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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고독한 선물, 폴포트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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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04-03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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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다큐멘터리 제작과정에서 왜곡, 캄보디아 양민학살 은폐의 도구로 활용돼

1972년 베트남전쟁을 취재하겠다고 무작정 인도차이나반도로 떠났던 나는 당시 남베트남 당국이 프리랜서를 인정하지 않아 하는 수 없이 캄보디아로 발길을 돌렸고 결국 그것이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되고 말았다. 말하자면 남베트남 당국의 비자 거부가 내 인생을 캄보디아에 바치도록 만들어버린 셈이다.

캄보디아, 말 그대로 천국이었다. 법도 규칙도 없었던 캄보디아는 풋내기 종군기자 지망생이었던 내겐 더 없이 ‘풍요로운’ 땅이었다. 지옥 같은 전쟁터가 한없이 펼쳐져 있었고, 어디를 가든 까탈스러움 없이 마음껏 취재를 할 수 있었다. 캄보디아 전선은 내게 더 할 수 없는 ‘자유’를 선물하면서 숙명처럼 다가왔다. 그 자유를 따라 겁없이 날뛰던 나는 미군의 폭탄에 까닭도 없이 죽어가는 캄보디아를 목격했고, 그로부터 내겐 일생을 두고 미국을 저주하는 야성이 생겨났다.

크메르루즈와 함께 한 1000km 대장정


사진/1975년 인터뷰 당시의 폴포트(가운데). 폴포트와 캄보디아 전쟁의 특종들은 결국 필자를 외톨이로 만들고 말았다.
나는 1975년 캄보디아 해방일- <킬링필드> 영화식 서방의 눈으로 보자면 프놈펜 함락일- 프놈펜에 최후까지 남아 크메르루즈의 입성을 취재했다. 그리고 다시 1년 뒤 해방 캄보디아를 취재하기 위해 타이국경을 넘어 포이펫으로 걸어들어갔다가 크메르루즈 병사의 총부리 앞에서 8일간 기둥에 묶여 있다 간신히 풀려나 타이로 추방당했다. 그로부터 나는 매일 밤 캄보디아 어딘가를 헤매는 꿈을 꾸면서 몇년을 흘려보냈다.

당시, 내가 가장 사랑하고 존경했던 의 한국인 특파원 조리(이요섭) 형이 말레이시아 국경에서 타이공산당의 무장투쟁을 취재하던 중 지뢰를 밟아 한쪽 다리를 잃은 뒤, 나는 그의 카메라맨으로 의 일을 하고 있었다. 그토록 증오했던 미국, 그 미국 방송에서 일했던 것도 사실은 조리 형에 대한 존경이 미국에 대한 증오보다 깊었던 탓이다.

그 시절, 비록 캄보디아 내부는 취재할 수 없었지만 나는 조리 형을 도와 타이국경으로 쏟아져 나오는 난민 제1보라든지 베트남군의 타이국경 공격 같은 수많은 특종을 생산해냈다. 그러던 중, 1979년 꿈같은 기회가 찾아왔다. ‘폴포트 인터뷰 추진.’ 의 취재명령서를 받았고 결국 내가 카메라맨 겸 통역자로 선발되었다. 우리는 타이군의 자동차를 타고 국경을 넘어 이른바 ‘킬링필드’라고 불렀던 그 캄보디아 땅으로 들어갔다.

알려진 대로- 일반인들이 도깨비 뿔 정도로 여기는 것과 달리- 폴포트는 매우 지성적이고 근엄한 신사의 모습 그대로였다. 나는 저녁식사 때 우리를 초대해준 폴포트와 사담을 나눌 기회를 얻었다. “캄보디아해방군을 따라 종군하게 해주십시오.” 미소를 짓던 폴포트는 말했다. “곳곳에 베트남군이 도사리고 있어 불가능하오. 당신의 신변안전을 보장할 수 없소.” 나는 다시 간청했다. “사랑하는 캄보디아를 위해 죽을 준비가 돼 있습니다.” 묵묵히 듣고 있던 폴포트는 나의 마음을 읽었던지 이렇게 말했다. “기다리면 때가 올 것이오.”

그로부터 3년이 흘러 1983년, 나는 마침내 기회를 얻었다. 최고의 전사라고 불렸던 타목 장군 휘하의 크메르루즈 병사들을 따라 2달 동안 타이국경에서 톤리삽 호수에 이르는 1000km 대장정에 올랐다. 모두가 크메르루즈를 부정하고 있던 때, 나의 취재기는 특히 아세안회원국들 사이에 캄보디아를 침략한 베트남에 대한 거부감을 폭발적으로 확산시켰다. 결국 방콕에서는 크메르루즈를 포함해 캄보디아의 3개 정당으로 구성된 해방동맹군을 지원하기 위한 대규모 국제회의가 열렸다.

그러나 되돌아보면, 당시 특종 중 특종이었던 폴포트 인터뷰는 미국 시각으로 다룬 다큐멘터리 제작과정에서 왜곡되고 말았다. 미국은 그 프로그램을 통해 폴포트에 대한 국제전범재판을 요구하면서 자신들이 저질렀던 야만적인 캄보디아 대량양민학살을 은폐하는 도구로 활용했던 셈이다.

나는 아직도 당시 크메르루즈 관리였던 키앗촌이 내게 쏘아붙였던 말을 쓰린 기억으로 가슴에 담고 있다. “왜 당신은 미국 언론을 위해 일하고 있소?” 내가 발뺌을 하든 말든 결과적으로 나는 미국을 위해 일한 게 되었고, 그럼에도 내가 지닌 반미의식 탓으로 나는 미국 언론으로부터도 거부당했다. 뿐만 아니라 미국을 추종하는 속좁은 일본 언론으로부터도 나는 거부당했다.

폴포트를 최초로 인터뷰한 뒤 다시 19년이 지나 그가 죽기 직전 최후로 인터뷰한 기자라는 ‘명예로운’ 나의 이력과 상관없이, 이러한 폴포트와 캄보디아전쟁의 특종들은 결국 나를 외톨이로 만든 ‘고독한 선물’ 같은 것이 되고 말았다.

중국의 마오쩌둥을 잇는 아시아혁명의 거대한 역사였던 폴포트는 갔다. 그리고 나의 특종도 아스라한 기억 너머로 사라져 갔다. 이제 내게 남은 것은 정치적으로 이용당한 ‘특종’의 아픈 교훈뿐이다.

나오키 마부치(Naoki Mabuchi)/ 전 카메라맨·종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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