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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쿠치마, 당신은 살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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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03-20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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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인 실종사건의 배후로 지목된 우크라이나 대통령 쿠치마, 과연 물러날까

사진/수천명의 우크라이나인이 쿠치마 대통령의 사임을 요구하는 플래카드를 들고 키예프 중심가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AFP 연합)
새봄을 맞는 우크라이나가 지금 혁명 전야의 몸살을 앓고 있다. 지난해 가을 비판적 언론인으로 알려진 <우크라이나 프라브다>의 편집장 게오르기 곤가제가 실종된 사건이 대규모 반정부운동으로 확산되고 있다. 이 사건을 조사·규명하기 위해 지난해 12월 초 결성된 범국민적 운동전선 ‘쿠치마 없는 우크라이나’에 시간이 갈수록 반정부세력이 결집하면서 그 세를 과시하고 있는 것이다.

“쿠치마만한 도둑이 없다”

반정부투쟁이 본격적으로 격화된 계기는 곤가제 행방 찾기에 정부가 미봉책으로 일관하고 있는 가운데 현 대통령 레오니드 쿠치마가 사건에 직접 관련되어 있다는 정황증거가 해외언론을 통해서 보도되면서부터였다. 급기야 지난해 11월에는 곤가제가 실종 두달 만에 목이 잘리고 시신이 불태워진 채 발견되었다. 이어 한 전직 보안대원이 쿠치마 대통령의 육성이라며 “그를 조용히 처리하라”는 음성이 담긴 녹음테이프를 공개해 반정부시위에 불을 댕겼다.


지난해 12월 중순 수도 키예프의 시내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독립광장’에는 대통령퇴진운동에 동참하기 위해 모인 각 지역 대표들이 천막촌을 형성하고 목적달성 때까지 영구적인 반정부투쟁을 벌여나갈 것을 결의했다. 이 천막촌에는 우크라이나의 주요 지역에서 속속들이 모여든 2천여명이 30여개의 천막을 치고 장기투쟁에 돌입하고 있다. 상황이 정치적 싸움으로 번지자 쿠치마쪽도 이른바 ‘어용계열’의 천막을 치고 맞불작전에 들어갔지만 쿠치마쪽 천막은 몇개에 인원도 불과 수십명으로 줄어들고 말았다.

1999년 우크라이나 대통령으로 성공적으로 재선된 레오니드 쿠치마는 그간 대내외정책상에서 별반 잡음없이 국정을 운영해왔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서방과의 관계도 크게 증진되었을 뿐만 아니라 푸틴이 러시아 대통령으로 등장한 뒤 그와도 새로운 전략적·경제적 동반자관계를 돈독히 해왔다. 그러나 언론인 실종사건은 그간 쿠치마가 반언론공작과 부패행위에 깊숙이 관련돼 있다는 의혹을 확인시켜주었고 이를 계기로 쿠치마에게는 물론 우크라이나 현대사 사상 최대의 정치적 위기가 조성되고 있다.

이러한 사실들은 지난해 말 전 경호실 장교 니콜라이 멜리니첸코가 해외언론에 쿠치마의 부패 의혹을 확인케 하는 대화내용이 담긴 대통령실 내부 대화 녹음테이프를 건네준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 여론에 공개되었다. 그는 지난달 26일 <뉴욕타임스>와 기자회견을 갖고 “현재 우크라이나에는 쿠치마를 제외하고 더 큰 도둑이 없다”며 그를 맹공했다. 멜리니첸코에 따르면 쿠치마는 1999년 대통령선거 때도 막대한 불법정치자금을 동원했으며 현재 그가 빼돌린 국가재정만 해도 적어도 10억달러 상당에 이른다는 것이다.

야권은 현재까지 개별·분산적으로 반쿠치마운동에 전념해왔고 그들을 한데로 묶는 유일한 운동체가 ‘쿠치마 없는 우크라이나’였다. 이런 정국현황과 관련해 지난 1월 말 정국을 분석하고 향후 전망을 진단하는 진보세력의 대중적 공개학술회의에 참가한 우크라이나 진보잡지 <정치적 구상> 편집장 알렉세이 데르카체프 등은 공개 발표문에서 “현재 ‘노동 우크라이나’ ‘민중민주당’ 등 야권 세력의 첫 번째 과제는 연합전선을 펼치는 것이다. 이 경우 2002년에 예정된 의회선거 등에서의 승리가 보장되며 이로써 기존 부패구도청산의 발판을 삼을 수 있을 것이다”고 진단했다.

학생시위, 얕보지 말라

현재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를 관망하면서 대내외 언론은 하나같이 이번 위기가 우크라이나가 옛 소련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맞는 최초이자 최대의 정치적 위기라 평가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사태의 추이과정에서 각종 “최초의” 사건들이 잇따라 발생했다. 지난 3월6일 대학도시로 유명한 리보프지역에서 최초의 전국규모 학생시위 및 수업거부 운동이 일어나 반쿠치마를 외친 바 있고 급기야 3월13일에는 키예프 시위천막촌을 철거하기 위해 사상 최대규모의 경찰병력이 동원돼 철거작전에 돌입했다. 이 과정에서 당국은 반정부조직 형성 혐의로 이고리 마주라 등 공동의장단을 체포했는데 이는 우크라이나 현대사 최초의 정치적 체포로 비난받고 있다.

“한때 카잔대학에서의 한 학생(레닌을 의미)의 퇴학이 그 이후 전 러시아 역사에 어떤 반향을 끼쳤는지 현 우크라이나 정부는 명심해야 한다”는 학생시위단체 전국대표인 미하일 그리치쉰의 표현이 웬지 심상치 않은 게 지금의 상황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박현봉 통신원 parkhb_spb@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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