책을 비판하는 결의안이 통과된다. ‘냉전의 숙취’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미국이 해마다 만들어내는 웃지 못할 코미디다. 지난해에도 유엔총회가 열린 10월30일 어김없이 희극은 되풀이됐다. 결의안은 184 대 4로 압도적으로 통과됐다. 반대표를 던진 4개국은 미국과 이스라엘, 팔라우와 마셜군도였다. 미크로네시아는 기권표를 던졌다.

미 중앙정보국이 펴낸 ‘월드팩트북’을 보면, 2007년 7월 기준으로 쿠바의 인구는 1394만여 명이다. 같은 시점에 미국 인구는 3억113만여 명이다. 공식 환율로 계산한 쿠바의 국내총생산(GDP)은 지난해 기준으로 451억달러다. 미국은 13조7500억달러에 이른다. 쿠바엔 어떤 형태의 대량살상무기도 없다. 미국에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봉쇄정책은 대체 무얼 위한 겐가?


좋은 언론을 향한 동행,
한겨레를 후원해 주세요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보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