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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황야에서 피어난 특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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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04-03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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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사회를 뒤흔든 아시아 기자들의 힘, 잘난 한국의 족벌언론을 조롱한다

“단 한 토막의 기사가, 단 한장의 사진이 어떻게 역사에 봉사할 수 있는가?”

현장을 뛰는 모든 기자들이 가져봄직한 이 단순한 화두는 불행하게도 한국 언론의 것이 아니었다. 우리 기자들이 사주의 눈치를 살피는 동안에도, 우리 신문들이 독재자의 귓불을 빠는 동안에도, 우리 언론이 과대망상에 사로잡혀 정치를 하는 동안에도, 그래서 주체할 수 없이 불러진 배를 퉁기며 자본주의 최대의 권력을 만끽하는 동안에도, 우리가 개 닭 보듯이 했던 아시아의 수많은 기자들은 개성껏 언론의 역할을 고민하고 있었다.

열악한 조건 속에서 일궈낸 것들


한달 월급 15만원을 받던 사진기자는 24번의 크고 작은 군사쿠데타로 얼룩진 타이 현대사에 종지부를 찍게 만든 방콕민주항쟁에 불을 붙였고, 총부리를 턱 앞에 겨눈 크메르루즈 병사들에게 8일 동안이나 기둥에 묶였던 일본 기자는 베일에 가려 있던 폴포트를 최초로 인터뷰한 뒤 크메르루즈를 1000km나 종군해 ‘킬링필드’에 마비돼 있던 국제사회의 판도를 바꿔놓았다.

사회적 편견에 시름하던 필리핀의 여기자들은 갖은 협박을 견뎌내며 기어이 부패한 에스트라다 대통령을 쫓아내는 길잡이 노릇을 했고, 취재원 접근마저 인정받지 못했던 팔레스타인의 기자는 거대자본으로 무장한 국제공룡언론집단을 비웃기라도 하듯 오슬로평화협정을 사전에 터뜨려 세상을 놀라게 했다. 이스라엘에 강제 점령당했던 레바논 기자는 이스라엘의 도둑질과 무기개발을 폭로해 국제사회를 충격에 빠트리며 결국 이스라엘군을 물리치는 데 기여했고, 수하르토 독재 시절 필화사건으로 감옥살이를 했던 인도네시아의 기자는 동티모르 학살의 배경을 추적해 새로운 사실들을 밝혀내며 하비비 전 대통령과 다시 샅바를 맞잡고 있다.

이 기자들의 고뇌는 국제사회를 뒤흔들며 세상을 바꾸어놓았고, 세상은 이 기사들을 ‘특종’이란 훈장을 달아주며 보답해왔다. 이 모두는 열악한 조건과 환경 속에서 일궈낸 세계적인 특종들로 기록되고 있다.

조선·중앙·동아로 대변되는 족벌언론들의 월급 수준도 아닐뿐더러, 탐욕스런 사주와 야합한 집단이기주의가 뒤를 받쳐준 적도 없다. 정권과 결탁해 거저 먹은 것들도 아니며, 오히려 언론의 자유마저 희박한 기운 속에서 소비자인 시민독자들에게 권리를 돌려주기 위해 애쓴 상식적인 태도를 지닌 기자들이 생산해낸 빛나는 제품들이다.

이번주 아시아 네트워크가 마련한 ‘아시아의 특종’이라는 기획은 희한하게 썩어문드러진 우리 언론이 시민 소비자를 희롱하는 동안에도 우리가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아시아의 언론들이 얼마나 치열하게 살아왔는지를 독자들과 함께 살펴보면서 이제부터 우리가 그 잘난 한국 언론을 마음껏 조롱해 보자는 뜻을 담았다.

특히 이 기획은 특종을 날린 기자들이 잘난 척을 해보기 위해 꾸민 마당이 아니다. 시민 소비자들이 접하기 힘든 특종의 뒷모습 같은 것을 함께 즐기며 괴상한 성역처럼 둔갑한 언론의 벽을 허물어보자는 ‘야무진’ 생각을 담았을 뿐이다.

‘우물안 개구리’의 일그러진 초상

끝으로 이번주 아시아 네트워크를 준비하는 동안 특종을 뽑아낸 아시아의 기자들과 우리의 일그러진 ‘언론영웅’들이 혼합되어 내내 불쾌한 기억에 시달렸음을 고백하며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몇해 전 방콕의 국제회의장 한 모퉁이에서 벌어진 일이다. 한국의 아무개신문 기자와 타이 외무부 공보담당 직원이 승강이를 벌였다.

기자: (핏대를 높이며) 공항에서 왜 아무도 나를 안내해주지 않았소?
외무부 직원: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며) 당신이 늦게 등록해서 명단에도 없는데 우리가 어떻게 알고 안내를 해요?"
기자: (거드름을 피우며) 어떻게 한국의 최고 신문인 우리 아무개신문을 모른단 말이오?
외무부 직원: (놀란 듯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요? 그 아무개신문이 도대체 뭐요?

나는 얼굴을 붉히며 뒷걸음질로 그 자리를 도망쳐 나왔다. 이게 그 잘난 한국 언론의 정직한 자화상이다. 세상은 어떻게 돌아가든 말든, 서울에서 최고는 세계에서 최고라고 믿는 ‘술 취한 우물안 개구리’. 적어도 아시아에서만큼이라도 조롱거리가 되지 말자는 뜻이다. 그래서 현재 불붙은 한국의 언론개혁을 아시아 네트워크에 참여하는 아시아 언론과 기자들은 매우 유심히 바라보고 있다.

정문태/ 국제분쟁 전문기자·아시아 네트워크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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