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주의적 긴장 유지를 위해서는 꺼뜨릴 수 없는 러시아·일본 간의 ‘불씨’…쿠릴 열도 원주민인 아이누족에게는 분배에 대한 실랑이로밖에 보이지 않아
▣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 · 한국학
‘긍정적 오리엔탈리즘’이라 할까? 일본에 대해서는 별다른 전문적 정보를 갖지 못했던 다수의 옛 소련 사람들은, 일본인들을 대단히 친절한 ‘예의의 민족’으로 상상해왔다. 나도 그러한 환상을 공유해왔는데, 1991년 한국에서 공부하게 되어 일본인을 평생 처음으로 대면하게 됐을 때에 적지 않게 놀랐다. 나와 한국어를 같이 공부하게 된 한 일본 남학생이, 인사를 나눈 직후에 소련에서 왔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갑자기 나에게 양손을 내밀어 “북방 영토를 돌려달라”는 말을 몇 번이나 연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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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개 개인인 나와 국가 간의 영토 분쟁이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되물었지만 그는 별로 ‘친절’하지도 않은 태도로 계속 같은 말을 했다. 그 당시 소련 일반인들의 대다수는 그 분쟁의 존재 자체를 몰랐는데, 일본 ‘국민’의 집단 무의식에 ‘국민적 의무로서 실지 회복’이 얼마나 강하게 각인돼 있었는지를 그때 처음으로 실감했다.
일본공산당 강령도 ‘국민화’ 서로 이해관계가 엇갈릴 수밖에 없는 다양한 계급·계층의 구성원들을 획일적인 ‘국민’으로 통합하는 데 ‘영토 문제’ 이상의 묘책이 없다. 특히 분쟁 대상이 된 영토의 영유권이 충분히 주장을 할 만한 근거가 있는데다 역사적인 피해 기억들과 겹치게 되는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한국 입장에서 본 독도 문제처럼 일본 입장에서 본 ‘북방 영토’ 문제도 그렇다. 1855년 최초의 러-일 통상 조약(이른바 시모다 조약)에 따라서 쿠릴 열도 남쪽 네 개의 섬이 일본의 영토로 확정된 이래 1945년까지 이 섬들에 대해서 러시아가 어떤 영유권 주장도 한 적이 없는 것도 분명하고, 1945년 패전 때에 홋카이도의 북부까지 점령하려다 미국의 반대에 부딪친 소련이 이 네 개의 섬을 군사력으로 무단 점령해 1만7천 명 정도의 일본 주민들을 꽤나 가혹하게 쫓아낸 것도 부정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상당한 국제법적인 근거에다 이와 같은 상처의 기억까지 가미되기에 일본에서 북방 영토 문제는 한국 내에서 독도 문제가 갖는 ‘국민화(化)’의 효과를 가진다. 역사적으로 소련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는 일본공산당의 강령에서까지도 북방 네 개의 섬은 물론 쿠릴 열도 전체를 돌려받아야 한다는 조항이 포함돼 있는 것을 보면 북방 영토 문제가 일본 사회에서 어느 정도의 힘을 발휘하고 있는지를 실감할 수 있다. 물론 ‘소련의 괴뢰가 아니냐?’는 의심을 받게 돼 있었던 공산당으로서는 ‘국민적 의무’에 대한 과잉 충성을 보이는 것은 불가피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공산당 계열이 아닌 진보적 지식인 사이에서도 북방 영토 문제에서는 ‘국민’의 논리를 초월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매우 드물다. 러시아 안의 일부 일본 관련 전문가들도 원칙적으로 지지하고 있는 ‘북방 4도’에 대한 일본의 영토적 주장에 이 정도의 근거가 갖추어 있다면 과연 이 주장을 둘러싼 ‘총국민적 단결’에 무엇이 문제가 있느냐고 반문할 이들이 있을 것이다. 문제는 국가와 주요 보수 매체에 의해서 정형화돼 표현되는 이 영유권 주장의 초점은, 상당수가 기층 민중인 쿠릴 열도 남부의 일본 실향민의 비극에 맞추어져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가해자 러시아’와 ‘피해자 일본’ 간의 관계에 맞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러시아가 1945년에 북방 영토를 무단 점령한 악당 일색으로 그려지는 반면에, 일본은 ‘선의의 피해자’로 묘사돼 있다. [%%IMAGE4%%] 그런데 1980년대 말까지 거의 1만 명 가까운 소련 병사들이 주둔하고 있었던 그 네 개의 섬에 있는 조상의 묘에 성묘하러 가지도 못했던 실향민들은 피해자일는지 몰라도, 보수 집단이 통치해온 전후의 일본 국가를 ‘피해자’로 보기는 힘들 것이다. 