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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책무덤’이 된 상아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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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03-27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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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번 ‘갱서사건’을 계기로 오스트레일리아 대학교육 문제에 대한 각종 비판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최근 시드니에 위치한 한 대학이 재정적인 이유로 1만권의 책을 매장한 사건이 밝혀져 오스트레일리아 교육계에 커다란 파문이 일고 있다. 문제의 대학은 1989년 시드니 서부지역에 설립된 웨스턴시드니대로, 설립 당시 7천명에 불과하던 재학생 수가 이제는 3만명에 이를 정도로 급성장하고 있는 후발 명문대다. 하지만 이번 ‘갱서’(坑書)사건으로 그 대학의 허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갱서사건’의 전말은 다음과 같다. 지금으로부터 6년 전 웨스턴시드니대는 약 1만권의 책더미를 두고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도서관 서가엔 빈자리가 없고 다른 장소에 보관하자니 기약 없이 지불해야할 보관료가 부담스러웠다. 고민하던 대학당국은 결국 ‘땅 속’을 새로운 ‘서고’(?)로 결정하고 말았다. 어느 칠흑 같은 자정. 사람들의 눈을 피해 대운동장 옆 빈터에서 도서관 사서의 진두지휘하에 1만권의 책은 조용히 땅 속으로 묻혔다. 상아탑이 ‘책 무덤’으로 변하는 굴욕적인 순간이었다. 매장된 책은 대부분 시드니대에서 기증한 것으로 신간 서적은 물론 100년이 넘는 희귀본도 다수 포함된 것으로 알려져 많은 학자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언론에 의해 ‘갱서사건’이 보도되자 누구보다 웨스턴시드니대 학생들이 분통을 터뜨리고 있다. “책을 묻은 것은 학문적 자존심을 장사지낸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분노의 목소리가 높다. 또한 이를 계기로 평소 학교에 대한 불만이 봇물 터지듯 쏟아지고 있다. “85명 정원 강의실에 110명이 넘는 학생들이 콩나물 수업을 받고 있다”, “5천명이 사용하는 도서관에 복사기가 겨우 10대뿐이다”, “학생들이 앉을 책상과 의자도 태부족이다” 등 무분별하게 정원을 늘려 양적 급성장을 이룬 나머지 학생복지나 교육의 질에는 무관심한 대학당국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분노한 각 캠퍼스의 학생대표들은 켐벨타운 캠퍼스를 중심으로 학생복지를 위한 획기적인 대책을 대학당국에 강력히 요청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학생들뿐 아니라 교육계를 중심으로 ‘갱서’에 대한 비판여론이 비등하고 있다. 웨스턴시드니대는 갱서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그 불가피성을 인정해달라고 호소하고 있다. 대학 대변인인 스테펀 매체트는 <데일리텔러그라프>와의 인터뷰에서 “갱서사건은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우리로선 어쩔 수 없었다. 일단 대학이 재정적으로 생존해야 교육의 질도 있는 것 아닌가? 시드니대나 뉴사우스웨일즈대는 학생 1인당 1만7천달러의 정부지원을 받는 반면 우리가 받는 지원은 1만1천달러에도 못 미친다”며 대학재정이 피폐하다보니 생긴 불상사라는 점을 강조했다. 이 인터뷰가 나가자 간접적으로 정부도 책임을 져야 한다는 지적이 뒤따랐다. 이에 발끈한 연방교육부는 “웨스턴시드니대에 대한 정부지원은 충분했으며 대학이 자율적으로 저지른 일에 대해 정부에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고 정면으로 반박하기도 했다.

정부와 웨스턴시드니대 사이의 책임전가 공방을 지켜보는 여론은 곱지 않다. 우선은 양비론적인 시각이 지배적인 것으로 보인다. 즉, 재정적자 감소를 위해 대학지원금을 지속적으로 삭감해온 정부나, 재정을 무조건 아끼자고 책을 묻은 대학이나 남을 탓할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비록 한 학교에 국한된 사건이지만, 돈과 타협하지 않는 오스트레일리아 교육의 자존심을 되찾으려면 많은 세월이 흘러야할 것 같다.


시드니=정동철 통신원 djeo8085@mail.usyd.edu.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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