한국전쟁이 종료된 뒤에 대일 관계를 우호적으로 전환해보려 했던 소련은, 1955~56년의 협상에서 네 개의 섬 중에서 두 개, 즉 일본 본토에 가장 가까운 하보마이(齒舞) 제도와 그 바로 위의 시코탄(色丹島)을 반환해주겠다는 제안까지 내놓았다. 스즈키의 부패 스캔들은 우연일까 일본 정부는 이를 받아들여 일단 평화조약을 맺은 뒤 나머지 두 섬을 나중에 우호관계를 전개해가면서 어떻게든 돌려받을 것을 신중하게 검토하고 있었는데, 이 문제에 미국이 갑자기 개입해 일본이 섬 두 개만 반환받아 쿠릴 영토 전체에 대한 소련의 원칙적인 영토권을 인정하는 조건으로 평화조약을 맺을 경우 오키나와를 영구히 돌려주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냉전에서 ‘주니어 파트너’로서의 일본을 필요로 했던 미국은, 소-일 관계에서 영토 문제라는 ‘불씨’를 남겨두려 했던 것이다. 결국 일본을 지배해온 보수적인 관료 엘리트는, 미국에 대한 맹종을 선택해 ‘대소 우호관계 전개 속에서의 영토 문제 해결’ 방안을 일찌감치 포기하고 말았다. 냉전 시절은 그렇다 치고, 러시아 쪽의 ‘하보마이-시코탄 우선 반환’ 제안을 암묵적으로 지지해 러시아 지일파 외교관·전문가 그룹과 매우 가까웠던 국회의원 스즈키 무네오(鈴木宗男)가 2002년 갑자기 부패 스캔들의 희생자가 되고, 그의 책사 노릇을 맡아온 외무성의 러시아통 사토 마사루(佐藤優)가 배임 등의 혐의로 재판을 받게 된 것은 과연 우연일 뿐인가? 미국과 일본의 친미극우파의 입장에서는 러시아와의 화해보다 미해결의 ‘영토 문제’ 강조를 통한 민족주의적 긴장 유지가 훨씬 유리한 것이었다. 실향민들은 이 정치적 게임에서 상징물로 이용됐을 뿐이다. 일본 통치자들은 쿠릴 열도 실향민들의 피해에 대한 집단적 기억을 이용해 아시아 침략 시절 일본에 의한 가해의 기억을 일본인의 머릿속에서 계획적으로 희석시키는 측면도 충분히 감지된다. [%%IMAGE5%%] 그리고 이 분쟁에서 러-일 양쪽에서 무시돼온 또 하나의 측면이 있다. 17세기 말~18세기 초에 쿠릴 열도를 러-일 양국의 상인·군인들이 침탈하기 이전에 이 땅은 아이누족의 삶의 터전이었다. ‘쿠릴’이라는 지명 자체가 아이누어 ‘쿨’(사람)에서 나왔다. 아이누를 불평등 무역·징세를 통해 착취하는 데서는, 러시아인과 일본인 사이에 별 차별성이 없었다. 일본인 대다수가 모르는 사실이지만 에도시대 홋카이도 지방 정권인 마즈마에한(松前藩)에 대한 마지막 대규모 아이누 항쟁은 1789년 북방 4도 중 하나인 구나시리(國後)에서 터졌다. 만약 쿠릴 열도 역사 속에서 진정한 피해자를 찾자면 그것이 바로 러-일 양국의 식민주의적 침탈 속에서 쿠릴에서의 삶의 기반을 잃고 홋카이도에서는 차별받는 소수 집단으로만 남아 있는 아이누들이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러-일 양국의 북방 영토 분쟁은 결국 힘이 센 도둑 사이의 장물 분배에 대한 실랑이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북방 영토에 아이누족의 자치지구를 만들어 유엔이나 러-일 양국의 공동 감독·보호하에 두어달라는 1992년부터의 홋카이도 아이누 단체들의 탄원서들은 러시아에서도 일본에서도 주목을 받은 적이 없었다. 아니누 권익 침해의 사실을 인정한다면 양쪽에서 ‘고유 영토’ 주장을 할 여지가 더 이상 남지 않기 때문이다. 아이누, 차별받는 소수 집단 북방 4도의 환상적으로 아름다운 땅에서, 아이누·일본·러시아 민중이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을 것인가? 러시아와 일본 양쪽에서 영토 문제를 ‘국민적 단결’의 도구로 삼아 피착취 계급을 ‘애국적으로’ 우민화하는 자본주의 국가가 남아 있는 한 화해·평화·공존으로의 길은 멀고도 험할 것이다. 참고 문헌 1. Kayano Shigeru, Translated by Kyoko Selden and Lili Selden, Foreword by Mikiso Hane. Boulder, Colorado: Westview Press, 1994.
2. <"Northern Territories" and Beyond: Russian, Japanese and American Perspectives> James Goodby et al. (ed.), London: Praeger, 1995.
3. Tsuyoshi Hasegawa et. al (ed.),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3.
4. <北方領土問題: 歷史と未來> 와다 하루키(和田春樹), 도쿄: 아사히신문사, 1999.
일본공산당 강령도 ‘국민화’ 서로 이해관계가 엇갈릴 수밖에 없는 다양한 계급·계층의 구성원들을 획일적인 ‘국민’으로 통합하는 데 ‘영토 문제’ 이상의 묘책이 없다. 특히 분쟁 대상이 된 영토의 영유권이 충분히 주장을 할 만한 근거가 있는데다 역사적인 피해 기억들과 겹치게 되는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한국 입장에서 본 독도 문제처럼 일본 입장에서 본 ‘북방 영토’ 문제도 그렇다. 1855년 최초의 러-일 통상 조약(이른바 시모다 조약)에 따라서 쿠릴 열도 남쪽 네 개의 섬이 일본의 영토로 확정된 이래 1945년까지 이 섬들에 대해서 러시아가 어떤 영유권 주장도 한 적이 없는 것도 분명하고, 1945년 패전 때에 홋카이도의 북부까지 점령하려다 미국의 반대에 부딪친 소련이 이 네 개의 섬을 군사력으로 무단 점령해 1만7천 명 정도의 일본 주민들을 꽤나 가혹하게 쫓아낸 것도 부정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상당한 국제법적인 근거에다 이와 같은 상처의 기억까지 가미되기에 일본에서 북방 영토 문제는 한국 내에서 독도 문제가 갖는 ‘국민화(化)’의 효과를 가진다. 역사적으로 소련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는 일본공산당의 강령에서까지도 북방 네 개의 섬은 물론 쿠릴 열도 전체를 돌려받아야 한다는 조항이 포함돼 있는 것을 보면 북방 영토 문제가 일본 사회에서 어느 정도의 힘을 발휘하고 있는지를 실감할 수 있다. 물론 ‘소련의 괴뢰가 아니냐?’는 의심을 받게 돼 있었던 공산당으로서는 ‘국민적 의무’에 대한 과잉 충성을 보이는 것은 불가피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공산당 계열이 아닌 진보적 지식인 사이에서도 북방 영토 문제에서는 ‘국민’의 논리를 초월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매우 드물다. 러시아 안의 일부 일본 관련 전문가들도 원칙적으로 지지하고 있는 ‘북방 4도’에 대한 일본의 영토적 주장에 이 정도의 근거가 갖추어 있다면 과연 이 주장을 둘러싼 ‘총국민적 단결’에 무엇이 문제가 있느냐고 반문할 이들이 있을 것이다. 문제는 국가와 주요 보수 매체에 의해서 정형화돼 표현되는 이 영유권 주장의 초점은, 상당수가 기층 민중인 쿠릴 열도 남부의 일본 실향민의 비극에 맞추어져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가해자 러시아’와 ‘피해자 일본’ 간의 관계에 맞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러시아가 1945년에 북방 영토를 무단 점령한 악당 일색으로 그려지는 반면에, 일본은 ‘선의의 피해자’로 묘사돼 있다. [%%IMAGE4%%] 그런데 1980년대 말까지 거의 1만 명 가까운 소련 병사들이 주둔하고 있었던 그 네 개의 섬에 있는 조상의 묘에 성묘하러 가지도 못했던 실향민들은 피해자일는지 몰라도, 보수 집단이 통치해온 전후의 일본 국가를 ‘피해자’로 보기는 힘들 것이다. 한국전쟁이 종료된 뒤에 대일 관계를 우호적으로 전환해보려 했던 소련은, 1955~56년의 협상에서 네 개의 섬 중에서 두 개, 즉 일본 본토에 가장 가까운 하보마이(齒舞) 제도와 그 바로 위의 시코탄(色丹島)을 반환해주겠다는 제안까지 내놓았다. 스즈키의 부패 스캔들은 우연일까 일본 정부는 이를 받아들여 일단 평화조약을 맺은 뒤 나머지 두 섬을 나중에 우호관계를 전개해가면서 어떻게든 돌려받을 것을 신중하게 검토하고 있었는데, 이 문제에 미국이 갑자기 개입해 일본이 섬 두 개만 반환받아 쿠릴 영토 전체에 대한 소련의 원칙적인 영토권을 인정하는 조건으로 평화조약을 맺을 경우 오키나와를 영구히 돌려주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냉전에서 ‘주니어 파트너’로서의 일본을 필요로 했던 미국은, 소-일 관계에서 영토 문제라는 ‘불씨’를 남겨두려 했던 것이다. 결국 일본을 지배해온 보수적인 관료 엘리트는, 미국에 대한 맹종을 선택해 ‘대소 우호관계 전개 속에서의 영토 문제 해결’ 방안을 일찌감치 포기하고 말았다. 냉전 시절은 그렇다 치고, 러시아 쪽의 ‘하보마이-시코탄 우선 반환’ 제안을 암묵적으로 지지해 러시아 지일파 외교관·전문가 그룹과 매우 가까웠던 국회의원 스즈키 무네오(鈴木宗男)가 2002년 갑자기 부패 스캔들의 희생자가 되고, 그의 책사 노릇을 맡아온 외무성의 러시아통 사토 마사루(佐藤優)가 배임 등의 혐의로 재판을 받게 된 것은 과연 우연일 뿐인가? 미국과 일본의 친미극우파의 입장에서는 러시아와의 화해보다 미해결의 ‘영토 문제’ 강조를 통한 민족주의적 긴장 유지가 훨씬 유리한 것이었다. 실향민들은 이 정치적 게임에서 상징물로 이용됐을 뿐이다. 일본 통치자들은 쿠릴 열도 실향민들의 피해에 대한 집단적 기억을 이용해 아시아 침략 시절 일본에 의한 가해의 기억을 일본인의 머릿속에서 계획적으로 희석시키는 측면도 충분히 감지된다. [%%IMAGE5%%] 그리고 이 분쟁에서 러-일 양쪽에서 무시돼온 또 하나의 측면이 있다. 17세기 말~18세기 초에 쿠릴 열도를 러-일 양국의 상인·군인들이 침탈하기 이전에 이 땅은 아이누족의 삶의 터전이었다. ‘쿠릴’이라는 지명 자체가 아이누어 ‘쿨’(사람)에서 나왔다. 아이누를 불평등 무역·징세를 통해 착취하는 데서는, 러시아인과 일본인 사이에 별 차별성이 없었다. 일본인 대다수가 모르는 사실이지만 에도시대 홋카이도 지방 정권인 마즈마에한(松前藩)에 대한 마지막 대규모 아이누 항쟁은 1789년 북방 4도 중 하나인 구나시리(國後)에서 터졌다. 만약 쿠릴 열도 역사 속에서 진정한 피해자를 찾자면 그것이 바로 러-일 양국의 식민주의적 침탈 속에서 쿠릴에서의 삶의 기반을 잃고 홋카이도에서는 차별받는 소수 집단으로만 남아 있는 아이누들이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러-일 양국의 북방 영토 분쟁은 결국 힘이 센 도둑 사이의 장물 분배에 대한 실랑이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북방 영토에 아이누족의 자치지구를 만들어 유엔이나 러-일 양국의 공동 감독·보호하에 두어달라는 1992년부터의 홋카이도 아이누 단체들의 탄원서들은 러시아에서도 일본에서도 주목을 받은 적이 없었다. 아니누 권익 침해의 사실을 인정한다면 양쪽에서 ‘고유 영토’ 주장을 할 여지가 더 이상 남지 않기 때문이다. 아이누, 차별받는 소수 집단 북방 4도의 환상적으로 아름다운 땅에서, 아이누·일본·러시아 민중이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을 것인가? 러시아와 일본 양쪽에서 영토 문제를 ‘국민적 단결’의 도구로 삼아 피착취 계급을 ‘애국적으로’ 우민화하는 자본주의 국가가 남아 있는 한 화해·평화·공존으로의 길은 멀고도 험할 것이다. 참고 문헌 1.









